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15장 - 차곡차곡
카엘라와의 기분 좋은 대련 이후 클라우스의 교수실로 향한 율리아.
클라우스도 클라우스지만 그를 따르는 이들, 당장 이 믿음직한 호랑이 수인이나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 그리고요정 측 벨라루스의 여인, 그 외에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까지.
과거의 전쟁 영웅 하나를 얻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를 얻음으로서 또한 가질 수 있는 부수적인 것들을 생각하니 자꾸만 미소가 피어올랐다.
몇몇 이들이 말하던 것처럼, 이게 바로 천운이라는 게 아닐까 하는.
이렇게 차곡차곡 모든 것을 쌓아올리다 보면 언젠가는 그 대단하던 숙부마저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동부 역사상 전무후무한 마왕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들어갈게요, 클라우스 교수님.”
그런 기분 좋은 감정을 안고서 막 교수실의 문을 연 율리아.
헌데 바로 다음에 펼쳐진 장면은 그런 행복한 생각에 찬물을 확 끼얹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어, 어억! 유, 율리아!!”
“율리아 아그네사님.”
꽤나 당황한 눈빛을 하고 있는 요정 하나,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표정의 메이드 하나.
덤으로 그녀들 사이에 앉아서 포크에 찍힌 과일을 받아먹고 있던 교수 하나까지.
“….”
율리아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후우,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그 앞에 놓인 과일, 쿠키 등을 보고선입을 연다.
“…지금 둘이, 아니 셋이서 뭐하는 거죠?”
“아, 그게… 일단, 일단 설명하자면 길어요!”
“요점만 말해 봐요, 나타샤. 우리 서로 손 잡는 거 아니었나요? 이제 친구 아니었나요? 그런데 설마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치면 나로서는 상. 당. 히 당황스러운데.”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일단 나는 클라우스 교수님께 이번 마법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따라온 거예요. 그런데 여기, 메이드 플랑슈가 자꾸만 클라우스 교수님께 과일을 물려주는데….”
과일을 물려줘? 메이드 따위가? 내 남자한테?
순간 율리아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인다. 아니, 시퍼런 번개가 쳤다.
메이드로서 메이드의 업무만 하라고, 허튼짓 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직접 얼굴까지 맞대면서 그렇게 확실하게 경고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율리아는 슬그머니 팔짱을 끼고서는 플랑슈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해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니? 라는 기운을 유지한 채로 말이다.
그러자 한 손으로는 포크를 들고 클라우스의 입에 과일을 물려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혹 과일이 떨어질까 받쳐 들고 있던 플랑슈가 입을 연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있지. 아주 많이. 왜 메이드가 과일까지 먹여줘. 메이드는 그냥 메이드잖아. 그건 메이드들 입장에서 치욕이라고 여기는 행동들 아닌가? 어디까지나 내부의 살림을 도맡는 전문직이지 어디 사창가의 여인들처럼 남자들 시중이나 들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들었는데.”
“율리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 따라서는 이 정도 시중을 들 수도 있는 법입니다. 세상에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말이라도 못 하면 최소한 얄밉지는 않다고 했던가.
저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니까 괜스레 플랑슈가 더더욱 거슬리는 율리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거슬리는 것은 다른 부분.
자신에게는 미리 알리지도 않고 클라우스 옆에 앉아있는 나타샤나.
메이드라고 하면서 자꾸 허튼 짓을 하려는 플랑슈보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조금은 무서운데요, 율리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클라우스였다.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다. 지금 저 남자가 일부러 저러고 있음을.
이런 상황을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에게 들켰는데도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다.
그렇다는 건 지금 그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제 반응에 재미를 붙이고있다는 소리다.
‘질투심 유발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진짜… 다 알면서 그러는 거죠? 다른 이도 아니고 마족, 거기에 그 마족들의 정점에 있는 마왕의 독점욕이 얼마나 심한지. 이 정도면 그냥 대놓고 도발하는 거잖아요! 클라우스!!’
