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13장 -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플랑슈가 타다 준 커피는,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최고였다.
클라우스가 선호하는 물의 양, 커피의 향과 맛의 진함, 그리고 손잡이가 있는 잔을 선호한다는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있다.
커피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녀가 타다주는 커피는 그저 그런 사이에서도 유독 괜찮게 느껴지는 뭔가가 있었다.
‘정성인지 사랑인지 들어가면 맛이 더 좋아진다는 말이 진짜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야.’
잔에 담겨 있던 커피를 아주 깔끔히 비워낸다.
몸에 커피가 좀 들어가자 이제야 혈관에 피가 도는 느낌이 든다.
지금 이 순간을 굳이 말하자면 7년 전쟁에서 한 번의 회전을 마치고 막사에 돌아온 느낌.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으로 가장 피로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간도 늦었고, 내일 중간시험도 있고, 무엇보다 오늘 더는 귀여워해줄 여인도 없으니.
클라우스는 오늘은 좀 일찍 잘 생각을 하고서는 몸을 씻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뒤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
“….”
“…앗.”
“…뭐하냐?”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리는 클라우스,
다름이 아니라 클라우스가 다 비운 커피 잔을 들고서 컵의 주둥이 부분을 열심히 핥고 있는 플랑슈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면 그냥 하나 준비해서 마시면 되는 것이고.
설거지하기 귀찮아서 혀로 닦는 거라면 그래 뭐, 혼나고 말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둘 모두가 이유가 아닌 듯 했다.
유독 클라우스의 입이 닿았던 부분을 미친 듯이 핥고 있던 플랑슈였다.
“…저기… 음…. 그게 말입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라. 뭐하는 거냐고.”
“클라우스님을 더 잘 모시기 위한 준비 중이었습니다.”
“…나를 잘 모시기 위한 준비?”
“그렇습니다.”
본인을 잘 모시는 것과 컵 주둥이를 미친 듯이 핥는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저 이유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클라우스는 팔짱을 끼고는 어디 한 번 더 말해보라는 식으로 플랑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플랑슈는 그 창조주에 의해 ‘지나가던 메이드’ 로 창조된 캐릭터.
리르나 세실리 같이 쉽사리 제 속내를 드러낼 여인이 결코 아니었다.
“메이드의 비밀 업무입니다.”
“…메이드의 비밀 업무?”
“그렇습니다.”
“별 게 다 비밀 업무군. 컵을 핥는 게 비밀 업무라니.”
“클라우스님은 모르시는 메이드만의 심오한 세계가 있습니다.”
딱 봐도 새빨간 거짓말인데 그걸 또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한 표정으로 하고 있다.
역시 숙련된 메이드로서 준비가 아주 잘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아직 플랑슈와 회차를 진행한지는 많이 되지가 않았고 지금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런 행동을 메이드의 비밀 업무라고 물 흐르듯 얼버무리는 플랑슈의 모습이 클라우스에게는 무척 재미있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섹스하는 와중에도 앞으로 무슨 일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고이다 못 해 썩어버린 자신이다.
그런 와중에 플랑슈라는 새로운 물은 고인물로서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
자칫 잘못하면 회차가 꼬일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을 안고 가야하겠지만 캐릭터 자체가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적이기도 하고 감당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위치에서도 자신을 뛰어넘지 않으니 어떻게 대한다고 해서 외부에서 압박이 들어올 일도 전혀 없으니 최고였다.
“…그래. 그 비밀 업무 열심히 해라. 난 좀 씻을 테니까.”
“온수는 미리 받아두었습니다.”
그 사이에 물은 또 언제 받아둔 건데? 클라우스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지나가던’ 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메이드다.
욕실로 걸음을 옮긴 후 입고 있던 겉옷을 벗고서 옆의 바구니 안에 얌전히 넣어둔다.
이전에는 그냥 속옷까지 벗고서 아무렇게나 휙휙 내던진 것 같은데, 플랑슈가 들어오고 난 후 묘하게 그런 부분에 눈이 가서 자신도 모르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만에 하나 빈틈을 보였다가는 율리아한테 어떤 시달림을 당할지 모르니까 말이다.
