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15장 - 차곡차곡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세실리.”
“하아, 하아… 더, 더 할 수 있어요. 저는 충분히….”
“아뇨. 이쯤이면 충분해요.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중요한 게 또 쉬는 거예요. 너무 무리하다가는 기껏 여태까지 쌓아둔 게 다 날아가는 수가 있으니까 경청해요.”
가볍게 목검을 회수하면서 율리아가 그렇게 말한다.
그러자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세실리는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천천히 목검을 내렸다.
“원래도 빨랐는데 요즘은 배우는 속도가 더 빨라진 느낌이에요.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나타샤나 클라우스 교수님께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 저, 저는 아직 율리아와 이렇게 대련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거예요. 마왕과 계속 붙어 다니는 레블랑 가문의 여식이라니. 떠들기에는 너무 좋은 이야깃거리잖아요?”
그 말에 세실리는 두 눈만 깜빡이면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율리아의 말대로 레블랑 가문의 여식인 자신이 마왕과 이렇게 계속 친근하게 붙어있다면.
분명 그녀의 숙부, 제 아버지가 따르는 주군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고 그 옆의 다른 이들도 레블랑 가문을 분명 수상하게 여길 것이 뻔했다.
허나 그럼에도 세실리는 율리아와 사이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멀어진다면 자연스레 클라우스와도 더는 가까이 할 수가 없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얼마 전 그에게 마구 괴롭힘을 당하면서 최고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이 너무나도 흥분되고 또 행복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클라우스와 가장 가까이에서 머물고 있는 여인.
자신으로서는 감히 설 수 없는 그 자리에 있는 이의 옆에 있는 것.
그것만이 클라우스 옆에서 한껏 괴롭힘을 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세실리는 확신했다.
‘당장 나타샤도 율리아와 어떻게든 좋은 사이로 지내려고 하잖아.’
클라우스가 율리아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은 클라우스 곁에 있고 싶다.
그렇다면 자신은 또한 율리아의 곁에 있어야 하는 법이고 결국에는 레블랑 가문 역시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향해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말을 하곤 하지만.
동부 마족들 중 꽤나 알아주는 레블랑 가문의 여식으로서 아무 것도 모르지는 않는다.
권력의 세계가 어찌 돌아가는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자신이 아무리 율리아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레블랑 가의 일원.
그곳의 가주인 제 아버지는 마왕 율리아의 숙적이자 숙부인 남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 식이라면 율리아 곁의 모든 이들은, 심지어 클라우스라고 해도 자신을 완벽히 믿을 수 없을 게 분명하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뾰족한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절대 당신이 택한 주군을 저버릴 분이 아니시지만… 상관없어. 어떻게든 해낼 거야. 레블랑 가문은, 그게 아니라면 나 하나라도 클라우스님의 옆에 있을 거야.’
해서 세실리는 율리아와 최대한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율리아의 숙부가 제 아버지를 의심하고 내치게 만든다면.
갈 곳을 잃은 레블랑 가문이 역으로 마왕가에 다시금 합류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의 방안이었다.
“흐음.”
율리아는 그런 세실리를 바라보면서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클라우스만 보면 다리를 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딱 첫사랑에 빠진 아이 같은 모습.
거기에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얼굴에 그냥 전부 다 드러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블랑 가문에서 막내딸로서 어느 정도 편안한 삶을 보내서일까.
마법 부분은 천재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뛰어나지만 나머지는 보통, 혹은 그 이하였다.
특히 저렇게 제 감정이나 생각을 숨기지 못 하는 것이 그러했다.
율리아 본인에게조차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보일 정도면 말 다 한 셈이 아닌가.
“세실리. 잠시 우리 이야기 좀 나눌까요?”
“앗. 네. 그러시죠.”
대련장 한쪽에 마련된 벤치로 향해서는 자리에 앉는 두 여인.
잠시 침묵을 유지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한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건 의외로 율리아가 아니라 세실리 쪽이었다.
“궁금한 거…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그냥 편하게 물어봐도 돼요. 내가 말했잖아요? 여기서의 나는 마왕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마족 측의 생도 중 하나라고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니까 저는… 으음… 당신이,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말을 해요.”
“으, 그으…. 크, 클라우스 교수님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물어봐도….”
역시 이 여자도 내 남자한테 관심이 있구나.
아니, 관심 수준이 아니라 그냥 대놓고 마음을 품고 있구나.
이래서 인기 많은 남자를 데리고 있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라니까.
율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별 거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모든 걸 함께 하기로 한 사이에요.”
“넷?! 히끅! 흐끅! 뭐, 뭐라고 하셨. 끼흑! 나요?!”
세실리는 클라우스와 율리아의 관계가 많이 가까운 것을 진작 알고 있다.
하지만 율리아가 이렇게 대놓고 그 사이를, 심지어 모든 걸 함께 하기로 했다는 저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 했다.
기껏해야 가까운 사이다, 혹은 조금씩 알아가는 사이다, 뭐 이런 대답을 생각했는데.
초장부터 저리 세게 나오면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수준이다!
꽤나 놀랐는지 세실리는 자꾸만 딸꾹질을 해댔다.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별 거 아니라고 말은 하고 있다지만.
이미 표정에 ‘그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으니 율리아 입장에서는 꽤나 우스운 장면이었다.
