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1화 〉15장 - 차곡차곡 (171/341)



〈 171화 〉15장 - 차곡차곡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귀족 생도, 로머스는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가만히 차를 마시고 있던 그의 동기들.
정정하겠다, 로머스의 뒤를 따르는 ‘떨거지’ 들은 갑자기 왜 그러냐는 눈빛을 한다.

“너희들은 분하지도 않냐. 우리 귀족 생도들이 그 교수에게 모욕을 당했다. 아무리 대륙 전쟁의 영웅이라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거야. 시험이라고 해서 교수가 생도를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거다. 평민이고 귀족이고 그런 걸 떠나서 말이야!”
“…저, 로머스. 하지만 결국  강의를 듣는 이들은 대충 수긍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인데.”
“일단은 접고 물러난 거지 수긍한 건 결코 아니야. 이건 귀족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다. 옳지 못  일을 보고서 그냥 침묵하고 있으라고? 절대 불가해!”

로머스는 꽤나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면서 갑자기 어딘가로 향한다.
덕분에 그의 떨거지들 역시 마시던 차를 전부 내려놓고는 그 뒤를 우르르 따라야만 했다.
모두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인 것은 맞으나 실질적으로 그 가문들의 구심점은 로머스가 속해있는 귀족 가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곳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는 로머스였던 것이다.



꽤나 화가 난 얼굴로 복도를 걷던 로머스는  우연하게도.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가 의도한 대로 딱 클라우스와 마주하게 되었다.
옆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요정 생도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모습에 잠깐이나마 정신이 아찔해진 로머스였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이 왜 잔뜩 화가 나서는 듣지도 않는 강의의 교수 앞에 서있는지 떠올린 후 입을 연다.



“전투 마법 강의를 맡고 계시는 클라우스 교수님!”
“네. 맞습니다만.”
“저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뭡니까? 아무리 봐도 당신과 같은 생도가 내 강의를 듣는 건 보지 못 했는데.”
“맞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강의는 듣지 않습니다. 전투 마법보다는 기초 마법학으로 다른 부분에 도움이 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겹치는 두 강의 중 교수님의 강의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내게 와서는 갑자기 대화를 하자는 건지요.”
“중간시험에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로머스의 말에 정작 당황한 건 클라우스가 아니라  옆을 따르고 있던 나타샤였다.
아니, 강의를 듣는 생도들도 결국 다 수긍하고 돌아선 부분인데.
강의는 듣지도 않은 웬 멍청한 인간 따위가 찾아와서는 건방진 언행을 보이면서 클라우스한테 대화를 운운하고 있다?
만약 이곳이 아카데미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면 바로 저 시건방진 주둥이를 뭉개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지금도 아가리 닥치고 꺼지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율리아도 딱히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 같고 간만에 클라우스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가 싶었는데 웬 이상한 귀족 놈이 앞을 가로막으니 환장할 노릇.
해서 나타샤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지고 또 스산하게 변하자 로머스의 뒤에 있던 떨거지 생도들이 바로 한기를 느끼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하지만 정작 그 한기의 대상인 로머스 생도는 열과 성을 다해 성토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교수님께서  강의에 대해 모든 권리를 쥐고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허나 교수로서 생도들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실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분에 대해서 꼭 교수님의 사과를 받고 싶기에 이렇게 대화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요? 사과를 받고 싶다, 라. 정작 내 강의를 듣는 귀족 생도들은 수긍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는데  강의는 듣지도 않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게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로머스 생도?”
“이의 제기는 누구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로머스를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좋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침  요정 생도, 나타샤 벨라루스와도 할 이야기가 있었으니  함께 자신의 방으로 가자면서 앞서 걷기 시작했다.
클라우스의 반응에 로머스는 감사하다는 대답과 함께 제 떨거지들을 데리고서는 포부도 당당히 그 뒤를 따랐다.



