〈 175화 〉15장 - 차곡차곡
플랑슈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는 율리아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 말이 정말이냐고, 진심으로 하는 것이냐고 물어보듯이.
그에 율리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서는 거기에 답을 해준다.
“왜. 혹시 싫어? 그냥 네가 말한 대로 메이드의 업무에만 계속 충실하고 싶니?”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율리아님.”
바로 아니라고 대답을 하는 플랑슈, 덕분에 미소를 흘리는 율리아.
그런 두 여인을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다른 여인들에 이어서 이 메이드마저 율리아가 은근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금씩 조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라우스를 손에 쥐고서 협박을 하는 것 같다가도 결국 그의 주인으로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합리적이면서도 꽤나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한다.
거기에서따를 수밖에 없도록 하고 결과적으로 항상 자신의 우위를 잃지 않도록 한다.
동부의 마왕으로서, 클라우스의 주군으로서 아주 적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할 수 있었다.
“단, 어디까지나 내가 암묵적으로 허락했을 때만이야. 명심해둬. 내 신경에 거슬리는 짓을 한다면 그 때는 네 앞에서 이 남자를 독식하는 꼴을 보게 해줄 테니까. 알겠니?”
율리아의 질문에 플랑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리 하겠다고 대답한다.
불만이 아예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플랑슈 성격상 저렇게 고분고분한 메이드가 아니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굉장히 머리가 좋은 메이드이기도 하다.
지금 상황에서 누가 더 우위에 있고 누가 더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지.
플랑슈는 거의 본능적으로 파악하고서는 재빠르게 계산을 끝마쳤을 것이다.
율리아와 대립해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고, 설사 이긴다고 해도 클라우스가 정말 자신의 승리를 인정해줄지 그 부분도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저 마왕과 대립한다면 자연스레 그녀와 동맹 관계를 구축한 다른 여인들과도 바로 적이 되는 것이니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게 확실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율리아에게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분명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까지 했으니 플랑슈가 바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플랑슈. 그러면 가서 내 커피나 한 잔 타다주겠어?”
“알겠습니다. 아, 이번에 새로 마실 걸 준비했는데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으음…. 아무 거나 상관없는데. 혹시 숙련된 메이드로서 추천할 거라도 있니?”
“커피도 괜찮겠지만 율리아님께는 밀크티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유의 양만 조절한다면 굉장히 부드럽고 또 좋은 향의 차를 마실 수 있습니다. 당연히 꿀을 넣어서 단맛을 낸다면 율리아님께는 더더욱 어울리겠죠.”
아무래도 율리아가 단 것을 꽤나 좋아한다는, 아니 그런 부분을 넘어서서 거의 환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그리 말하는 플랑슈였다.
숙련된 메이드의 추천에 율리아는 어디 한 번 그렇게 해보자, 라는 식으로 그녀에게 밀크티를 부탁했다.
플랑슈가 잠시 차를 준비하러 옆방으로 사라진 사이, 율리아는 고개를 돌려서 여태껏 조용히 있기만 하던 클라우스를 바라본다.
“이제는 하다하다 메이드 교육까지 맡기는 건가요? 정말이지 못 됐어요.”
“나보다는 율리아가 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잘 되었잖아요?”
“잘 되었으니까 이렇게 조곤조곤 말하는 줄 아세요. 혹 저 메이드가 건방진 모습을 보였다면 장담하는데 이 자리에서 내쫓아냈을 거예요.”
아무리 클라우스의 메이드라고는 하나 결국 그 클라우스는 자신의 신하다.
신하의 메이드로 인해 상당히 불편한 관계가 된다면 어느 왕이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까.
율리아는 플랑슈가 사라진 방향을 슬쩍 바라보다가 말을 잇는다.
“저 메이드가 따로 꼬리친 적은 없어요?”
“아직은요.”
“아직은, 이라는 말은 언젠가 그럴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걸 막기 위해서 율리아가 확실하게 교육을 해둔 거 아닐까요?”