한편 클라우스가 욕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플랑슈.
그 와중에도 열심히 커피 잔을 핥고 있다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멈춰 선다.
그리고는 퍽 아쉽다는 듯 잔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결국 아쉬운 기운이 가득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더는 클라우스님의 맛도, 향기도 느껴지지 않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덜 열심히 핥을 걸 그랬나 봐요. 바보 같은…. 여전히 저는 부족한 메이드군요.”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플랑슈.
그러다가 욕실 근처로 다가간 그녀는 클라우스가 벗어둔 겉옷들을 확인했다.
자신이 직접 골라준 옷을 입고 나갔다 왔다는 걸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린다.
무척이나 기분 좋은 느낌이 천천히 퍼져나가던 찰나.
‘…무슨 냄새죠, 이건?’
가볍게 코를 킁킁거리던 메이드는 클라우스의 겉옷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흔적은 남지 않았으나 진하게 감돌고 있는 이 냄새는, 분명 여인들이 흘리는 밀액이라고 플랑슈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잠시 두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흐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알겠어요! 라고 가볍게 손뼉을 치고서는 입을 열었다.
“세실리 레블랑, 그 분이군요. 그 분의 냄새가 틀림없어. 그 때 방에 들어왔을 때도 이런 비슷한 향이 나긴 했죠. 이럴 수가. 볼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그랬군요, 그랬어, 라고 연신 그 말을 반복하던 플랑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이야 당연히 깨끗하게 빨아서 잘 말리고 다시 입으면 냄새가 지워진다고 하지만.
클라우스의 몸에서 또 그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클라우스가 무슨 일을 하고 오든 상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의 메이드로서 체통을 지켜주고 혹 그가 알아차리지 못 한 부분이 있으면 나서서 처리해줘야 하는 게 옳다고.
플랑슈는 그렇게 생각하더니 두 주먹을 강하게 쥔다.
똑똑똑-.
“클라우스님.”
“…뭐야.”
그리고 플랑슈는, 다른 여인들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을 그대로 행했다.
“들어가겠습니다.”
“뭐? 야, 잠깐만….”
클라우스가 미처 제지를 하기도 전에 덜컥 안으로 들어온 은발의 메이드.
대충 몸을 한 번 씻어내고 이제 막 탕에 들어앉은 듯한 클라우스는 꽤나 당황한 모습으로 기대어 앉아서는 플랑슈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저런 여자임은 알고 있지만, 그리고 가끔 가다가 저렇게 무작정 욕실 안으로 들어온 적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나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이렇게 아카데미를 벗어나지도 않았고, 메이드로 둔 지 한달은 고사하고 일주일도 안 된 시점에서 이러는 건 정말 처음 일어난 것이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허락도 안 했는데 멋대로 들어오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업무는 메이드로서 당연한 것인지라 당연히 허락하실 줄 알고 안으로 부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놈의 메이드 업무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 알차게 써먹는다.
저런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라서 이제는 일일이 놀라기도 피곤하다.
그리고 저런 모습과는 또 별개로 리르나 세실리 같이 무리한 걸 요구하지는 않는다.
플랑슈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클라우스를 위한 것이지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게 아니다.
지금도 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마도 다른 여인의 체취를 달고 온 클라우스의 몸을 자신이 닦아야만 하겠다고 들어온 것이리라.
“감히 여쭙겠습니다. 혹 다른 여인을 만나고 오신 겁니까?”
“이제는 내 뒷조사까지 하나? 메이드로서 실격인데.”
“아닙니다. 다만 제 예측일 뿐입니다. 혹 제가 오해한 것이라면 무례를 범한 것에 대해서….”
“여러 번 안고 왔다.”
“…안고 오셨다고요.”
“그래.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겠지? ‘메이드’ 로서 말이야.”
그러자 플랑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조금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다 지우지 못 하는 은발의 메이드.
