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7화 〉15장 - 차곡차곡 (167/341)



〈 167화 〉15장 - 차곡차곡

“…차 맛이 아주 좋네요.”



식사가 끝난 후, 나타샤가 손수 타준 차를 마시면서 율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입에 발린 말이야 원래 할 생각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나타샤가 준비한 이 밀크 티라는 것이 자신의 입에 꽤나  맞았던 것이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혹 율리아의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어요.”
“클라우스가 그렇게 말했나요?  내가  것을 좋아한다고.”
“그건 아니고 이전에 율리아의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유추했어요. 설탕이나 꿀을 조금씩 더 넣는 거 말이에요.”

미소를 지으면서 그리 답하는 나타샤를 바라보며 율리아는 훗,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지만 아마 심히 불편할 것이다, 저 요정 여인은.
방금 그녀의 앞에서 대놓고 클라우스를 정말 ‘클라우스’ 라고만 불렀으니까.
교수님이라는 호칭은 완전히 떼어버린 채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나타샤의 앞에서 그와 자신의 관계가 네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진하고 깊다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과연 저 요정이, 자존심 강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벨라루스의 여인이 뭐라고 할까.
일단은 웃으면서 넘어간다고 해도 분명 어떻게든 한  정도는 반격이라도 하려 하지 않을까?

“클라우스님이 설마 그런 부분을 함부로 말씀하실 분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좋은 분이죠.”



하지만 율리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나타샤는 딱히 그 부분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
아무래도 클라우스와 율리아의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다고 인정한 듯 했다.
불가능한 싸움에서 바동거리다가 아무 것도 아닌  밀려날 바에 차라리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안전하게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덕분에 이러면 괜히 나만 속 좁은 여자가 된 것 같잖아, 라고 투덜거리는 율리아였다.



“그 분 이야기는 그만 하고, 어제 티타임  말씀드렸다시피 광산 개발권의 완전 포기를 조건으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생각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동부도 얻는 것이 있어야 아래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테니까.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게 없다면 어떻게든 흔들어서 받아먹으려고 할 거예요.”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제안을 하는 건 조금 그런 것 같아서요.  율리아가 생각해둔 것이 있을까요? 저는 거기에 최대한 맞추고 싶은데요.”
“아직 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도 아니고 이제야 겨우 탐사 수준 아닌가요? 클라우스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네요.”



율리아는 일부러 그렇게 슬쩍 딴지를 걸어보았다.
자신의 말대로 현재 국경 인근에서 발견되었다는 광산은 정말 ‘발견’ 만 된 수준이지 채굴이니 대박이니  과정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설사 정말 은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시간과 돈을 들여서 캐낼 가치가 있느냐,  문제는 또 다른 것이며 경쟁자가 끝까지 나타샤와 경합을 벌인다면 그녀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가 아플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타샤는 마치 그 광산이 대박을 칠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그 광산에 대한 투자를 오직 자신만이 해서 모든 걸 독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같았다.



‘가능성이 높은 광산이라면 분명 경쟁자들이 많을 터인데. 심지어 나타샤는 벨라루스에서 은근히 많은 견제를 받고 있다고 했으니까 조금은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런 율리아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타샤는 걱정 할 것 없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분명  될 것이라고, 클라우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통에 걱정한 율리아만 괜히 난감해질 정도였다.



“걱정은 마시고 원하는 걸 말씀해보세요. 광산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면,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께서는 어느 정도의 보상을 원하시는지 말이에요.”

나타샤가 율리아를 부르는 호칭이 마왕으로 바뀌었다.
그에 율리아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생도 율리아가 아닌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서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얼마를 원하든 그건 율리아의 자유죠. 동부 마족들이 반발을 한다면 어차피 그 광산은 반도 개발하지 못 할 겁니다. 광산 개발을 해야 하는 요정과 나타샤 입장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아닌 이상 약간의 무리를 해서라도 그 광산을 전부 먹어야 것이고요. -

분명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마치 높은 대가를 불러도 괜찮다는 뉘앙스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이 아니라면 어떤 요구든 결국 수용할 테니 안심하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솔직히 광산에서 채굴되는 은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3할을 요구할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역시 그건 너무 과한  같다, 어떤 이는 3할 정도면 괜찮지 않겠냐 하겠지만 적어도 율리아에게는 그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 마왕성이 부족한 자금으로 인해 허덕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숙부라는 작자가 중간에서 몰래, 이제는 거의 대놓고 세금을 탈취해서 그런 것이다.
거기에 반 마왕파의 귀족들도 세금을 마왕가에 전하지 않고 그에게로 내고 있고.
하지만 내부의 상황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되돌린다면 자연스레 자금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심지어 당장급한 불도 클라우스 덕분에 끌 수 있었으니 더더욱 돈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더 간절하고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자신을 도와줄 세력.

서부의 모든 이들과 철천지원수가 되어서는 으르렁거릴 필요는 없다.
괜찮은 자들과 손을 잡고, 또 믿을 수 있는 이들과 연을 맺어서 관계를 구축하는 게 좋다.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려서는 그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음을, 율리아는 동부에서 벌어지는 이 참상을 통해서 뼈저리게 깨달은 후였다.


‘미안해요, 클라우스. 당신은 되도록 많은 대가를 요구하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나는  적은 대가를 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동부를 넘어서서 서부에도 연이 닿는 곳을 만들어두고 싶어.’



여태까지 지켜본 나타샤라는 여인, 클라우스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부분들은 충분히 친구로서 둘 가치 정도는 있다.
초반에는 많이 부딪치고 또 투닥거렸으나 둘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별 탈 없이 미소를 지으면서 차를 마시는 사이까지 오지 않았는가.

