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14장 - 주말이 더 바쁨
샤샥! 샥!!-
해가 저물고 막 옅은 어둠이 천천히 드리워지는 때에 몇몇 인영들이 빠르게 몸을 날려서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풍겨져 나오는 은밀함이 보통이 아닌 것이, 꽤나 대단한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이동하던 자들은 저 멀리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건물을 확인하고서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바로 자리에 멈춰 섰다.
“저기인가?”
“그렇습니다. 대륙 아카데미라 불리는 곳입니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크고 거대하군.”
“당연한 말을 하네. 저곳에 얼마나 많은 자들이 머물고 있는지 모르는 거야?”
“괜한 시비 걸지 마라. 상당히 피곤하니까.”
총 네 명으로 이루어진 한 무리의 남녀들.
서로의 생김새가 제각각이긴 했으나 눈동자 색만큼은 마족들 특유의 색을 빛내고 있었다.
마족 측 생도라고 하기에는 그 은밀함이 너무 과하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마족 측의 감시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리르는 어디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
“이 근처입니다. 마중까지 나온다고 한 걸로 기억하고 있지요.”
“늦을 만한 여자는 아닌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설마 배신했을 리는 없겠지.”
“설마야. 그 여자 동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면 몰라?”
“또 모르는 일이지. 저 혼자 살겠다고 동생을 버릴 수도.”
“등신 새끼. 다 너처럼 인생에 하자라도 있는 줄 아나봐?”
여인의 빈정거림에 남성의 이마에 빠직, 하고 힘줄이 돋아났다.
그는 다시 한 번 말해보라는 느낌으로 여인에게 다가갔다.
동료애 따위는 진작 개한테나 줘버린 듯 품에 가지고 있던 검까지 빼어든 상태로 말이다.
남자의 그런 모습에도 여인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한 판 하게? 좋아. 오늘 누가 뒈지나 한 번 해보자고.’ 라고 말하면서 낄낄거리더니 역시나 단검 두 자루를 꺼내든 것이다.
당장이라도 부딪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다행히도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험악한 표정을 짓고서는 둘을 제지했다.
“거기까지 해라. 주군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임무를 부여했는지 모르는 거냐?”
“그 중요한 임무 저 머저리가 망칠까봐 내가 이렇게걱정하는 거 아닐까?”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거리는 계집년보다야 낫겠지.”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하네. 어째, 이번 기회에 내가 여기까지 찢어줘?”
“그만하라고 했다.”
제 기세를 완벽하게 드러내자 곧 으스스한 살기가 두 남녀를 감싼다.
경고를 애써 무시한 채 누구 하나 죽기 전까지 싸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당장 저 남자에게, 그리고 자신들을 이곳까지 보낸 그 주군에게 아마 반쯤 죽기 직전까지 몰매를 당할 것이 확실했다.
결국 남녀는 거의 동시에 각자의 무기를 거두었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걸 정도로 싸우고 싶어 환장한 그런 원수 사이까지는 아니다.
어디 한 번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 식의 전투는 살기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자신들의 행동 강령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서로에 대한 적의까지 다 거둔 건 절대 아니었기에 싸늘한 분위기는 계속되었지만.
“저 둘은 정말 지겹게도 싸우는군요. 여기까지 오면서 거의 매 시간 단위로 저러는데 지치지도 않는 게 참 신기합니다.”
일행들의 가장 선두에 서서 안내를 하던 남성이 그렇게 입을 열었다.
에둘러서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참 더럽게도 싸워댄다, 라는 게 결론이었다.
그 말에 상당히 섬뜩한 기세로 두 남녀를 말렸던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곤 답했다.
“말려도 들어먹지를 않고 싸우니 뭐 별 수 있나. 어쩔 수 없는일이지. 둘이 성격도 정반대에 좋고 싫은 것도 반대이니 친해질 수가 없는 거 당연한 일이야.”
“저러다가 주군의 명령에 반하는 짓이라도 할까 걱정입니다.”
“우리들은 그림자야. 실패하면 자연스레 떨려나서는 햇빛에 녹아버리는 놈들이지. 저것들도 그걸 알기에 저렇게 싸워대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정신을 차릴 거다. 만에 하나 일을 실패한다면 그 후 어떤 비극이 펼쳐질지는 저 녀석들이 잘 알고 있을 거다.”
자신들의 주군이라는 자는 일단 실패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다.
어떤 이는 억울하다고,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서 성공할 수 없었다고 외칠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군이 용서를 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현 마왕의 숙부이자 마왕보다도 더 큰 권력을 쥔 이가 바로 그다.