“말 한 그대로에요. 남녀의 사이, 그리고 왕과 신하의 사이로서.”
“여, 역시 두 분은 그런 관계였군요. 역시….”
“왜요? 걱정스러운가요? 레블랑 가문의 당신이 보기에 마왕과 남부의 악마가 손을 잡았다는 이 말이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이라도 되나요?”
“아뇨. 저는 그냥…. 조, 조금 부러워서….”
본인이 말해놓고 아앗! 탄식을 흘리더니 급하게 입을 틀어막는 세실리였다.
뭔가를 노리거나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부럽다는 감정을 참지 못 한 듯.
말실수를 했다고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또 못내 율리아를 쳐다보는 눈길에서 ‘마왕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라는 감탄이 절로 느껴지는 것 같다.
덕분에 율리아는 뭐 이런 아이 같은 여자가 다 있어, 라고 생각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레블랑 가문하면 동부 마족들 중 유력한 가문 중 하나이면서 마왕인 자신이 아니라 제 숙부의 편에 서서 자신을 압박하던 최악의 곳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그 레블랑의 마족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적의가 꽤나 많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클라우스는 상대가 너무 강하다면 그 상대의 전력을 야금야금 깎아먹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전력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나가는 게 제일 좋다고 했어.’
율리아는 옆에 앉아서 자신의 눈치를 살살 살피고 있는 세실리를 바라보았다.
레블랑 가문에 소속된 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딱히 제 숙부에게 충성을 바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클라우스를 이용해서 어떻게 잘만 활용한다면 자신의 사람으로 쓸 수 있다.
그 빌어먹을 숙부의 든든한 후원자 중 하나인 레블랑 가주.
그곳의 가주가 가장 사랑한다는 막내딸이 갑작스레 마왕과 손을 잡는다?
아니, 손을 잡는 수준이 아니라 대놓고 충성 서약이라도 맺는다고 생각하면.
과연 제 숙부 밑에 있는 다른 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리고 자신의 숙부는 레블랑 가문에 대해서 또 어떤 눈길을 보낼까.
‘클라우스가 내 최고의 무기라지만, 그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 그건 그 남자에게도 실례되는 짓이야. 그는 나를 믿고서 내 옆에 온 것이니 나도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해. 언제까지고 그에게 신세를 지고 또 그 안락한 품안에서 받아먹기만 할 수는 없어.’
시작은 클라우스가 했겠지만, 그 길로 향하는 첫 발걸음은 그가 떼었다고 하지만.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 바로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다.
나타샤 벨라루스, 세실리 레블랑, 모두가 자신이 아닌 클라우스 때문에 자기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은 그녀들을 자신만의 능력으로서 믿을 수 있는 이로 변모시키는 것.
그리고 언제든 자신을 위해서 행동할 수 있는 이들로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나는 마왕이다. 그의 왕, 그의 군주, 그 자리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해.’
많은 마족들이 자신을 지칭하기를 부모를 잘 만나서, 운이 좋아서.
그래서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으며 심지어 여자의 몸으로 마왕이 되었다고.
율리아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다 못 해 거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험담인데도.
거기에 여태 단 한 번의 부정도, 반박도 못 하던 것이 지금까지의 자신이었다.
이제야 겨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이해했을 때 이미 숙부가 모든 걸 쥔 상태였다.
그래서 여태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은가.
여태껏 자신을 어떻게든 보필하던 충성스러운 이들에 더해서.
자신에게도 믿을 수 있고, 때로는 기댈 수도 있는 최고의 인재를 가지지 않았는가!
그런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전대 마왕과 자신의 숙부를 모두 반면교사 삼아서.
반드시 동부 최고의 마왕이 되겠다고, 그리 하겠다고 율리아는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세실리. 당신은 어떤가요?”
“네?”
“클라우스, 그 남자와 어떤 관계인가요?”
“어, 어어? 저, 저는 그, 그냥 교수와 생도입니다만!!”
“정말요? 확실해요? 장담할 수 있어요?”
얼굴을 살짝 들이밀면서 그렇게 물으니 세실리가 움찔 몸을 떤다.
딱히 율리아 자신에게 꿀릴 것 하나 없는 여인인데도 이렇게 솔직한 반응을 보이니 더더욱 미소가 피어오르면서도, 또 왠지 모르게 이 여자를 자신의 신하로 삼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클라우스는 내 사람이에요. 내 신하이고, 내 남자죠.”
“아, 아아….”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는, 내 숙부의 사람이고, 신하죠.”
“네, 네. 그렇죠…?”
“그러면 세실리가 아카데미를 떠나 다시금 레블랑 가문으로 간다면, 당신과 클라우스는 영원히, 죽을 때까지 적이에요. 왜냐? 나와 내 숙부는, 둘 중 하나가 쓰러져야만 끝나는 싸움의 양 끝에 서있으니까요.”
이 여자는 분명 클라우스에게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너무 짙어서 이렇게 제 감정조차 제대로 숨기지 못 하고 막 드러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걸 못 본 체 넘어갈 정도로 자신은 여유롭지 않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여자를 클라우스 곁에 두면서도 또한 제 신하로 만들자.
그만이 아니라 자신도 쓸 수 있는 카드로서 확실하게 해두자.
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세실리 레블랑, 당신도 내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나의 신하가 되는 거예요. 클라우스가 그렇게 했듯이, 당신도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