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15장 - 차곡차곡
“이게 무슨 소리야. 또 이래? 이제는 아예 대놓고 이러고 있다고?”
왕국 귀족 회의의 의장이자 귀족파의 거두인 요제프 대공은 서찰을 받아들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연신 ‘떠이쿠!’ 라고 탄식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클라우스라는 좋은 미끼를 이용해서 그동안 심기를 거스르던 모든 것들을 한 번에 잡아 족칠 생각에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갈등의 불길이 치솟더니 급기야는 귀족파의 일원들조차 허둥지둥 하면서 상황을 파악조차 못 하고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송구합니다, 대공 각하.”
“이런 멍청한 것들. 귀족이 되어서는 이런 것 하나 감당 못 하고 이 짓들이라니. 이래놓고 여태까지 귀족 회의에서는 그리도 당당한 척을 하고 있었던 것이야?!”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설마 다수의 귀족들이 돈이 없어서 상인들에게 몰래 돈을 빌리고 있었다니.
그 긍지 높은 자들이 평민과 다를 바가 없는 자들한테 손을 벌리고 있었다니!
덕분에 귀족 모두가 단결하여 이 시건방진 무리들을 때려눕히기는커녕 살상 눈치만 보면서 혹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바짝 긴장을 하게 되었던 말이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는 중이다.
마치 누군가가 귀족 회의의 내용을 발설한 것처럼 클라우스를 미끼로 하여 평민들, 더 나아가 대륙 전쟁에서 공 좀 세웠다는 자들을 완전히 제압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그 공훈자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서는 선수를 친 것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기어코 귀족들이 대륙 전쟁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고.
그 싸움에서 모든 것을 잃은 우리들을 그 존재조차 모조리 없애려 한다고 말이다.
‘그들에 대한 대우가 미약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침묵을 하고 있어서 모두가 그냥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다. 헌데 하필이면 바로 이 시국에 일어난다고?’
단순히 대륙 전쟁의 공훈자들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던 유력한 상단들이 갑작스레 그들의 편에 서서는 우리들을 구한 영웅들은 백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잊혀서는 안 된다고 기름을 부은 것이다.
왜 기름을 부었다고 하느냐, 그건 그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간신히 억눌러두었던 평민들이 다시금 들고 일어나서는 귀족들에게 강한 불만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륙 전쟁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귀족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면서 잘만 살고, 정작 그 전쟁에서 집, 땅, 그리고 친구와 가족까지 전부 잃은 자신들은 하루, 하루가 지옥이었다고.
바로 그 타이밍에 여태까지 침묵하던 전쟁의 공훈자들이 일어서고.
또 거기에 상인들이라는 직접적인 자금책이 더해지니 순식간에 조금만 찔러도 바로 터질 것 같이 불안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속속 전해지는 소식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상황은 왕국 측만 아니라 제국까지.
더 나아가서는 요정들과 수인 사회에서도 슬슬 그 윤곽이 잡히고 있다고 한다.
전쟁에서 항상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권력을 쥔 자들.
반대로 항상 전쟁이라는 풍파를 바로 앞에서 온 몸으로 맞이해야만 했던 자들.
그 사이에 쌓이고 쌓이던 갈등들이 마침내 어떤 신호를 시작으로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우연? 아니,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절묘하다. 이럴 수가 없어. 마치 모든 걸 다 알았다는 듯이, 뻔히 다 보고 있었다는 듯이 일이 터지지 않았는가!’
쾅, 쾅, 쾅쾅쾅쾅쾅!!!
책상을 내리치던 요제프 대공은 급기야 제 머리로 책상을 찧는 수준에 이르렀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더 최고의 시기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클라우스라는 전쟁 영웅이 마왕과 붙어먹는 것을 빌미 삼아서 모든 공훈자들을 싸잡아 깎아내리고 평민들의 지지도 일부는 완전히 철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한 번, 정말 단 한 번의 그 틈새를 노린 비수 한 방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그냥 클라우스의 이야기를 대놓고 풀어버릴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갈등이 심화된 마당에 그걸 풀어봤자 민심만 더 흉흉해질 뿐이다.