“…클라우스 교수님. 저런 말도 안 되는 놈들의 헛소리를 들어주실 건가요?”

바로 옆에 붙어가면서, 나타샤는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조그마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속삭였다.
갑자기 웬 이상한 머저리 귀족 하나가 튀어나와서는 헛짓거리를 하는데 왜 쫓아내지 않고 이렇게 순순히 받아주느냐, 이런 말이었다.
그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짓고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멍청한 놈이 신념을 가지면 그보다 병신 같은  없거든요. 어중간한 말로는 그 같잖은 신념만 단단해질 뿐이니 아예 처음부터 깨끗하게 박살내는 게 좋아요.”


클라우스의 대답에 나타샤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보면다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클라우스는 제 교수실의 방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클라우스님.”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하게 인사를 하는 은발 메이드.
단정히 차려입은 메이드 복에는 조그마한 얼룩이나 주름조차 발견할 수가 없다.
고생한다는 뜻으로 클라우스가 고개를 까딱이니 비로소 허리를 바로  플랑슈는 그 옆에 서있는 나타샤를 발견하고 말았다.
순간, 아주 잠깐 차가워진 기운이 가득 담긴 눈빛을 번뜩이는 플랑슈.
하지만 이전에 클라우스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는 바로 예의 바른 메이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내 손님들에게 무례는 끼치지  것, 모두가 중요한 이들이니 또한 주의를 기울일 것.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주인의 명령만큼은 확실하게 수행하는 메이드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분들도 계시는군요.”



나타샤의 뒤를 따라 들어서는 로머스와 떨거지들을 바라보면서, 플랑슈가 인상을 찡그린다.
전혀 품위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녀는 저것들을 정말 자신의 일터이자 클라우스의 공간으로 들여보내야 할까 고민하는 기색이 짙어질 정도였다.


“내 손님들이다, 플랑슈. ‘일단’  말이다.”


그런 플랑슈의 고민을 바로 풀어주는 클라우스.
덕분에 그녀는 그 말대로 일단은 그들 역시 손님으로서 안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로머스와 떨거지들은 나타샤에 이어서 플랑슈까지 보고 나니 헤벌쭉해서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생도들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나타샤와 플랑슈는 창조주가 거둔 이유가 있는 만큼 다른 여인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예쁜 것에 한창 환장할 나이, 거기에 귀족이라는 위치 덕분에 원하는 건 그냥 어렵지 않게 쥘 수 있는 철없는 애송이들을 자극하기는 충분하다   넘칠 지경.

“으어어….”
“저, 저게 메이드라고…?”

그나마 다행이라면 살이 거의 보이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기에.
더해서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로머스가 잠깐이나마 혹한 눈을 하기는 했으나 곧 자신이  이곳에 왔는지를 떠올리고 바로 고개를 돌린 덕분에 떨거지들이 무례한 짓을 벌이지는 않았다.

“앉으세요. 그보다 이름이….”
“로머스 차가르입니다. 로머스 생도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차가르라면 왕국 북부의 꽤나 유력한 가문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 자제 분인 모양입니다.”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북부의 유력한 가문  하나인 차가르.
굳이 따지자면 문(文)보다는 무(武) 쪽에 더 치우친 곳이라  수 있는 곳.
다른 귀족들처럼 귀족 우월주의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쥐뿔도 없는 것들이 주둥이만 살아서 나대는 것보다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클라우스가 굳이 그 자리에서 조지지 않고 이렇게 직접 제 방으로 부른 이유도 최소한의 인간 대우는 해줄 가치가 있는 귀족 자제이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래, 나한테  이야기가 있다고요. 로머스 생도.”
“그렇습니다. 일전에 전투 마법 강의의 중간시험에서 생도들이 교수님에 의해 신체적 폭행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폭행이 아니라 시험의 일환이었을 뿐입니다. 전투 마법이 무엇입니까.  그대로 싸우는 순간, 순간에 마법으로서 틈을 만들고 찰나를 노려 결국 승리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학문이 아니라 무예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수 있겠죠. 차가르 가문의 자제 분이라면 응당 이 무예를 배울  다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수님의 말씀에 응당 동의합니다. 전투 마법에 대해서 잘은모르지만 싸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싸움의 처절함을 모르고서 대비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과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방해만 있다고 했을 뿐이지 이렇게 무자비한 공격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고 그 시련에 대해서 과연 평등했는가, 부분의 문제 소지도 있으며 이의를 제기하는 이에게 더 한 힘을 사용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귀족 생도들끼리 모여서는 서로의 강의와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더니, 아무래도 클라우스의 강의를 듣는 귀족 생도들을 통해서 꽤나 많은 부분을 수집한 모양이다.
클라우스는 로머스의 말에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다만 그를 바라보면서 더 말해보라는 뜻을 내보였다.

