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13장 -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과거 대륙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그를 경계하던 귀족들은 클라우스가 적에게서획득한 금과 은을 사사로이 취득했다는 소문을 빌미삼아 정치적 공세를 퍼부은 적이 있었다.
몰론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금은이 아무리 잔뜩 있다고 해도 쌀 한 톨보다 귀중하지는 않다.
거기에 증거라 할 수 있는 건 정황 증거가 전부일 뿐, 클라우스가 그 부분에 손을 댔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증명을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 문제는 그냥 군자금으로 쓰였다, 뭐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묻히게 되었다.
‘그 일들이 전부 사실임을 알았다면 귀족 놈들이 아주 땅을 치고 아쉬워하겠지.’
7년 동안 설마 제 손 안에 재물이 한 톨이라도 들어오지 않았을까.
도망간 귀족놈들 성에서 군자금 목적으로 압수한 것도 있고 미처 챙기지 못 한 것도 있으며 역으로 마족들을 공격하고 그들이 약탈했던 왕국 측 자산들도 꽤 많았다.
클라우스는 당연히 그것들을 모조리 꿀꺽했다.
물론 전부 다 먹어치웠다는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선에서, 되도록 적당하게.
많이 먹다가 탈나면 그보다 괴롭고 억울한 일은 없다는 걸 아주 오래 전 회차를 통해 알고 있는 그였다.
그 후 어떤 때에는 귀족들에게 돌려주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병사들과 왕국민들을 위로한다면서 잔치 비용으로 쓰기도 했지만.
항상 전부를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꾸준히 꿍쳐두었다.
그렇다면 그 자산들을 어찌 했느냐.
은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땅에 파묻은 것도 아니라면 과연 어떻게 보관했냐고?
‘방법은 하나뿐이지. 돈으로 사람을 사는 거. 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돈으로 사람 목줄을 쥐는 거라고 해야 하려나.’
클라우스는 전쟁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은 이들에게 ‘지원’ 목적으로 자금을 풀었다.
중소 규모의 상단부터 시작해서 왕국의 틀을 벗어나 요정과 수인사회에까지 몰래 침투했다.
그들도 처음에는 그냥 천운이다! 하고 받은 돈들이, 그 끝에 가보면 클라우스에게서 시작되어 전해진 경우가 무척이나 많았다.
좋은 의미로 보면 지원이고 또 투자이겠지만, 반대로 보자면 그게 명줄이 되었다.
만약 클라우스가 갑자기 대륙 전쟁의 영웅에서 반역자이니 배신자이니 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에게서 돈을 받아 간신히 부활한 자신들은 과연 제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게 될까.
아직까지는 클라우스가 그들에게 따로 빚을 독촉하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았다.
해서 왕국의 귀족들이 그를 압박할 때도 그들은 침묵을 지키며 사태를 관망했다.
하지만 그 클라우스가 눈치를 준다면, 내가 망하면 당신들도 다 끌고서 지옥으로 들어가 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면 좋든 싫든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걱정은 말고 율리아, 당신은 당장 본인 걱정부터 해야죠.”
“읏….”
“바로 어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나요? 베드르 영지가 파인 영지 측에 영지전을 선포했다고.”
동부에서의 일은 그야말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반 마왕파는 중립파가 흔들리는 바로 이 시점을 최고의 적기로 판단.
흩어지고 깨지는 중립파가 마왕파로 넘어가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먹어치우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건수야 저들이 만든 것이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고 망설일 부분도 없다.
반 마왕파의 힘을 보여준다면 괜히 마왕파에 합류해봤자 후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느낌만 강해질 것이고 자신들에게 합류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
대륙 전쟁 이후 복구를 위해 몇 년 동안 조용하던 동부는 갑작스레 흔들리게 되었다.
아마 지금도 몇몇 중립파는 마왕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하고서 마왕성에 찾아올 테고.