꽤나 매서운 눈빛을 한 채 클라우스를 바라보던 율리아.
그러다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카엘라에게 말한다.
“카엘라.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조용히 돌아가주면 안 될까요?”
“지금 당장… 말입니까?”
“네. 지금 당장. 지금은 부탁이지만, 조금 있다가는 명령이 될 수도 있어요. 클라우스의 주군이자 앞으로 당신이 따라야 할 동부의 마왕으로서 내리는 명령. 그러기 전에 그냥 친구 수준의 부탁에서 들어주었으면 해요. 안 될까요?”
율리아의 말에 카엘라가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그녀는 클라우스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내고서는 짧은 탄식을 흘렸다.
그 후 ‘알겠습니다, 율리아님.’ 이라고 답하면서 별 다른 질문 없이 바로 문 너머로 사라지는 카엘라였다.
“나타샤.”
“네, 네. 율리아.”
“그 건방진 메이드는 제게 맡기고, 당신도 얼른 가보세요.”
“지금요? 어… 저, 저는 클라우스 교수님께 물어볼 것이 있었….”
있었는데, 라고 말하려던 나타샤는 율리아의 표정을 읽고서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
물어볼 것이 있었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저도 이만 가볼게요! 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것.
카엘라나 나타샤나 눈치가 제법 빨랐기에 율리아의 심중을 대강 알아차린 것이었다.
지금 여기서 빨리 나가주면 내가 나중에 따로 보답할 테니 지금은 일단 다 나가라.
안 그러면 상당히 불쾌할 것 같으니까 얼른 다 나가, 다 꺼져버려! 라는 마음 말이다.
“그러면 클라우스 교수님. 저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나타샤까지 사라지고, 이제 교수실에 남은 여인은 플랑슈 하나.
잠시 은발의 메이드를 바라보던 율리아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더니 곧장 책상 위에 놓여있는 조그마한 과일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 과일을 가볍게 입술에 물더니, 미처 플랑슈가 끼어들 틈도 없이 클라우스에게로 돌진해서는 그에게 과일을 먹여줌과 동시에 무척이나 격렬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플랑슈는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지 못 했다는 뜻으로 놀라고.
클라우스는 적극적이다 못 해 이제는 저돌적이기까지 한 율리아의 모습에 감탄했다.
특히 플랑슈는 눈을 깜빡이면서 이런 방식의 과일 먹이기를 왜 생각하지 못 했을까, 하고 스스로 반성까지 할 정도였다.
“아, 아아!! 유, 율리아님! 뭐, 뭐하는 짓입니까! 시, 실례되는 행동입니다! 얼른 떨어지십쇼!!”
겨우 정신을 차린 메이드가 다급히 입을 열고는 애타게 소리친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런 플랑슈의 말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서 남자의 품 안으로 더욱 제 몸을 밀어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율리아님!!”
클라우스가 주의를 주었기에 차마 율리아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 하고, 다만 옆에 서서는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전부인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율리아는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더 진한 키스를.
더해서 아예 클라우스를 와락 껴안고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남녀 간의 정사를 펼쳐놓을 것처럼 격렬하고 뜨거운 몸짓까지 보이지 시작했다.
“후으, 후으으….”
“으읏….”
격렬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 남녀 사이에서 묘하게 불길이 붙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걸 바로 알아차린 플랑슈는 아아! 하고 신음을 흘리더니 정말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무례를 무릅쓰고 율리아의 옷깃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이 정도면 만족했다는 듯 율리아가 바로 입술을 뗀다.
그리고는 막 자신에게로 다가오던 시건방진 메이드를 향해 꽤나 오만한 눈빛을 해보였다.
“메이드 주제에 너무 시끄럽네.”
“네?”