제 손 안에 수도 없이 던질 수 있는 비수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날이 좀 상했다거나 균형이 맞지 않는다면 그걸 가서 수리하고, 날을 갈고, 그러면서 시간을 허비하겠는가?
그냥 그 상한 단검 따위 바로 내던지고 다른 것을 쓰면 그만일 뿐이다.
그림자가 바로 그 단검이고, 마왕의 숙부이자 자신들의 주군이 단검을 쥔 이다.
그가 던지면 그가 원하는 곳에 날아가서는 박히면 된다, 오직 그것만을 바랄 뿐이다.
박히지 못 했다면 실패한 것이고 실패했다면 다시는 회수될 수도 없다.
그게 바로 그림자들의 숙명이었다.
‘다행이라면 성공한 자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주니까. 무조건 성공해야지.’
이번에 받은 임무는 먼저 아카데미에 숨어들었던 그림자들과 접촉하는 것.
그리고 정보들을 받아서 다시 한 번 마왕을 망가트릴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혹 그게 불가능하다면 2순위로 클라우스를 노리라는 게 다른 명령이기도 했는데.
‘남부의 악마를 우리보고 잡으라니. 차라리 마왕을 잡고 말지.’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에 대해서는 그도 대충은 알고 있다.
전대 마왕의 외동딸로 태어나 운 좋게 그 자리를 물려받기는 했지만 실력도 능력도 아무 것도 없는, 그저 남자를 홀리기에 최적화된 외모만 가지고 있다는 것 말이다.
클라우스라는 인간도 아마 그 몸뚱이에 유혹되어서는 넘어갔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악마 같은 인간이 설마 마족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겠는가?
“이 미친년이 정말 죽고 싶나?”
“죽여 보라고 몇 번을 말해. 이 겁쟁이 새끼가. 야, 너 남자 떼지 그러냐?”
또 시작인 건가. 말린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자는 후우, 한숨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돌리고는 적당히 하라고 다시 한 번 말하려고 했다.
갑작스레 뭔가가 이쪽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말다툼을 하던 남자의 목을 그대로 날려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푸확!!-
정확하고 깨끗하게 잘려나간 남자의 머리.
제 몸에서 잘려서는 데굴데굴 굴러 방금 전까지 말다툼을 하던 여인의 발 앞에 툭, 하고 부딪친다.
미처 예상치 못 한 기습이었지만 남은 세 남녀는 바로 제 동료를 죽인 자의 위치를 알아냈다.
방금 전 기습은 완벽했다고는 하지만 이제부터는 기습이라고 할 수없을 것이었다.
“뒤!”
여인의 말에 무리의 리더를 맡고 있던 남자는 바로 몸을 돌려서는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챙강! 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비로소 이쪽을 기습한 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르?”
“….”
“지금 뭐하는 짓이냐. 네가 왜… 설마 주군을 배신한 것이냐? 그 결말이 어떨지 뻔히 알면서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설명할 시간 없어. 너희는 여기서 다 죽고, 나는 여기서 살아 돌아간다.”
“미친년. 누가 들으면 네가 그림자들 사이에서 꽤나 강한 실력자라고 알 것 같군.”
“….”
“실상은 전투 부분에서 간신히 합격을 받은 수준 아니었나? 그나마 기습이 네 유일한 장점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의미조차 전부 사라졌군.”
우웅!-
리르는 자신의 등을 노리고 날아드는 일격을 느끼고는 다급히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제빠른 몸놀림 덕분에 등에 커다란 자상이 남는 건 면했지만 어깨가 살짝 베이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시발 년. 설마 했는데 정말 뒤통수를 때리네.”
리르의 뒤를 노린 여자는 남은 한쪽 단검을 뽑아들고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비록 사이는 더럽다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목이 잘린 남자와는 동료 사이였다.
그리고 저 리르도 그와 자신의 동료인 그림자의 일원이기도 했고 말이다.
동료의 목숨을 저리도 가차 없이 거두는 모습에서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죽이진 말고 생포해라. 무슨 일이 일었는지 알아내야 한다.”
“지랄? 배신까지 한 년이 뭐 좋다고 술술 불겠어. 죽을 때까지 말 안 할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입을 연다. 그러니까 생포해. 팔다리를 다 쳐내도 좋으니까.”
남자의 명령에 여자는 에휴, 하고 한숨을 내뱉고는 거리를 벌렸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남자는 이미 리르의 뒤를 잡고서는 바로 공격할 틈만 노리고 있었다.
