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14장 - 주말이 더 바쁨
“….”
“어떤가요, 율리아. 뭐라고 쓰여 있죠?”
뭐라고 쓰여 있기는, 당연히 전사장에 대한 보고가 주를 이룰 것이다.
한 번 의심의 불길이 피어오른 이상 그것이 진화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배신자라고 상상도 하지 못 할 때나 의심할 구석이 하나 없는 이가 되는 것이지, 수상한 부분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온갖 것이 증거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전사장 헤에타리에 대한 것이에요. 아주 은밀하게 뒤를 캔 결과 그의 아내가 비정기적으로 반 마왕파에 소속된 가문의 다른 귀족 부인들과 만나는 걸 확인했다고 하는군요.”
“단순한 사교 모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때가 너무 좋지 않네요.”
“더해서 그 의도도 알 수가 없고요. 보고라도 했다면 정보를 캐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그것도 없었다고 하고.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번 의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하니 계속 조금씩 보이고 있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의심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전사장의 행실이 너무나도 올바른 것이었으니까요. 솔직히 지금도 그가 마왕가를 배신했다고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모두가 떠나갈 때 끝까지 부왕의 곁을 지킨 인물이니까.”
최악으로 치닫는 힘겨운 상황에서 옆에 있어준 이는 그 무엇보다 든든하고 또 고마운 존재다.
율리아 역시 그런 감정을 전사장에게 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왕 때부터 온갖 회유에도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면서 묵묵히 제 임무만 하던 남자.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이가 쉽사리 그를 의심할 수 있을까.
클라우스조차 그의 연기에 제대로 속아넘어간 전적이 있다.
덕분에 그 회차는 잘 나가다가 그대로 자빠졌고, 분노와 치욕 속에서 회차를 반복해야만 했다.
그 이후 클라우스는 전사장 헤에타리를 제거대상 1순위에 항상 올려두었다.
역으로 회유하고 싶지도 않고 이중 스파이로 만들어서 정보를 빼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놈을 잡아서 그 앞에서 가족들 사지를 죄다 뽑아버리고 잘근잘근 밟아 죽이면서 그들이 원통하고 비참한 목소리로 헤에타리의 이름을 부르짖게 할 생각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전해둬요. 전사장도 멍청한 이가 아닌 이상 자꾸 의심의 눈길이 계속되면 뭔가를 눈치 채고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까.”
“시종장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이미 내용을 덧붙였어요. 너무 날카로운 모습만 보이니 전사장이 조심스러워 하는 게 보여서 다시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고요. 그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해도 이쪽의 정보들이 새어나가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겠죠.”
율리아는 이후 마왕가로 전해진 자금 쪽에 관해서 말했다.
현재 착실하게 전투 준비를 쌓아가고 있으며 특히 얼마 전부터 마왕가에 새로이 충성을 맹세한 중립파 귀족들과 접촉을 하고 있다고.
특히 클라우스가 일러준 귀족들을 중심으로 자금 중 일부를 풀면서 그들을 굉장히 믿고 또 의지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고 말이다.
“언젠가 마왕성에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무리 이쪽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어도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고서 그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를 테니까요.”
“아뇨, 율리아. 되도록 기말시험 때까지는 아카데미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계속해서 이렇게 멀리서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좋습니다.”
“이유는요?”
“일단 당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일종의 신비주의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걸 심어두는 거죠. 먼 곳에서 명령을 내려도 남아있는 충성파들로 인해 완벽하게 지켜지고 또 제어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훨씬 안정적일 겁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반박했다.
최고 권력자가 자리를 비우면 곧잘 다른 생각은 품는 이가 나오곤 하는데, 당장 전사장과 같은 경우도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상당히 일리 있는 반박이었지만 클라우스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중립파라는 배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아탄 자들은 더는 갈아탈 기회도 없다.
그리 했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줏대 없고 믿을 수 없는 이로 낙인이 찍힐 테니까.
충성파들은 이미 율리아가 자금을 전해주었고 아카데미에서 클라우스와 꽤나 긴밀해보이는 관계를 보이고 있다는 소식에 흥분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제 와서 갑자기 통수 각을 잡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 더 이상 배신할 놈이 없어. 전사장이 마지막이었지.’
이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클라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율리아의 걱정을 단번에 일축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여기서 더 있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지만….”
“율리아가 여기 있어야 당신의 숙부도 인원을 두 배로 쓰게 됩니다. 이곳과 마왕성, 그곳에 전부 눈과 귀를 보내서는 뭐라도 엿보고 또 엿듣게 하겠죠.”
“하긴… 그 남자의 밑에는 그런 일을 중점으로 하는 자들이 있죠.”
“네, 그리고 어제 그 놈들을 아카데미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부 죽이고 왔답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어? 하고 탄식을 흘린다.
자신이 말하는 자들이란 바로 그림자라 불리는 단체의 일원들.
전투력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그 은밀함 만큼은 ‘그림자’ 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는데.
또 어느 틈에 아카데미를 나서서는 그들을 전부 살해하고 왔다는 것일까.
“아니…. 원래 주말은 쉬라고 있는 거 아니었나요?”
“일단은 그렇죠.”
“그런데 클라우스, 당신은 오히려 주말에 더 바빠 보이네요.”
“딱히요? 오히려 율리아와 함께 보냈던 주말이 내게는 훨씬 더 바빴는데.”
얼마 전에 있었던 주말 내내 벌어진 광란의 정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가 떠오르자 율리아는 입을 다물고는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당시에는 너무 좋아서, 그리고 무척이나 흥분되어서 미친 듯이 클라우스 위에 올라타고 그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죄다 빨아먹을 기세로 들이댔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서 그 때를 떠올리니 그야말로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그런 시간이었다.
