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14장 - 주말이 더 바쁨
재미있던 구경거리는 다 끝이 났다.
특히 리르가 꽤나 심한 부상을 입은 와중에도 기어코 제 머리로 상대방의 코를 부러트리고 그 틈을 노려서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여태까지는 단순히 기척을 숨기는 것에 능한 리르의 강점만을 이용해왔는데.
앞으로는 저 부분을 더욱 강화해서 전투 부분에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더 망가지면 곤란하니까….’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클라우스는 미처 상대가 반응하기도 전에 튕기듯 몸을 날렸다.
상대방도 리르와 같은 그림자의 일원, 따라서 몸놀림 하나만큼은 쓸 만 할 것이다.
괜히 여유를 부리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상당히 귀찮아질 터이니 바로 끝을 내는 게 좋다.
엄청난 속도로 밀고 들어오는 클라우스를 바라보며 남자는 회피는 늦은 걸 직감했다.
일단 어떻게든 저 공격을 막아낸 후 반격을 하든 아니면 자리를 이탈하든 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급하게 무기를 들고서는 막 앞을 막아서는 순간이었다.
‘어?’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오던 상대방이 갑자기눈앞에서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이게 말이 되는 것이냐거 생각하던 찰나.
문득 그는 자신의 양 발목이 화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 그의 몸은 균형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버둥거리던 그는 곧 제 몸이 왜 균형을 잃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자신이 서있던 자리에 놓여있는 것은, 발목의 아래 부분만 남은 두 발.
그 끔찍한 광경을 확인한 그는 바로 제 다리 밑을 확인했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 어어?! 아악! 아아악!!”
아무리 몸놀림이 좋다고 해도 그 추진력을 내주는 발만 잘라내면 아무 것도 아니다.
피식, 미소를 지은 클라우스는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고서 도망치려고 하던 마족의 뒤통수에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단검을 그대로 던졌다.
뻐억!!-
단검의 명수라고 해도 그 두꺼운 두개골을 뚫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차라리 심장이나 폐, 혹은 뼈가 없는 복부, 하다못해 얼굴을 노리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스가 던진 단검은 정확하게 마족의 뒤통수에틀어박혔고 뼈를 박살내고 안으로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를 냈다.
덕분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한 채 그대로 절명해버린 마족.
이제 여기에 살아남은 건 가쁜 숨을 내쉬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르 뿐이었다.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클라우스가 다가오자마자 갑자기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는 리르.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제가 다 정리해야 했는데… 제가 부족해서 클라우스님까지… 정말 죄송해요….”
아무래도 네 손으로 다 죽이고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말을 지키지 못 한 부분 때문에.
남은 둘을 클라우스가 직접 정리하는 수고를 끼치게 만들었기에.
해서 그가 혹 자신에게 그 끔찍한 처벌을 내릴까봐 잔뜩 겁을 집어 먹은 듯 했다.
“일어날 수 있냐.”
“네, 네. 걸을 수 있어요. 저 스스로 걸을 수 있어요.”
아무리 봐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이는데, 기어코 몸을 일으키는 리르였다.
혹여 여기서 걷지 못 한다면 정말 이대로 버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바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서는 몇발자국 떼어보지만 곧 주저앉고 만다.
부상도 부상에 워낙 많은 피를 쏟았기에 정신이 아찔해진 모양이었다.
“흐음.”
일부러 슬쩍 한숨을 흘려보니 화들짝 놀란 리르가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몸이 한계에 달해서인지 더는 일어나지 못 하고 바동거릴 뿐.
그러자 리르는 급한 대로 기어서라도 가겠다고 피를 토하듯 외쳤다.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까 제발 자신을 버리지만 말아달라고, 더 잘할 수있다고.
“리르.”
“제발, 제발요! 클라우스님! 아, 앞으로 더 잘 할게요! 잘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버리지 말아주세요! 저는, 저는…!”
“시끄러워. 입 다물어라, 리르.”
“아아….”
험악해진 클라우스의 목소리에 리르가 몸을 떨더니 고개를 숙이고 만다.
어떻게든 잘 해내려고 했는데 결국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였던 모양이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 했고 그가 살려준 제 목숨은 여기까지였다.
이제 남은 건 이전에 그가 내리려던 처분을 받는 것, 팔다리가 잘려서는 발가벗겨진 채로 험악한 자들이 몰려다니는 뒷골목에 버려지는 것….
