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15장 - 차곡차곡
“….”
“….”
굉장한 미색의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본 채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한 명은목검을 들고 있고, 다른 한쪽은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을 들지 않은 상황.
그녀들 사이에 흐르는 기운은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당장이라도 베일 것 같이 날카롭다.
…타탓!-
그러다가 서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땅을 박차고는 서로에게 달려든다.
곧 목검과 주먹이 부딪치면서 쩌엉!- 하는 굉음이 대련장 주변으로 널리 퍼져갔다.
도저히 그런 소리가 날 수 없는데도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일까.
그건 둘 모두가 단순한 근접 전투가 아닌 마력까지 돌리면서 거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대련을 하고 있어서였다.
슈악!!-
검의 잔상이 남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를 내면서 날아드는 목검을 바라보며.
카엘라는 두 눈을 번쩍이고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서는 발차기로 상대방의 공격을 흘려냈다.
그러자 목검을 휘두르던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와아, 하고 탄성을 흘리고 만다.
이번 공격은 꽤나 진심을 다해서, 마력까지 한가득 불어넣은 일격이었는데.
그걸 발차기 한 번으로 완벽하게 흘려내니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발차기 이후 땅을 짚으며 공중제비를 돌더니 물 흐르듯 공세로 전환하기까지.
실전으로 단련된 전투적 감각은 탁월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흣!”
카엘라의 손날이 바로 제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율리아는 비어있는 것 같은 카엘라의 옆구리를 노렸다.
분명 공격은 제대로 들어가지 못 할 것이고 그녀의 방어에 가로막힐 확률이 아주 높지만.
최소한 그 방어책에 피해라도 조금씩 누적시키는 게 좋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율리아의 판단은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이 카엘라는 그대로 제 옆구리를 내어주면서 동시에 반대쪽으로 다시 한 번 발차기를 날렸다.
퍼억!!-
퍽!!-
“크윽!”
“악!”
옆구리를 맞은 카엘라는 공중을 잠깐 돌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율리아는 얼굴을 강하게 맞았기에 뒷걸음질을 치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다.
이후 둘 다 가볍지 않은 데미지를 입어서인지 대련이 잠깐이나마 소강 상태로 접어든다.
잠시 동안 상대를 노려보던 두 여인은, 거의 동시에 자세를 바로 하더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대단하군요. 그 일격에 바로 뻗을 줄 알았는데.”
“옆구리를 내어주는 걸 보고서 그에 준하는, 아니 그 이상의 공격이 들어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막거나 피할 수는 없어도 그 충격에 대비할 시간은 충분하죠.”
“안다고 해서, 대비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율리아가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만.”
“뭐에요. 설마 클라우스의 주군이고 곧 당신의 주군이기에 아첨이라도 하는 건가요? 점수라도 따고 싶은 거예요?”
“이런방식으로 점수를 딴다면 장담하는데 사령관… 아니, 클라우스 교수님께서 경을 칠 게 확실합니다. 그런 방법을 취할 생각은 저 스스로도 없고요.”
진지하지 짝이 없는 카엘라의 대답에 율리아는 농담이다, 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단 클라우스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농담 한 번도 못 하는 그런 상대가 된다.
나중에 이 부분을 잘 알아두었다가 적절한 순간에 이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들고 있던 목검을 살폈다.
카엘라의 주먹과 부딪치는 순간 묘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 그 표면에 실금이 가 있었다.
아마 이 상태로 대련을 더 지속했다면 분명 얼마 버티지 못 하고 부러졌을 게 확실했다.
“어디 숲에서 주워 온 나뭇가지도 아니고 둔기로도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목검에 금이 갔어요. 이 정도면 나를 죽일 생각으로 한 거 아닌가요, 카엘라 조교님?”
“죽일 생각이었다면 목검에 금이 가는 수준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율리아 생도.”
파칭!!-
카엘라의 양손에서 칼날보다도 더 섬뜩한 예기를 뿜어내는 손톱이 모습을 드러낸다.
더해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서 마치 웃는 것처럼 슬쩍 안을 내보이니 그 안에서 꽤나 위협적인 송곳니가 빼꼼, 하고 제 모습을드러낸다.
정말 진지하게 율리아를 적으로 인식하고 또 싸울 생각이었다면.
지금처럼 땀이나 좀 흘리다가 끝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수인 전사의 대답.
덕분에 율리아는 간만에 가슴 한 켠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베테랑은 다르구나. 이렇게 서서 대화만 하고 있는데도 이런 기운이 느껴질 정도라니. 확실히 많은 공부가 되고 있어.’
나타샤와의 대련에서는 율리아 자신도미처 생각지 못 하고 있던 근접 전투 부분의 방식을.
세실리와는 마법 운용의 또 다른 경우와 남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자신의 부족한 점을 되돌아볼 수도 있는 기회를.
그리고 카엘라와는 이렇게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경우를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실전을 경험하지 못 한 자와 수도 없이 경험한 자 간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율리아는 아직 이렇다 할 실전을 얻지 못 했기에 그 부분을 카엘라와의 대련에서 어느 정도 깨우친 후 나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던 대로, 카엘라는 진심을 다해서 그녀와 부딪쳐주고 있는 중이었다.
“앞으로 율리아 생도가 더 성장한다면, 그 때는 정말 이렇게 주먹과 발로만 대할 수는 없을 겁니다. 또한 최대한 다치지 않게 신경을 쓰는 것도 힘들 테구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당신,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율리아 당신의 사정을 봐주면서 대할 수가 없어요.”
수인들이 때로는 가볍고 장난기 많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상대방의 강함을 논할 때만큼은 세상 그 어떤 이보다도 진지해지는 종족이다.
그런 수인 전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율리아의 재능이 독보적이라는 것.