“이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뭐가 옳지 않다는 거지, 로머스 생도?”
“여태까지 귀족들에게 당하신 것이 많아서. 그래서 귀족 생도들에게 다른 생도들보다 더 강한 수를 쓰시는 게 아니냐, 이런 것입니다. 클라우스 교수님께서 평민이고, 저희들이 귀족이어서. 그래서 평민이 귀족을 때릴  있느냐, 이런 이유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정말 제가 아는  클라우스 님이라면 항상 옳은 부분만을 생각하고  일들을 행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하게 여기실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흐음.”
“어느 경우든 결국 이런 행위는 옳지  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 생도끼리 부딪치게 하고서 누가 먼저 교수님께서 제시한 마법을 사용하느냐. 그런 부분으로 시험을 치르는 게 더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봐도 교수님께서는 그냥 생도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신 게 전부라고. 해서 응당 생도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로머스 생도의 말을 들으면서 떨거지들은 그 클라우스한테 당당히 말을 하고 있는 제 구심점에게 속으로 박수를 쳤고.
반대로 나타샤는 비록 가만히 앉아있긴 했으나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는 중이었다.
덤으로 플랑슈는 로머스에게 내어줄 커피에서 설탕과 꿀을 모조리 빼기로 했고 말이다.



“그러니까 딱히 이유 없는 폭행을 한 건 옳지 않다. 그래서 사과를 해야만 한다. 이런 것이군요. 귀족으로서 평민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다만 옳지 못 한 것을 조우한 한 명의 사람으로서 내게 말하는 것이다. 이게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랬어. 확실히 당신의 말이 옳을 수도 있겠어요, 로머스 생도.”
“그렇게 받아들여주신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다만, 로머스 생도. 하나 묻겠습니다. 이거에 대답할 수 있다면, 내게 맞아서 많이 아프다는 그 귀족 생도들에게 사과를 하도록 하죠.”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투로 클라우스를 바라보는 로머스.
그에 클라우스는 냉소를 머금고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옳은 것에 대해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당신이라면, 귀족이 평민을 함부로 대할 때도 그리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죠?”
“…예?”
“지금 내게는 귀족이 평민을 때린 것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다만 옳은 것과 옳지 못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허면 귀족이 전혀 옳지  한 이유로 평민을 괴롭히고 있을 때 당신은 응당 그 앞을 가로막고 귀족에게 일갈을 한 후 평민에게 사과를 하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그건….”
“사과를 하라, 그렇게 말을 못 하겠습니까? 그러면 뭡니까. 결국 당신도 똑같은 게 아닙니까. 귀족은 항상 옳고, 평민은 항상 그 옳음에 따라야만 한다.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 부분은….”



로머스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찰나.
클라우스는 어림도 없다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어냈다.



“정말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내게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가 옳지 못 한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평민이 귀족을 때려서,  부분에 갑자기 마음이 ‘불편’ 해져서 이상한 신념으로 무장한 채 내게 찾아와서 이러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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