“아?”
갑자기 제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감각에 리르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를흘린다.
제 멱살을 쥔 것도 아니고 목을 조른 것도 아니며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것도 아니다.
클라우스가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안아들고서는 아카데미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침 해도 떨어졌기에 큰 어려움 없이 아카데미 내부로 돌아온 클라우스는 바로 제 방으로 향했다.
그의 품에 안긴 리르는 이미 정신을 잃고서는 미약한 숨소리를 내고 있는 중.
바로 여인의 옷을 벗긴 후 미리 연금술로 만들어두었던 치료 포션을 상처 부위에 붓는다.
시간도 없고 또 재료가 시원찮지 않아서 단박에 모든 상처가 낫는 수준은 불가능하겠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심각한 부상을 그래도 이겨낼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트릴 수는 있었다.
치이익!!-
아물거리며 흉하게 쩍, 벌어졌던 자상이 조금씩 입을 다물어간다.
나머지는 이제 리르 스스로 이겨내면 되는 것이기에 클라우스는 뒤로 물러났다.
설마 이것마저 못 이겨낸다면 당연히 버려야 할 카드이겠지만, 강력하게 걸린 최면 때문인지 아니면 미약으로 인한 정신 개조 때문인지 리르는 얼마 가지 읺아서 번쩍! 눈을 떴다.
“여, 여기… 어디….”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그냥 내다버리려고 했다.”
“크, 클라우스님?!”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용을 쓰는 리르였지만 곧 남자의 손에 의해 제지당한다.
허튼 짓 말고 더 누워있으라는 뜻으로 클라우스가 그녀의 이마를 강하게 누른 것이었다.
리르는 클라우스가 원하는 대로 자리에 누워서는 사방을 살폈다.
그리고 곧 이곳이 아까 자신이 싸우던 곳도, 그리고 제 방도 아님을 깨달았다.
“죄, 죄송해요.”
“또 뭐가.”
“이렇게 더러운 꼴로 클라우스님의 방에 들어와서 더럽힌 것에….”
확실히 리르의 몰골은 말이 아니긴 했다.
피와 먼지가 엉겨 붙어 꽤나 처참한 광경, 머리까지 산발이 된 상태다.
그래도 봐줄 만 했던 예쁘장한 모습은 다 사라지고 웬 귀신이 누워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제가 부족해서 둘을 죽이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나마 하나는 네가 붙잡힌 마당에 억지로 잡은 것이지. 결국 네 순수한 실력으로만 잡은 건 단 하나인 거다, 리르. 내 말이 맞나?”
“…네. 맞아요. 클라우스님.”
“난 분명 아카데미로 오는 모든 불청객들을 네 선에서 정리하라고 했다. 그런데 정리를 하기는커녕 역으로 정리를 당할 뻔 했군.”
“할 말이 없습니다….”
남자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마족 여인.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숨거나 도망치고 싶은데, 또 막상 클라우스가 자신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돌보고 있다는 사실에 괜스레 몸이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순간에 즐기는 최후의 만찬 같다고 해야 하려나.
“잘 했다.”
“…네?”
“잘 했다고. 특히 널 붙잡으려던 마족년의 얼굴을 깨부술 때 아주 훌륭했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리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실망이다, 혹은 탈락이다, 더는 네가 쓸모가 없을 것 같다, 뭐 이런 말들을 예상했는데.
그의 입에서 갑작스레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 나오니 리르 입장에서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가 명령한 것을 반도 지키지 못 했는데.
귀찮은 일에 그가 직접 나서게 만드는 우를 범했는데.
꾸중이나 분노는커녕 도리어 잘 했다 말해주고 있으니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왜 그런 표정이냐. 왜. 내가 칭찬이라도 하면 안 되는 건가? 그냥 내쫓아줘? 팔다리 잘라서 네가 원하는 대로 어디 뒷골목에 던져주랴?”
“아, 아니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거의 경기를 일으키면서 그것만큼은 절대 싫다고 하는 리르.
