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13장 -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플랑슈를 데려온 며칠 동안은 무척이나 정신없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로가 전혀 예상치 못 한 상황에서 새로운 이를 만나서일까.
율리아고 나탸샤고 카엘라고 시간만 되면 불쑥 찾아와서는 플랑슈를 살피느라 바빴다.
아무래도 셋 모두 눈치 하나는 빠른 여인들이기에, 해서 플랑슈가 지니고 있는 마음을 흐릿하게나마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어디서 웬 메이드 하나가 나타나서는 끼어들기를 하느냐, 이런 소리 같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플랑슈를 미리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잠깐이나마 그렇게 생각하던 클라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일부러 이렇게 늦게까지 시간을 끌어서 그녀를 데리고 온 이유가 있지 않은가.
지금도 은근히 경쟁심인지 경계심인지 모를 것을 대놓고 풍기고 있는 플랑슈다.
그나마 자신보다 다른 여인들이 먼저 클라우스와 알고 지낸 사이임을 알고서는 되레 자신이 클라우스에게 혼이 날까 조용히 지내고 있을 뿐이다.
무척이나 공손하고 또 예의 바른 얼굴 뒤로 어떤 또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나중에 가서는 거리낌 없이 암살 임무를 수행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행여 통제 불가능이 된다면 꼼짝없이 회차를 다시 진행해야 할 수도 있었기에 클라우스는 모든 준비가 다 끝난 후에야 플랑슈를 곁으로 데려온 것이다.
“식사 시간입니다, 클라우스님.”
오전 강의가 끝나고 아카데미 복도를 걷고 있는데 스리슬쩍 다가온 플랑슈가 입을 연다.
시간이 남는다면 방으로 돌아가서 대충 아무거나 해 먹는 것이고.
바로 강의 준비를 해야 한다면 생도들처럼 식당에 가서 때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메이드로 있는 한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후 자연스레 식사 준비는 클라우스에서 플랑슈로 그 일이 넘어가게 되었다.
뭔가 여태 자신이 하던 일을 빼앗긴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묘하긴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요리 실력에서 클라우스라고 해도 플랑슈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키위 소스에 꿀을 더한 샐러드입니다.”
“다음은 바질을 넣고 살짝 구운 빵이 되겠습니다.”
“메인 요리는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입니다. 이전에 말씀하신 대로 미디움 레어 굽기로 준비하였습니다. 통후추를 살짝 갈아 넣었고 그 외에 소금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음료는 자칫 느끼해질 수 있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 레몬과 탄산수를 적절히 섞은 음료를 준비하였으며 후식으로는….”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정성이었다.
저걸 혼자 다 준비해서 세팅까지 하고 정리까지 다 한다는 생각을 하니 확실히 자신이 별 생각 없이 만들어 낸 메이드 캐릭터가 심각한 밸런스 붕괴를 유발할 수 있었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은 클라우스였다.
그나마 여태까지의 회차에서는 딱히 본인이 나설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던 터라.
플랑슈에게는 클라우스라는 존재가 트리거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저 여자가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면 희대의 메이드 여왕이 탄생했을 지도 모를 수준이었다.
사사삭!!-
클라우스가 막 접시를 비우기 무섭게 그걸 빠르게 치워내고는 다른 메뉴를 준비하는 플랑슈.
아마 이 모습을 본다면 팔라티나트의 이들은 자신이 알던 플랑슈가 맞기는 한 거냐고, 믿을 수 없다고 두 눈만 껌뻑이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 메이드의 업무 능력은 뛰어난 것이 맞지만 말수도 거의 없고 빠르다기보다는 그냥 묵묵히 제 할 일을 열심히 한다,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지금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은 완전히 딴판, 아니 그냥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혹 다른 게 필요하시다면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또 눈동자에 번뜩이는 것이 스치고 지나간다.
입술을 혀로 핥는 것을 보아하니 일단 결코 바른 생각은 아닐 터.
어차피 저 메이드는 무조건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 결정된 여인이니 급할 게 없다.
지금은 일단 차후 클라우스의 위치를 더욱 굳건히 해줄 이들부터 챙길 때였다.
“오늘 오후부터 저녁, 늦으면 밤까지는 아마 자리를비울 거다, 플랑슈.”
그 말에 플랑슈의 손가락 끝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슬며시 고개를 든 메이드는 가만히 클라우스를 쳐다본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무슨 말이냐고, 혹 다른 일정이 있냐고 묻는 것 같다.
“개인적인 볼일이 좀 있어.”
“…사적인 일이시라고요.”
“그래. 강의나 뭐 다른 건 아니니 행여 찾아다니지 말고 내 방에서 기다리도록 해. 아니면 그냥 네 방에서 대기하다가 아예 내일 아침에 다시 와도 되고.”
“혹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주실 수있을까요. 메이드로서 주인님의 일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
그 와중에 메이드의 업무 능력을 들먹이면서 바로 클라우스의 동선 파악에 들어가는 플랑슈.
이게 무서운 것이 대놓고 알려줘! 하고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놓으면서 은밀하게 접근하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그 율리아도 클라우스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간섭하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데.
하고는 싶지만 그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손에 꽉 쥐고 싶다는 생각마저 접고 일단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는 지켜보고 있을 뿐인데.
플랑슈는 보는 바와 같이 망설이지 않고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거지. 대놓고 물으면 간섭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으니까 메이드의 업무라는, 나로서는 뭐라고 할 수 없는 이유를 드는 거야. 역시 누가 지나가던 메이드 아니랄까봐.’
슬쩍 고개를 내저은 후 클라우스는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 반응에 플랑슈는 자신의 뜻대로 뭔가 진행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걸 느낀 것일까.