“지금 네 주인과, 네 주인의 ‘주인’ 이 개인 시간을 보내겠다는데 왜 메이드 따위가 자꾸 끼어드는 걸까? 네 입으로 메이드일 뿐이라고, 거기서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게 아닌가? 설마 클라우스 앞에서 거짓말을 한 거니?”
클라우스 앞에서 거짓을 고했다, 그 말에 플랑슈는 그럴 리가 있겠냐며 바로 고개를 저었다.
메이드로서 제 주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그런 짓을 했다면, 아니 거짓말을 할까 그런 생각마저 했다면 이미 메이드로서 실격이다.
“플랑슈.”
“….”
“메이드 플랑슈. 대답하렴.”
“…네, 율리아 아그네사님.”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단순히 이곳의 손님이 아니라, 이 남자의 여인이자 또한 이자의 주인이란다. 그걸 클라우스도 알고 있고 다른 여인들도 알고 있지. 즉 이 남자는 내 것이라는 소리고 따라서 너라는 메이드도 크게 봐서는 내 밑에 있다는 뜻이 되는 거란다.”
“….”
“네가 클라우스에게 아주 충실한 마음으로 메이드의 업무를 하고 있다는 점, 무척 고맙게 생각해.미처 내가 챙기지 못 하던 부분들을,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네가 발견하고 또 챙길 수 있으니까. 윗사람으로서는 보지 못 하는 게 아래에 있는 이는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란다. 건방진 짓을 한다면 그를 대신해서 내가 혼낼 것이야. 다시 한 번 경고해둘게. 함부로 내 남자와 내 사람들에게 건방진 모습을 보이지 마. 경고야. 알겠니?”
여전히 클라우스의 품에 안긴 채였지만, 율리아의 모습은 남자에게 홀딱 넘어가서 사지분간도 못 하는 그런 마왕의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남자가 무슨 자신의 의자나 병풍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 위에 오만한 자세로 올라앉아서는 메이드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플랑슈는 그 기세에 눌려서 함부로 말 한 마디조차 하지 못 했다.
여태까지는 이런 분위기를 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돌변한 율리아의 모습은 그 플랑슈라고 해도 순간적으로 움츠러들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율리아 아그네사님.”
“명심만 가지고는안 돼. 약속도 하고, 맹세도 하고, 그래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너는 무조건 클라우스 곁에서 내쳐지는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내 신경에 거슬리는 짓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니, 메이드 플랑슈?”
율리아의 압박에 플랑슈는 저도 모르게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정말 그녀의 말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자신을 내칠 것이냐는 무언의 질문.
그에 클라우스는 자신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어깨를 한 번 으쓱여보였다.
플랑슈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상하 관계라는 것은 상시 명확해야만 한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메이드이고, 자신은 율리아 밑의 사람이다.
그렇다는 건 플랑슈도 크게 봐서 율리아의 사람이라는 소리이니 지켜야 할 선에 대해서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더해서 다른 여인들을 자극하거나 도발해서 잔잔한 호수 위에 파장을 일으키는 짓을 벌인다면 그 또한 가장 위에 앉아있는 율리아로서 그것을 방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 앞으로는 함부로 다른 분들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율리아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 또한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더는 율리아와 부딪쳐서 자신에게, 그리고 클라우스에게 좋은 것이 없다.
플랑슈는 그 부분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굽히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는지 분하다는 감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 부분이 율리아의 마음에 그래도 꽤나 들었던 모양이다.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슬그머니 다리를 꼬고 클라우스의 품에 편히 등을 기대고서는 무척이나 오만한 눈빛을 띤 채 입을 열었다.
“물론, 가끔은 업무 외에 조금 귀여운 짓을 해도 돼.”
“…?”
“아주, 아주 가끔은 네 마음을 조금 드러내도 좋다는 말이야. 난 그렇게 무자비한 왕이 될 생각은 없으니까. 솔직히는 건방진 메이드 아무 것도 못 하게 하고 싶은데…. 막는다고 다 막아지지 않는다면 조금은 흘러나갈 곳을 하나 마련해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