리르는 세 남녀의 사이에 껴서는 주변을 슬쩍 살폈다.
기습으로 둘은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쉽게도 하나가 한계였다.
그래도 정확하게 목을 잘라냈으니 완전히 실패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묘하게 힘이나 속도가 더 나아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부웅! 타탓!!-
리르의 눈동자에서 뭔가 다른 생각이 감돌고 있는 걸 느낀 것일까.
세 남녀가 거의 동시에 리르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서슬 퍼런 병장기의 돌진에 리르는 일단 한쪽부터 돌파하기로 했다.
다 막아낼 수 없고 다 피할 수도 없다면 최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았다.
챙강! 휙! 피슉!!-
여자의 단검을 쳐내고 리더로 보이던 남자의 공격은 피해내고.
마지막으로 다른 남자의 공격은 최대한 옅은 선에서 허용한다.
치명상은 어찌 피했다고 볼 수 있지만, 결국 옆구리에 또 한 번 자상을 허용하고 마는 리르.
“몰아붙여!”
상대가 부상을 입은 걸 확인하자마자 무리의 리더는 재차 공격을 명령했다.
그에 맞춰 여인과 남자는 연수 합격으로 리르를 끊임없이 옥죄면서 그녀가 반격은커녕 간신히 방어에만 급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을 자신들의 리더에게 내어주기 위해 틈을 만들었고 그 리더는 제 동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퍼석!-
“크흣!”
마지막 순간 간신히 몸을틀어 내장이 상하는 건 피했다.
허나 그게 리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결국 그녀의 반대쪽 옆구리에 또 한 번 커다란 자상이 남으면서 피가 쏟아지고 말았다.
풀썩!!-
양 옆구리에 칼을 맞은 터라 리르는 더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피를 꽤나 흘렸고 그런 상황에서 더 거칠게 움직였으니 뭘 더 어찌 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흠.”
“와, 미친년. 이 정도였어? 얘 근접 전투는 젬병이었잖아.”
“나도 놀랐다. 1:1 대결도 버거워하던 여자가 갑자기 일대 다수 싸움을 걸고, 거기에서 이렇게 버틸 줄은 또 예상하지 못 했어.”
남자의 말에 여자는 ‘설마 여태까지 우리를 속인 건가? 와, 소름 돋네.’ 라고 중얼거리면서 리르가 들고 있던 검을 발로 차서 멀리 떨어트렸다.
이미 피를 많이 흘려서 더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 테지만 그럼에도 방심하지 않는 모습.
리르의 뒤로 돌아간 그녀가 막 상대방의 손목을 뒤로 묶어서는 바닥에 넘어트리는 순간이었다.
“…야! 조심!!”
“어?”
손목을 묶기 위해서 여인이 몸을 숙이는 바로 그 순간을 노렸던 것일까.
리르는 냅다 머리를 뒤로 날려서는 상대의 얼굴을 그대로 박살냈다.
끄흡! 하는 비명과 함께 여인이 뒤로 쓰러지자 리르는 아직 자유로운 한쪽 팔로 제 허벅지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뽑아서는 거칠게 여인의 목을 베어냈다.
촤학!!-
“아!”
“미친년!”
리르와는 모두가 대충 알고 있는 사이다.
해서 알 수 있다, 저 여자가 저 정도로 악독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을.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상대방을 하나라도 더 죽이겠다는 모습은 그들 입장에서 정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남자는 급히 몸을 날려서는 리르의 얼굴을 그대로 걷어찼다.
곧 입과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고, 그러는 사이 다른 한 남자가 급히 제 동료를 살폈지만 이미 목의 반이 베인 상황이었다.
“…틀렸습니다.”
“이런 젠장!”
욕설을 퍼부으면서 남자는 리르를 돌아보았다.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이런 말을 속삭이고 있는 중이었다.
“앞으로… 둘…. 둘만 잡으면… 되는 거야….”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보기에는 눈이 완전히 맛이 가있다.
남자는 오싹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검을 고쳐잡았다.
방금 전까지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게 바로 자신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저 미쳐도 단단히 미친 여자를 얼른 죽여 없애고 싶다는 마음만 강렬해질 뿐이었다.
바스락-.
숨통을 끊기 위해 두 남자가 막 리르에게 다가가는 순간 뒤에서 조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불길한 마음이 들어 그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대체 언제부터 와서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것인지 한 남자가 아주 재미난 표정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아, 난 신경 쓰지 말고 할 거 해. 괜찮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