7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전장을 돌면서 혈투를 벌인 그 카엘라조차 사정을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재능이 있다면 그건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카엘라가 저렇게 바로 자신을 인정할 줄은, 율리아도 미처예상치 못 한 부분이다.
나중에 가면 사이가 좋아지기는 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대륙 전쟁에서 마족과 싸웠다.
그리고 율리아 본인은 그 마족들의 군주이자 동부의 지배자인 마왕이다.
카엘라 입장에서는 피 터지게 싸우던 자들의 주군이라는 자가 제 앞에 서있는 것.
당연히 곱게 생각하고 또 대하고 싶어도 과거만 생각하면 그리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을 대하면서 송곳니를 드러낸다거나.
혹은 불편하다는 감정이나 적의를 조금이라도 흘린 적이 없었다.
클라우스에게 아주 단단하게 경고를 들언 것인지, 아니면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래도 그 결심대로 행동하는 것 역시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다음번에는 기습에 대비하는 방법을 알려드리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율리아.”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기대되네요, 기습에 대비하는 방법이라.”
율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에 제 방에서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해서 완벽하게 제압당하고.
또 그 이후 인간 귀족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서 능욕을 당할 뻔 했다.
만약 클라우스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은 겁탈 당한 마왕이라는 최악의 불명예를 안고서 치욕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낼 뻔 했다.
“그게 첫 번째 주의할 것이에요.”
“…네?”
가만히 상대를 쳐다보다가 입을 여는 카엘라와 덕분에 당황해서는 반문하는 율리아.
갑자기 첫 번째로 주의할 것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율리아가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니 카엘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슬그머니 율리아의 곁으로 다가온다.
“일말의 감정이라도 보이지 마세요. 적이라고 생각되는 자들 앞에서. 무엇이 싫고, 무엇이 좋으며 또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지. 그 모든 게 드러나지 않게 감정을 숨기는 게 좋아요. 그게 기습에 대비하는 가장 기본이면서도 또 중요한 부분이죠.”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래, 당신 말이 맞아요, 율리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당장 저도 그걸 쉽사리 해내지 못 하니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우리들이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적이 우리들의 약점을 쥐고 흔든다면 거기에 따라서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카엘라의 말에 율리아는 순간적으로 클라우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적들이 그를 붙잡고서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한다면 자신은 그에 따를 수 있을까?
그에게 마음이 있고, 또 그에게서 받은 것도 많으니 배신을 하기는 힘들다지만.
그래도 자신의 꿈이 있고 목표가 있으며 야망이 있는데 정말 배신하지 못 할까?
‘…아니, 그 전에 클라우스가 잡힐 남자가 아닌 것 같기는 해.’
오히려 붙잡혀도 자신이 붙잡히면 붙잡혔지, 클라우스가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만에 하나 붙잡힌다고 해도 그건 오히려 제 계획대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일부러 붙잡힌 것이 확실하다고 율리아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카엘라는 어떤가요?”
“네?”
“만약 당신의 적이 클라우스의 목숨을 쥐고서 당신의 뒤를 찌른다면. 당신은 그 기습에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사령관님은, 교수님은 그리 붙잡히실 분이 아니니 애당초 실현 불가한 일입니다.”
카엘라의 대답에 율리아는 쿡,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설마 그녀도 자신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다른 걸 약점으로 삼을 수는 있어도 그만큼은 약점으로 삼을 수 없다고, 자신과 그녀 모두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네요. 그 남자가 잡힌다면 그건 제 발로 걸어갔을 확률이 무조건이겠네. 그걸 또 좋다고 붙잡은 적은 아주 신나게 두들겨 맞을 테고 말이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클라우스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카엘라.”
“듣고 있습니다.”
“그의 결정에 아주 약간의 의문이나 불만이 없는 건가요?”
율리아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카엘라는 바로 알아차렸다.
7년의 기간 동안 마족과 싸웠던 클라우스와 카엘라.
그런 그들이 이제는 역으로 마족들의 손을 잡고서 그들과 함께 언제든 인간 측으로 그 창끝을 돌릴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식이라면 도대체 왜 그 고생을 해가면서 대륙 전쟁에서 버티고 버틴 것인지 의문을 품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클라우스가 내 사람이 되었듯, 그의 사람이었던 카엘라도 이제는 내 사람이야. 그녀가 클라우스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건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란한 일. 절대적인 충성심은 얻어내지 못 해도 최소한 왕으로서 인정을 받아 내야만 해.’
같은 남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부분을 떠나서, 자신은 왕이고 그녀는 신하다.
모름지기 훌륭한 왕이라면 신하가 티를 내기 전에 그 불편한 부분들을 신경 써주고 미리 해소해주는 것이 필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은근히 그녀를 챙기는듯한 어조로 그렇게 물은 것인데….
“없습니다.”
카엘라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오히려 율리아가 당황해서는 자신을 바라보니 그녀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과 목소리를 내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 끔찍한 전쟁과 그 이후 추악하기 짝이 없는 정쟁에서 항상 따랐던 분, 저의 영원한 사령관님이자 리더이신 분입니다. 그 분께서 생각을 하셨고, 결정을 내리셨으며 행동에 옮기셨다면 저는 거기에 응당 따를 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율리아, 당신과 지낼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당신을 그 분과 같이 왕으로서 모실 수도 있는 것이겠죠.”
그 대답을 들으면서 율리아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또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다.
저런 충성심에 이성에 대한 감정까지 겹치면 조금은, 아니 많이 피곤해질 수 있는데.
클라우스를 독차지하고 싶은 율리아로서는 영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말하다 보니 갑자기 클라우스 보고 싶네요.”
“…그리 말씀하시니 갑자기 저도….”
“대련은 이만 하고 그의 방으로 쳐들어갈까요? 둘이서 말이에요.”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