“그렇죠. 만에 하나 또 내 경고를 어기고 당신에게 자꾸만 다가온다면 내게 말해요. 나중에 내 눈에 직접 비치게 만들지 말고요.”
성화를 내는 마왕에게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서야 클라우스는 그녀의 말을 멈출 수 있었다.
클라우스의 몸에 기대어 앉아서는 잠시 가만히 기다리던 율리아.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연다.
“나타샤는 정말 마법 때문에 온 거죠?”
“네. 맞아요. 그런데 웬 이상한 인간 귀족 생도가 찾아와서는 이상한 논리를 늘어놓기에….”
“왜요. 또 뭔데요.”
무슨 일인지 제대로 말해보라는 율리아의 성화에 클라우스는 간추려서 말을 해주었다.
로머스 차가르라는 귀족 생도,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던 어떤 주장에 대해서 말이다.
율리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점점 표정이 썩어가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미친놈들.’ 이라고 중얼거리고는 상종하기도 싫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아무튼 별의별 미친놈들이 다 있다니까.”
“문제는 그 미친놈이 정작 본인은 정상인 줄 알고 있다는 거죠.”
클라우스의 대답에 한숨을 내뱉던 율리아는 플랑슈가 준비해준 밀크티를 받아들었다.
그 차를 받아든 후 조심스레 맛을 보던 그녀는 호오, 하고 탄성을 흘린다.
플랑슈가 추천해준 이 차가 꽤나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고 그건 메이드인 플랑슈에게는 그 떤 것보다도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거 참 좋네. 고마워, 플랑슈.”
“아닙니다, 율리아님.”
“차 타느라 고생했는데 네 방으로 가서 좀 쉬는 건 어떨까? 아, 과일도 준비했구나. 잠깐의 쉬는 시간은 모두에게 필요하잖아. 그렇지 않나요, 클라우스?”
율리아의 질문에 클라우스가 일부러 약간 뜸을 들여본다.
그러자 그의 품에 안겨있던 마왕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는 그의 팔을 꼬집는다.
눈치 없이 그러지 말고 얼른 방해꾼에게 사라지는 말을 하라고 말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정말 팔에 피멍이라도 들 기세다.
해서 클라우스는 플랑슈에게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저녁 때나 다시 돌아오라고.
그 전까지는 네 방에서 쉬어도 된다고 명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허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클라우스님.”
율리아와 클라우스의 뜻을 알아차린 플랑슈가 그렇게 말을 한다.
얼굴에는 못내 아쉽다는 기운이 조금씩 머물고 있었으나 더는 고집을 부릴 수도.
또한 고집을 부려서 얻는 이득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바로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마침내 플랑슈까지 교수실에서 물러나고 마침내 방 안에는 클라우스와 율리아,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후우.”
율리아는 잠시 동안 교수실의 문을 바라보다가 아무도 근처에 없음을.
다른 누군가가 갑작스레 들이닥칠 확률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한숨을 내뱉더니 이내 슬그머니 클라우스의 품에 기대어서는 조용히 숨을 고른다.
“오해하지 마요. 나 질투한 거 아니에요. 다만 내 것을 지킨 거예요.”
“아무렴요.”
“…정말이에요. 정말로 내 사람을 지킨 것뿐이니 너무 당당하지 말란 말이에요.”
“누가 뭐라고했나요.”
“지금도 왠지 모르게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잖아요!”
“아, 이거요? 이건 그냥 율리아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깊게 느껴져서 거기에 감명을 받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클라우스 본인도 이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임을 잘 알고 있다.
더해서 7살 먹은 애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 같잖은 발연기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충 노력을 하는 이유는, 율리아도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은근히 즐기고 있어서.
당장 마왕님의 얼굴에 슬그머니 떠오르는 미소를 보면 각이 다 잡혔다.
“흥. 생각은 무슨. 하도 먹음직스러운 남자라서, 그래서 온갖 이상한 여자들이 꼬여대서 그거 쫒느라 바빠 죽겠다고요. 아무튼 쉴 수가 없어, 쉴 수가. 세실리 봐주고 카엘라랑 한 판 붙고, 그러고서 마왕성에서 비밀리에 올라오는 보고 확인하고 하다 보면 시간이 다 가는데 그런 와중에 내 사람을 웬 이상한 도둑고양이가 훔쳐가지는 않나 살피기까지 해야 하고!”