모든 그림은 클라우스를 압박하여 모든 사실들을 자백하게 한 후, 그 뒤에서야 하나씩 차근차근 이루어져야 했던 일이었다.
이제 와서 급하게 진행을 해봤자 마음이 급하니 클라우스를 압박하여 들먹이려는 건 아니냐는 또 다른 건수만 내어주는 꼴이었다.
‘멍청한 것들, 어리석은 것들!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머저리들!’
이런 때일수록 귀족들의 연합이 중요했다.
아무리 분노와 정당한 논리로 주장한 자들이라고 해도.
단단하게 뭉쳐서 대항하는 권력 앞에서는 결국 모든 게 먹히지 않으니까.
저들 스스로도 귀족과 평민 중 귀족이 더 우월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출신의 한계 부분을 들먹이면서 논점을 흐린다면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타이밍에 공훈자들의 편을 들고 나선 상단들에게 귀족들이 돈을 빌렸단다.
아무래도 전쟁 직후 정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여전히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마음에 일단 급하게 돈을 빌린 모양인데 시간이 지나서도 계속 채무 관계가 유지되었단다.
여전히 지력이 회복이 되지 않는 마당에 세금으로만충당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대륙 전쟁으로 인해 상업이 갑작스레 활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미 그 상단들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자금을 지원 받고 귀족들의 손에서 벗어난 후였다.
급기야는 그 상단이 역으로 귀족들에게 거액을 빌려주기까지 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고귀한 귀족과 천한 상인으로 보이겠지만 속은 채무자와 채권자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그러니 그 상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귀족들이 목소리를 크게 낼 수가 없다.
그저 헛기침을 하면서 평민들이 너무 기고만장하구만! 크흠! 하고 마는 게 전부였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자아아앙!!”
“대, 대공 각하!”
쾅쾅쾅쾅쾅!!-
이마에 피가 맺힐 정도로 책상을 내리치는 요제프 대공이었다.
도대체 어떤 누가 자신들을 마치 손바닥 위에 두고서 가지고 놀 듯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대륙 전쟁 이후 무너졌던 인간 사회의 근간을 다시금 바로세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전쟁에서 공 좀 세웠다고 기고만장해진 자들을 완전히 억누를 수 있었는데.
그걸 눈앞에서 놓쳤다고 생각하니 정말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 * * * * * * * * *
스슥, 슥-.
뭔가를 작성하던 클라우스는 갑자기 혼자 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왕국의 귀족이라는 것들이 혼자서 행복 회로를 아주 열나게 돌리다가 몽땅 태워먹고서는 울부짖고 있을 걸 생각하니 너무나도 즐거운 게 그 이유였다.
‘여기서 관둘 생각, 당연히 없이. 이제야 시작인데.’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제 2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다.
방학 기간 때에 동부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그 이후 다시금 아카데미로 돌아왔을 때에는 달라져도 아주 완벽하게 달라진 자신과 율리아가 될 것이다.
그 전에 귀족들과의 질긴 악연도 슬슬 끝을 낼 때가 다가오고 있다.
이번에 갑작스럽게 한 방을 먹기는 했지만 이렇게 포기한다면 돌대가리라는 호칭을 달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한 번 고개 숙이고 패배를 인정하면서 다음 기회를 노리면 충분할 터인데.
이것들은 끝내 그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 하고 일을 벌이게 된다.
상황을 역전시키겠다며 얼마 뒤에 대륙 아카데미로 병사들을 보내 자신을 체포하려는것.
이유는 당연히 마족들과의 결탁, 그리고 왕국에 대한 배신 내지는 반역죄.
본인들 딴에는 클라우스의 명성에 치명적인 누를 가하는 것.
해서 자신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 교수직을 내려놓고 왕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클라우스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자꾸 좆같이 굴면, 자신도 이제 다 때려치우고 좆같이 굴면 그만이다.
이미 율리아가 자신의 손에 들어와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역지사지. 역으로 지랄을 해야 사람은 지가 뭘 잘못했는지 아는 법이라고 했어.’