해서 율리아는 고민을 끝냈다.
여전히 팔짱을 끼고는 있었지만 희뿌옇던 머리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나타샤 벨라루스. 당신은 아무래도  광산이 꼭 성공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군요. 아니, 확신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런 것이 맞죠?”
“네, 맞아요.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  그렇게 확인하고 있답니다.”
“허면 내가 광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손해가 막심하겠군요.”

율리아의 말에 나타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분명 어제 티타임 때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자신의 확신을 보니 광산을 버리는 것보다 소유권을 두고 싸우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과하게 확신을 가지는 모습을 보인 것일까, 상대방 입장에서 버리면 너무 아쉬운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만 것일까.
나타샤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우려감이  고개를 들려는 찰나였다.

“내가 어느 대가를 제시하든 수용할 자신 있나요?”
“…어떤 대가를 원하시는 건가요?”
“어제 말했다시피 광산 개발 이후 채굴할 은의 수익에 대한 일부겠죠.”
“그렇군요. 허면 얼마를 원하시는지 듣고 싶네요. 광산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조건이니까 못 해도….”
“1할.”


아무리 못 해도 2할 이상은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나타샤였다.
헌데 율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딱 절반에 달하는 1할이 전부.



“저,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 방금 1할이라고 한  같은데 뭔가를 잘못….”
“아뇨. 똑바로 들었어요. 매년 광산의 수입으로 벌어들이는 이익의 1할. 그것만 약속해준다면 우리 동부의 마족들은 그 광산에 대해서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거예요.”
“….”

매년마다 벌어들이는 것의 1할을 가져간다는 것이 결코 적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게 순수하게 요정 영토 안에 있는 광산도 아니고, 점점 파다보면 자연스레 국경을 넘어서는 동부에까지 다다르게  것이다.
이리 되면 마족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라 하며 더 많은 이득을 원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중간중간에 딴지를 거는 것만으로도 1할 이상의 이득은 쉽게 얻을 수 있다.

해서 나타샤가 이리 당황하고 놀라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심지어 1할이면충분하다고 하는 이는 현 동부의 군주인 마왕이다.
그녀가 내뱉은 말이니 다시는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다른 마족들도 딴지를 걸지 못 한다.



“…혹시 제게 다른 무언가를 원하시는 건가요?”

생각에 생각을 하던 나타샤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1할만 요구하는 건 뭔가 이상하다, 아주 많이 이상하다.
마왕가의 상황은 나타샤도 대충 알고 있는 마당에 당장 보이는 이득을 거부하고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적은 것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클라우스님과 거리를 두라는 그런 조건을 거는 건….”
“저기요? 내가 그렇게 치졸한 짓까지 할 여자로 보이는 건가요?”

바로 무섭게 눈을 부라리는 율리아였다.
그냥 확 5할로 올려버릴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참자, 참아.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표정을 관리하고는 다시 입을 연다.



“다른 무언가를 원한다. 네, 맞아요. 나타샤 벨라루스. 난 당신에게 따로 원하는  있어요.”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당연하죠. 나는 당신, 나타샤 벨라루스. 그대와 진짜 의미로 친구가 되고 싶어요.”
“…친구요? 저랑 말인가요?”

율리아의 말에 나타샤는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족, 그리고 요정.
서로 으르렁거리기 바쁜 사이, 설사 사이가 조금 좋다고는 해도 보면 그냥 서로의 이윤을 위해서 거래 정도를 맺은 사이, 딱 그 뿐이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 대륙 전쟁에서 완전히 터져버렸고 그 결과 지금은 서로의 종족 이야기만 해도 눈을 부라리면서 험담을 하기에 바쁠 정도였다.

그나마 이곳 대륙 아카데미에서는 그런 행위가 일절 금지되어 있고 또 전쟁의 참화에서 다들 한 발자국 정도는 떨어져 있던 이들이라  반감이 조금은 덜 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족과 요정이, 심지어 요정 사회의 유력한 가문  하나인 벨라루스의 자신과 동부의 군주인 마왕이 친구를 맺는다는 건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건가요.”
“별  없어요. 그냥 나도, 당신도 모두 한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보냈잖아요. 그리고 그걸 버텨내서 이제는 가장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말이에요.”
“….”
“그리고 둘이 똑같은 남자를 좋아하고 있죠. 아니,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려나? 흐음…. 그렇게 되겠네요. 아무튼 그런 공통된 부분들을 가지고 있기에 당신과 조금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래요. 나타샤 벨라루스.”
“하지만….”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길은 가시밭길, 가는 곳마다 우군보다는 적이 많을 거예요. 그렇다면 최소한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고 또 때로는 도움도  청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상당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때요? 내 생각.”

율리아의 말에 나타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솔직히 자신도 눈앞의 마왕과 조금 더 사이를 진전시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클라우스가 그렇게나 율리아와 가까워지라고 등을 떠미는데, 그리고 마왕과 보이지 않는 동맹을 맺는다면 향후 꽤나 많은 도움이 될 게 확실한데 내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만 아직은 남아있는 요정의 자존심.
벨라루스의 고귀한 요정으로서 마왕과 친구 사이까지 맺는  정말 괜찮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나타샤를 붙잡고 있는 중이었다.

허나  망설임은, 그리고 자존심은.
율리아의다음 말에 너무나도 쉽게 와르르!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당신과 내가 친구가 된다면, 클라우스가 무척이나 기뻐할 거예요.”
“저, 정말요?”
“내가 장담하죠.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의 이름을 걸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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