클라우스 이외의 다른 이들은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인드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플랑슈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여인의 냄새가 아직도 풍기는데 그 상태에서 다른 손님들을 맞이한다면 그 분들이 굉장히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니까 완전히 깨끗하게 지워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해서 제가 클라우스님의 몸을 손수 닦아드리고자 이렇게 들어왔습니다.”
“내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몸 닦는 건 나 혼자 할 수 있다. 설마 팔라티나트 가문에서 그런 일도 시켰었나? 자신들의 몸을 닦으라고?”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나한테도 할 필요 없어. 메이드의 업무라고 말하지만 그 업무를 결국허락하는 건 내 결정이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두마, 플랑슈.”
“…명이시라면 당연히 따르겠습니다.”
상당히 고요한 얼굴 같지만 실은 무척이나 실망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 찰나의 틈에 클라우스의 품을 도둑질한 세실리를 불편하게 여길 테고.
율리아가 마왕이라는 자리로 인해, 자신의 자존심으로 인해 집착을 한다면.
플랑슈는 집착보다는 질투라고 하는 것이 알맞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투의 대상은 항상 플랑슈에 의해 소심하긴 하지만 분명한 ‘복수’를 당했다.
예로 들어서 율리아 같은 경우에는 쓰디 쓴 커피를 대접한다던가.
카엘라에게는 일부러 웰던으로 구워낸 스테이크를 내밀어서 질긴 고기를 먹게 한다던가.
아무튼 화를 내기는 너무 작은 일이라 그냥 넘어가야만 하는데 상대방의 신경을 무진장 쓰게 만드는 행동을 잘 하는 메이드였다.
‘세실리가 그래도 오늘 하루 고생 했는데 이 앙큼한 메이드의 복수극까지 맞이하면 조금은 불쌍하잖아. 에휴… 오늘은 그냥 플랑슈가 하자는 대로 해야겠군.’
여태까지의 자신과 비교해서 조금은 더 다른 이들을 챙겨주자.
잃어버렸던 것을 조금이나마 되찾아보자, 라는 생각으로 다시 시작한 이번 회차다.
해서 클라우스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등에 땀이 좀 많이 흘렀더군.”
“…그러십니까?”
“헌데 손이 잘 닿지 않아서 말이야. 누가 좀 대신 닦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여기 메이드 플랑슈가 있습니다. 제가 적임자라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이 욕탕 안에 저리 대놓고 들어올 수 있는 이가 자신 밖에 없을 텐데.
그걸 또 아주 장엄하게도 표현하시는 지나가던 메이드였다.
속으로 킥킥 웃음을 흘린 클라우스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욕탕 안에서 온수로 조금 더 몸을 지졌다.
그러는 동안 플랑슈는 그 옆에 가만히 서서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플랑슈.”
“네, 클라우스님.”
“욕탕 안이라면 물이 좀 튈 텐데. 그렇게 다 입고 있어도 괜찮나?”
“옷은 소속감과 의무감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메이드로서 그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서 어느 곳에서라도 항상….”
“젖으면 골치 아프니 지금이라도 벗지 그래.”
“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결국 싫다는 말은 또 절대 안 한다.
“벗어라, 플랑슈.”
“알겠습니다.”
정말 여러모로 앙큼하고, 살짝은 어디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나마 저런 캐릭터가 오직 클라우스 자신에게 집착하는 캐릭터여서 다행이다.
만에 하나 저런 메이드가 웬 이상한 귀족한테 꽂혔다면….
‘염병. 상상하기도 끔찍하군.’
고개를 내저은 클라우스는 천천히 욕탕 안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플랑슈는 옷을 벗는다고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플랑슈.”
“네, 클라우스님.”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명령에 따라 옷을 벗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건 겉옷 정도만 벗으라는 거였어. 홀딱 다 벗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아.”
도대체 언제 다 벗은 것인지.
이미 상체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고, 팬티도 반쯤 벗어서는 허벅지에 걸친 채.
은발의 메이드는 조금은, 아니 많이 아쉽다는 목소리로 침음을 흘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