반대로 몇몇 중립파는 율리아의 숙부를 찾아가 ‘마왕 전하!’ 라고 열심히 빨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 왜 그렇게 관심을 쓰고 있는 거죠?”
“잡아야 하니까요.”
“네?”
“건수요. 상대방을 귀찮게 만들어서 이성을 놓게 만들 만한 건수.”
율리아는 잠깐 두 눈을 깜빡이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동부 내에서 귀족 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마왕으로서 분명 불쾌한 일이다.
하지만 귀족과 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 특히 영지끼리의 분쟁은 정말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마왕도 관여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영지전이라는 것도 막 대학살 수준이 아니라 어떤 한 영지의 우세가 증명되면 그 즉시 다른 쪽에서 항복 요청을 하고 그에 따라서 배상금이든 아니면 광산이나 땅을 내놓게 된다.
최악의 경우 영지를 통째로 내어주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클라우스. 영지전에서 건수를 잡으라뇨?”
“귀족들에게 각각의 영지를 하사한 것은 마왕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 그 땅은 자연스레 다시 왕에게로 돌아가게 되고요.”
“그렇긴 한데 원래 영지전을 해서 승자는 패자의 것을….”
“그게 맞지만, 그리고 침묵하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결국 마왕한테 허락을 구하고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율리아는 클라우스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반 마왕파의 힘만 더 커지고, 중립파 중 더 많은 귀족들이 흡수될 것이다.
자신이 아는 제 숙부는 결코 쉽사리 움직이는 그런 어설픈 부류가 아니다.
아마 최고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자신이 생각하는 적기가 되기 전까지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웅크림이 율리아 입장에서는 너무나 위협적이어서 더는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까지.
마왕이 칼을 빼어들게 만들어 자신은 그저 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제 조카에게 눈물을 머금고 대항하는 숙부라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는 순간까지.
그 빌어먹을 남자는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이었다.
“그들이 중립 귀족만이 아니라 나의 신하들과, 나에게까지 칼을 들이밀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군요. 클라우스.”
“불리한 상황에서 명분까지 빼앗기면 되돌릴 수 없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명분 하나만 가져와도 꽤나 쓸 만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 상황이 크게 불리한 것도 아닌데 명분까지 쥘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죠.”
그 말에 율리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숙부가 먼저 자신을 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불리한 건 항상 자신이라 초조함을 느끼는 것도 또한 자신일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반대로 그가 자신에게 초조함을 느끼면서 일어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지고 고민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율리아. 방학이 꽤나 바빠질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영지전이 끝난 후 내게 반하는 자들에게 영지에 대해서 트집을 잡고서 그걸 물고 질질 늘어지는 동안 시간은 흐를 테니까. 정말 당신 말대로 기말시험이 끝날 때면 더는 버티지 못 한 자들이 내게 칼을 들이밀 시간으로 충분하겠어요.”
입가를 가리고 기대가 된다는 듯 쿡쿡, 웃음을 흘리는 율리아.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면서도 또 묘하게 서늘한 느낌을 준다.
클라우스의 계략에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감정과, 감히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려고 하는 자들에게 마왕의 철퇴를 내려줄 생각에 무척이 기대가 된다는 부분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전에는 하도 시달리고 또 시달려서 제 능력을 조금도 피우지 못 했던 여인이었지만.
창조주를 만나고서 약속된 모든 것을 받아 순식간에 거대한 괴물로 자라난 율리아다.
여태까지 자신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던 마왕의 기세가, 조금씩 드러나는 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우스. 이제 주말이잖아요?”
“그렇죠.”
“나타샤도 없고, 세실리도 없고, 카엘라도 없고,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그 이상한 메이드도 없네요.”
“플랑슈입니다. 그 메이드 이름.”
“관심 없어요. 내가 기억하면기억하는 거고 아니면 그냥 메이드인 거예요. 내가 혹 당신의 메이드 이름까지 일일이 다 기억해야 한다는 건 아니겠죠?”