율리아가 크흠! 흠! 하고 헛기침을 몇 번 내뱉는다.
그 때 일은 서로의 기억 속에 좋은 추억으로 두고 괜히 꺼내보지 말자는 뜻이었다.
물론 클라우스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왜 그런 반응인가요? 혹시 내 테크닉이 별로였나요? 분명 그 때는 좋아 죽으려고 했던….”
“으아아! 그, 그래서! 그 그림자들의 시체는 잘 처리하고 온 거겠죠. 클라우스?”
“아뇨. 그냥 그 자리에 다 내팽겨 치고 왔습니다만.”
“에? 아니, 아니? 잠깐만요. 기껏 조용히 처리해놓고 시체 정리는 하나도 안 했다고요?”
클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니 율리아가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그 다음으로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클라우스를 타박한다.
그들에게서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분명 제 숙부는 또 다시 그림자들을 보낼 터인데 그렇게 되면 그들이 모두 당했다는 것을 고스란히 알려주는 꼴이라고.
놈들의 흔적을 전부 지워버리면 그 자들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 있을 터인데 왜 그런 수고로움을 덜어 주냐고 말이다.
“아뇨, 율리아. 오히려 이 방식이 낫습니다. 원래는 놈들을 싹 다 치워서 그런 방법을 취하는 게 맞습니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니에요.”
“이유는요?”
“계속해서 그 남자의 신경이 쓰이게 만들 겁니다. 특히나 새로 보낸 그림자를 불시에 기습해서 전부 잡아 죽이고 그 시체를 그냥 버려두었다는 뜻은 얼마든지 다시 보내라는 것. 당신의 숙부는 당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런 결정을 내릴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 거예요. 해서 당신 옆에 또 다른 조력자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더더욱 머리를 싸매겠죠.”
“당신은….”
“율리아가 보기에 내가 시체를 감쪽같이 숨길 남자 같나요, 아니면 그냥 대놓고 내버려둘 사람 같나요? 어떻게 생각하죠?”
“…전자죠.”
“네. 당신의 숙부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나 이외의 또 다른 조력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당신을 건드리기가 더더욱 힘들어지겠죠. 결국 그런 불편한 부분은 혹여나 또 있을지 모르는 내부의 배신자들을 재촉하는 결과를 불러올 겁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그제야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이쪽의 전력을 노출시킨 다음 상대방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든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흔들림을 감지한다.
굳건히 버티고 서서 때만 기다리고 있는 이를 넘어트릴 수 있는 건 결국 그 스스로 뿐이니 그런 방법으로서 제 숙부를 흔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보다 클라우스, 당신이 없었으면 또 내 주변에 불청객이 달라붙었겠네요.”
“달라붙다 뿐일까요. 당신의 숙부가 여태 한 짓들을 생각해보자면 그 이상으로 달갑지 않은 일들을 꾸몄을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이면서 율리아는 으득, 하고 이를 악물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참으면 비로소 그에게 반격의 비수를 날릴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여겼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보기 좋게 후려칠 수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무조건 이길 것이다.
“영지전 이후 베드르 영주가 파인 영주의 영지를 전부 몰수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바로 걸고 넘어져요. 모든 영지는 결국 왕가에서 하사한 것인데 어찌 한마디 말도 없이 깃발만 꽂고 나의 것이라고 동부에 널리 알릴 수가 있냐고 말이에요.”
“이후 파인 영지에서 정식으로 영지를 청하는 서신이 온다면….”
“시간을 질질 끌어요. 마침 마왕은 마왕성에 있는 게 아니라 이곳 아카데미에 있으니 시간이 두 배로 걸리도록 만들 수 있겠네요. 그런 방식으로 반 마왕파를 계속 자극하는 겁니다.”
우리가 유리하다, 우리가 몇 번만 휘저으면 게임은 끝난다.
그런데도 자꾸만 도발을 하고 시비를 건다면 더는 움츠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부딪치게 될 거 그냥 우리가 먼저 들고 일어나서는 한 번에 밀어버리자.
반 마왕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어나도록 계속해서 불붙은 장작을 던지라는 소리였다.
그들의 생각대로 아직까지는 반 마왕파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합류한 귀족들의 수나 그 힘으로만 보아도 충성파는 여전히 불리한 상황 그대로이다.
거기에 보유한 사병의 숫자도 역시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어느 누가 본다고 해도 반 마왕파의 승리가 훨씬 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클라우스는 거기에 두 개의 잿물을 들이부을 계획이었다.
하나는 이전에 말했듯 저들이 먼저 ‘왕’을 배신하고, 반역을 꾀하여 충성이라는 당연한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다는 명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인 의심을 불어넣어서 몸집이 너무 비대해진 반 마왕파가 스스로 자빠지게만드는 내부 붕괴였다.
“점심에 세실리와 만나서 티타임을 가질 생각이에요. 그것도 아주 대놓고 말이죠.”
“좋아요. 되도록 소문이 잘 나도록 민감한 주제도 서슴지 않고 꺼내놓으세요. 예로 들자면….”
“주인을 저버린 자의 처분에 대한 것. 뭐 이런 것으로 할까요?”
“아주 좋네요. 가십거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최고로 적당한 이야깃거리네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어요. 요정 측에서 자신들과 우리 동부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곳에 대한 광산 개발에 대해서 서신을 보냈다고 하는데 확실한 게 없어서요. 무엇보다 그 일대는 이미 몇 차례 광산을 개발했던 곳이라 좋은 광맥이 없다고 판단되던 곳이었거든요.”
율리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여태까지는 그야말로 ‘꽝’ 이었던 곳이었겠지만,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엘도라도가 되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