귀족 놈들이 정말 미친 척 하고 대륙 아카데미로 병사들을 보내기 전까지 클라우스는 제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일단 최대한 서부의 곳곳을 들쑤시면서 놈들의 정신을 사납게 한다.
어지간한 돈줄은 비밀리에 자신이 죄다 쥐고 있으니 그것으로 일단 놈들의 목줄을 흔들고.
그 이후에 사나워진 민심에 놈들보다 먼저 돈을 있는 대로 들이부으면 된다.
사람이란 당장 자신에게 먹을 수 있게 해주는, 편안히 잘 수 있게 해주는, 따뜻하게 입을 수 있게 해주는 돈을 주는 이에게 더 많은 호감을 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잘 다녀왔냐, 카엘라.”
“네, 클라우스 사령관님.”
단 둘만 있을 때에는 여전히 클라우스를 사령관이라 칭하는 카엘라였다.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웠던 그녀는 몰래 서부로 향해서는 자신과 연이 있던 수인들.
특히 대륙 전쟁에서 꽤나 많은 공을 세우고도 딱히 대접을 받지 못 했던 중간급 전사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인간 쪽보다야 훨씬 대우는 낫겠지만 그들 역시 은근히 수인 사이에서 잊고 싶은 부류들.
결과적으로 이긴 전쟁이 되긴 했으나 딱히 영웅적인 승리라고 할 건 또 없다.
동부의 마족들과 가장 큰 접전을 치른 쪽은 인간, 그것도 남부 지역이었으니까 말이다.
본인들도 열심히 싸운 것은 맞으나 수인들의 영토에서 딱히 대단한 승리는 거두지 못 했다.
클라우스가 항전을 하다 보니 엄청난 혈전은 인간 측에서 다 벌어지고 말았고 결과적으로 수인들이 그렇게 원하는 영광스러운 전장은 제대로 치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카엘라처럼 수인들의 영토를 떠나서 굳이 다른 전장으로 향한 이들이 공을 세우기는 했으나 영광스러운 자신들의 전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딱히 많은 관심을 받지 못 하는 게 사실이기도 했다.
‘바로 그들, 카엘라처럼 수인들의 반발에도 제 땅을 떠나서 전장으로 향해 싸웠던 자들. 그 수인들 기도 좀 세워주어야지. 제법 큰소리를 낼 수 있게 말이야.’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도 많은 이들이 딱히 힘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쟁이 끝난 후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놓고 실질적으로 손에 쥔 게 없어서다.
아무리 명예가 주어진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나중에 가서 밥 한 끼조차 빌어먹어야 할 판.
가난은 명예로운 자조차 굴복하게 할 정도라고, 그리도 치명적인 것이라고.
클라우스는 그 부분을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기에 비밀리에 계속 돈을 모으고 또 풀어대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네 전우들은 어떻게 잘 지내고 있었나?”
“예.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네가 수인의 전사이기를 포기하고 왕국에 귀화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거나 혹 기분 나쁜 소리를 한 놈은 없고?”
“다행히도 모두가 클라우스 사령관님을 따르겠다는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냐. 그러면 다행이네.”
고개를 끄덕인 클라우스는 작성하던 뭔가를 마무리했다.
그 안에는 이전과 같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이는 말들이 적혀있었다.
카엘라는 그것을 흘끗 쳐다보다가 클라우스를 바라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의 뜻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닙니다만,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받아먹기만 하고 등을 돌리는 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들이 과연 사령관님의 뜻대로 움직여줄지 걱정이 되어서….”
호랑이 여인의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에 클라우스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면서 걱정할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
항상 배신의 가능성이야 열어두어야 하지만 그 배신이라는 것도 상대가 더 많은 대가, 더 많은 보상을 주겠다고 속삭여야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의 그 귀족 머저리들처럼 특권 의식에 찌든 것들은 그 배신조차 종용하지 못 한다.
평민들이 자신들을 따라야만 한다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머릿속에 박힌 놈들이니까.
자신들의 명령 한 번이면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결국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놈들이 되도록 빨리 아카데미에 쳐들어왔으면 좋겠는데.
클라우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무척 기대가 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