“그러면 지금 쉬면 되는 거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불편하게 위에 앉아있지 말고….”
툭툭-.
일부러 자신의 옆자리를 몇 번 손으로 두드리는 클라우스.
쉬고 싶으면 쿠션감도 별로고 불편하기만 한 자신의 위에 앉아있지 말고 그 옆에 있는 이 질 좋은 소파 위에 앉으면 되는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율리아는 흐음? 하고 가벼운 탄식을 흘리더니 힐끗 그가 가리키는 자리를 바라본다.
“으음…. 싫어요. 안 비킬래.”
“쉬고 싶다면서요.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안 불편해요?”
“그렇게 막 불편하지는 않아요. 물론 편한 걸로 따지면 당연히 클라우스, 당신 말이 맞을 테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쉴 수가 없거든요.”
“이상하네요. 쉴 수가 없다니. 지금은 딱히 할 게 없잖아요. 그게 무슨 말일까요?”
그러자 율리아는 스윽, 하고 몸을 돌려서는 클라우스를 빤히 쳐다본다.
정말 모르는 것이냐고, 지금 그 질문을 정말 몰라서 하는 것이냐고.
그렇게 묻는 듯한 표정에 클라우스는 정말 모르겠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일을 할 생각이라서 말이에요, 클라우스.”
덥석-.
꽤나 우악스러운 손길로 클라우스의 멱살을 움켜쥐는 율리아.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한 대 올려붙일 듯이 그를 노려본다.
아직까지는 클라우스 쪽이 더 강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 눈빛에서 나오는 기세는 그마저 움찔거리게 만들 정도로 강렬하고 또 무시무시했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 몸이 마력을 가속시키려고 하나 클라우스는 그것을 억지로 막아냈다.
설마 이 여자가 이제 와서 자신을 해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은근히 장난기가 심한 여인이며 당장도 미세하게 올라가있는 입꼬리는 그녀의 진심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쯤에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어울려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해서 클라우스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서는 율리아의 허벅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허벅지에서만 노닐던 남자의 손길이 천천히 위로 향한다.
클라우스의 손이 점점 더 위로 향하자 율리아의 입꼬리가 더욱 흔들린다.
잠시 후, 마침내 그 손길이 슬그머니 안으로 파고들자 그녀는 더는 참지 못 하겠다는 듯 파하! 하고 숨을 내뱉더니 짐짓 화를 내듯 인상을 찡그린다.
“한 번을 안 넘어가주죠? 진짜 정말로 진지하게 연기한 건데. 살기까지 최대한 흩뿌렸는데 어떻게 한 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을 수가 있냐고요!”
“7년 동안 전쟁터를 뒹굴었고, 거기에 더해서 또 몇 년 동안 귀족들의 눈살을 견딘 나에요. 지금 들어오는 그 살기가 정말 살의로 무장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를 놀리기 위한 일종의 장난으로 하는 것인지 구별조차 못 할 정도는 아니랍니다.”
클라우스의 대답에 율리아는 아아, 하고 그걸 생각 못 했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 조절할 수 없는 게 현실.
아무래도 카엘라와 더 많은 대련을 하면서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러면… 연기도 들켰으니까 제대로 해볼까요.”
움켜쥐었던 클라우스의 멱살을 놓은 율리아가, 이번에는 그의 상의를 붙잡는다.
그리고는 단추 몇 개를 풀고서 얼굴을 박고서는 흐으응! 하고 한껏 제남자의 향을 깊이 들이마신다.
“오늘도 먹음직스러워. 아으으, 흥분돼.”
상당히 위험한 눈빛을 번뜩이면서 마왕으로서의 독점욕과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율리아.
덕분에 클라우스는 정말이지 못 말리겠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러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조금 전의 키스와는 또 비교도 되지 않게 난폭하면서도 격정적인 키스를 퍼붓는 마왕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