그녀가 그 부분에이렇게나 극도의 두려움을 보이는 이유는 그녀와 여동생 모두가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우연하게 그림자의 일원이 되어서는 간신히 그 끔찍했던 삶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클라우스는 그런 악몽과도 같은 과거를, 무조건 잊고 싶은 일들을 다시금 끄집어내는 것으로 두려움과 복종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래? 그러면 다시 말해주마, 리르. 아주 잘 했다고. 다른 놈들 같았으면 그냥 포기하거나 아니면 아는 정보를 불면서 목숨이라도 구걸했을 텐데 그러지 않더군.”
“저는 클라우스님께 앞으로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이미 약속을….”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니라 깨라고 있는 것 같아서. 난 솔직히 남이 한 약속 잘 안 믿어. 당한 적도 많고, 그래서 내가 역으로 엿먹인 적도 많지.”
스륵-.
슬그머니 리르의 상의를 걷어 올려본다.
검붉은 색의 죽은피가 여기저기 엉겨 붙어 있었기에 미리 챙겨온 물수건으로 상처 부위 근처를 천천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윽! 흣!”
포션 덕분에 쩍 벌어졌던 자상이 많이 아물기는 했지만 여전히 피도 조금씩 배어나오고 무엇보다살이 길게 베였기에 거기에서 나오는 고통은 선명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클라우스가 상처 부위를 건드릴 때마다 리르는 자꾸만 신음을 흘리다가 종국에는 제 손가락을 물고서 버티기 시작했다.
“흡! 흐븝!”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돼. 참으라고 한 적은 없어.”
“으읏… 으븝….”
“네가 내 주군이자 내 여자인 율리아에게 해를 가하려고 했다는 점은 여전히 동일하다. 따라서 넌 계속해서 내게 험하게 굴려질 거야. 용서를 하기에는 아직 기분이 많이 더럽거든.”
“….”
“하지만 험하게 굴리는 것과, 그냥 죽으라고 내던지는 건 아예 다른 문제지. 난 네게 속죄할 기회를 주는 것이지 복수할 생각은 아니거든. 더 알차게 부려먹을 계획이 있을 뿐이지,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죽게 할 계획은 없다는 거다.”
톡톡-.
상처 부위의 더러운 것들을 전부 다 닦아내자 리르도 천천히 제 손을 입에서 떼어낸다.
그녀는 잠시 동안 클라우스를 바라보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감사해요….”
“하지만 방심하지는 마라. 네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하고 계속 헤맨다거나 배신이라도 한다면 그 때는 말이 달라지니까. 오늘은 네가 아주 훌륭한 모습을 보였기에 이렇게 대해주는 거야.”
“명심할게요. 그리고… 속죄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노력할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주 좋은 대답이야. 그 정도면 오늘은 합격이라고 할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한 후 클라우스는 옆에 앉아서는 빤히 리르를 쳐다보았다.
더 할 말이 남은 것으로 보이는데, 왜 말을 하지 않고 있냐는 무언의 질문.
한편 남자가 제 속마음을 읽은 것을 확인한 리르는 어찌 해야 할까 갈팡질팡했다.
꾸중이 아니라 칭찬을 받아서,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는 말까지 들어서.
괜스레 자신도 모르게 기대를 품었고 또 자꾸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해진다.
이번 일을 잘 한다면 분명 상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몸 상태가 정상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일 처리를 완벽하게 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욕심이 나니 미칠 것 같은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저 남자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으읏?!”
그러다가 리르는 갑자기 밑에서 찌릿! 하고 올라오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잔뜩 젖어있던 팬티가 부드럽게 안으로 밀려들어가고 민감하던 여체가 더욱 농밀해진다.
“일을 잘 하면, 상을 주겠다고 했었지?”
“네, 네. 분명 상… 주신다고….”
“너 상처 워낙 커서 잘못 움직이면 다시 벌어진다. 격렬한 건 아직 안 돼.”
“앗, 아아….”
“대신에, 기분 좋게 해주는 건 해줄 수 있다. 상은 나중에 받고 일단 이것부터 해줄까 하는데. 어때, 해주랴? 리르?”
당연한 걸 묻고 있다, 지금도 그의손이 닿았다고 벌써부터 밀액이 줄줄 흐르고 있는데.
이렇게 부드럽게 쓸어주기만 해도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쾌락이 진해지는데.
리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하지 말고 얼른 더 강하게 만져달라는 뜻으로.
아니, 만지는 걸 넘어서서 아예 그 안을 괴롭혀달라는 뜻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