여전히 웃고 있는 낯이지만, 눈매까지 웃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서늘하다 못 해 섬뜩할 정도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그 메이드가 클라우스 옆에 찰싹 붙어있는 것에 대해서 불만 사항이 무척 많은 모양이다.
“카엘라는 그렇다고 쳐요. 자그마치 당신을 10년 넘게 따른 부하니까. 나라고 해서 그 정도를 이해하지 못 할 정도로 속 좁은 마왕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 메이드는 다르잖아요?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여인인데, 자꾸만 당신이 묘하게 챙기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크흠.”
마음 같아서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이라도 하고 싶은데, 차마 그리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아니라고 잡아떼어봤자 창조주조차 흔들리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이 마왕을 더욱 자극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 메이드만 없었다면 시험 전에 한 번 쳐들어왔을 텐데.”
“소문이 나니까 이제는 거리낌이 없군요.”
“그렇죠? 이왕 이리 된 거, 당신은 내 거라고 다 소문을 내고 싶을 정도에요. 그래서 나나 당신에게 쏟아지는 눈길 다 치우고 싶고, 또 내 남자를 욕하는 놈들 얼굴을 다 기억했다가 나중에 복수를 조금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참고로 율리아는 제 적의 얼굴 가죽을 벗겨서 진흙 위에 감아둔 전적이 있다.
그걸 매일 아침 보면서 계속 자신의 날을 세우고 또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나 뭐라나.
쓸개를 핥으면서 원수를 되새긴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얼굴 가죽을 벗겨서 매일 아침에 보며 적의를 불태운다는 것은 이곳에서 처음 보는 클라우스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쓸개를 핥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더 공포스러웠다.
“해줘요.”
그 공포의 마왕님이, 또 다시 자신 위에 올라탄다.
당당하게 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오로지 나만의 것이라고 선포한 남자를 껴안는다.
“귀찮은 메이드까지. 아, 미안. 플랑슈라고 했나요. 아무튼 그녀까지 쫓아냈잖아요? 이제 우리 둘 밖에 없어. 내일은 주말, 당신도 쉬고 나도 쉬는 날. 그러니까 오늘 밤새 즐긴다고 해서 내일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야.”
여인의 사근거리는 목소리, 감미롭게 속삭이는 그 말들은 거의 독약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치명적이고 벗어날 수 없고, 무엇보다 심장이 쿵쾅거리다가 어느 순간 굳어버리는 느낌이다.
세상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답고 치명적이면서 제 매력을 잘 알고 또 이용할 줄 아는 여인이 이렇게 달라붙으니 세상이 확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신 말대로 조만간 많이 바빠지겠지. 여태까지의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수준만큼. 그러니까 더더욱 이래야 하지 않겠어?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도망가지 마.”
“나한테만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 조금 억울한데.”
“그런가? 그러면 이렇게 해, 클라우스. 날 이렇게 만든 당신 책임 반에. 그런 당신에게 넘어가서는 이렇게 졸라대는 마왕의 책임 반. 서로 같으니까 서로에게 갚아주자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러면 되잖아?”
사르륵-.
분명 아주 멀쩡하게 생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그리 했는데.
또 어느 틈에 단추를 죄다 풀어낸 것인지 바로 앞에 마왕의 백옥 같은 피부가 드러난다.
동시에 감히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한 여인의 향이 코로 확 끼쳐든다.
“진짜 율리아 당신, 너무한 거 알고 있지?”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불평이었다.
분명 자신은 이 마왕의 창조주인데, 이 세계를 몇 십번이나 반복한 고인물인데.
어떻게 매번 보는 이 여인 앞에서 이리도 꼼짝할 수가 없단 말인가.
“어쩔 수 없어. 내가 당신을 가지고 싶으니까. 못 벗어나, 클라우스.”
마왕의 붉은 두 눈에서 탐욕의 빛이 번들거렸다.
“영원토록.”
불타는 금요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