조그마한 탄식을 내뱉고서는 급히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것이 주인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면 제가 관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요. 오늘 오후부터 밤까지, 대기토록 하겠습니다. 혹 제가 필요하시면 옆에 있는 종을 가볍게 쳐주시면 됩니다. 자다가도 바로 달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전쟁터도 아니고 자는 사람 깨우는 것만큼 멀리 하고 싶은 일도 없다.
클라우스 본인도 먹다가 일시키는 건 이해해도 자는데 일시키는 건 선 넘은 거 아니냐는.
최소한 수면 시간은 보장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마인드를 지닌 쪽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욕실에 들어가 몸 정돈을 마친 후,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는다.
굉장히 움직이기 용이하면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단출한 의복.
플랑슈는 거기까지 따라와서는 너무 색감이 칙칙한 게 아니냐, 클라우스님의 위상을 옷이 전혀 드러내주지 못 하고 있으니 다른 걸 입어야 한다, 따위의 말들을 해댔다.
사실 플랑슈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 현재 클라우스가 입고 있는 복장은 굳이 따지자면 츄리닝과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장식은커녕 무늬도 없이 그냥 정말 활동성만 생각해둔 복장.
이런 옷을 입고 나갔다가는 당장 어디 일꾼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다고, 플랑슈는 자신이 도와주겠다면서 어떻게든 다른 옷을 입히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아니, 옷도 내 마음대로 못 입는 거냐.”
“주인의 고귀함은 곧 밑에 있는 사람들의 가치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
“제 면을 봐서라도 이런 복장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활동성을 생각하신다고 해도 제가 적절한 복장을 맞춰드릴 테니 제발 그 옷은 이미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팔라티나트에서 만났던 그 과묵하던 메이드는 어디로 가고.
지금 클라우스 앞에 서있는 건 정말 다급한 기색으로 그건 절대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플랑슈였다.
결국 클라우스는못 이기는 척 플랑슈에게 몸을 맡겼다.
그러자 메이드는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짓더니 가볍게 손뼉을 치고는 본격적으로 지금의 클라우스에게 딱 맞는 복장을 파팟! 하고 찾아서는 샤샥! 하고 그의 앞에 보여주었다.
“그건 너무 눈에 띄잖아.”
“이 정도는 기본적인 게 아닙니까?”
“너무 화려해. 다른 거.”
“…그렇다면 이건….”
“그냥 나 여기 있다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이러다가 세실리와 약속한 시간이 지나갈까 슬슬 걱정이 되었다.
다른 여인들과는 밤새도록 즐겼다고 하지만 세실리 같은 경우에는 지금과 같은 시간이 오히려 최고의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게 클라우스한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세실리한테만 즐거운 시간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하시죠. 이 이상은 저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래. 알겠다, 알겠어.”
플랑슈를 들인 이상 감내해야 할 부분들은 꽤나 많다.
그 중 하나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차려입고 어딘가로 휙휙 쏘아 다니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주인이 후줄근한 모습으로 돌아다닌다는 건 아랫사람들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조금이나마 자신을 생각해준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플랑슈의 말은 조언 같기도 하면서 또 왠지 모르게 일종의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메이드의 마수에서 벗어난 클라우스는 스킬까지 써가면서 은밀하게 이동했다.
이후의 일들은 다른 이들에게 알려져서 좋을 게 하등 없으니 당연한 조치.
순식간에 세실리가 있는 방까지 당도한 클라우스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후다닥! 우당탕탕!!-
“….”
아무래도 노크 소리가 들리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던 모양이다.
워낙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터라 클라우스는 차마 자신이 왔다는 말도 못 하고 그냥 문 앞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비로소 소음이 잦아들고 그 사이로 세실리가 빼꼼 모습을 드러낸다.
“크, 클라우스 교수님?”
“…뭡니까? 방금 안에서 엄청난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그보다 이제 가시는 건가요?”
“네. 중간시험 전에 세실리 생도의 실력이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좀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 바로 대련장으로….”
“아니. 거기 말고.”
“에? 어, 어어?”
세실리가 미처 질문을 할 틈도 주지 않고 클라우스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딱히 유쾌하지는 않은 일이지만, 지금부터는 정말 진지하게, 장난기 하나 섞지 않고 이 여자가 원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교, 교수님? 저, 저 아직 제대로 준비가….”
“준비를 미리 해두라고 며칠 전에 말했을 텐데.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는 건가?”
여태까지 보여주던 기운은 죄다 거짓말이었다는 듯 살기를 피어 올린다.
순식간에 오싹하고 스산한 기운이 세실리의 피부 바로 위까지 덮쳐온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마족 여인은 입술을 다물고서는 그저 클라우스가 잡아 끄는대로 몸을 맡기고는 발을 놀릴 뿐이었다.
“아!”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 이르자 클라우스는 거침없이 세실리를 내던졌다.
덕분에 미처 대비를 하지 못 한 그녀는 꽤나 험하게 땅을 구르고 말았다.
“흐앗!”
“일어나. 두 번 말 안 한다.”
말 한 마디에 섬뜩한 살기가 짙게 배어있다.
세실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서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클라우스의 앞에 섰다.
바로 며칠 전까지 보던 그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절로 몸이 후들거릴 정도로 낯설고 두려우면서도, 또 묘하게 두근거리는 모습이었다.
“중간시험이 어떤 방식으로 치러지는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네, 네. 클라우스 교수님의 마법을 어떤 조건 속에서도 무조건….”
“무조건 발현해낸다. 그래, 그게 바로 중간시험이지. 그리고 눈치가 있는 녀석들이라면 아마 대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시험이 결코 다른 강의의 시험마냥 쉽지는 않을 거라는 걸.”
“….”
“세실리 레블랑. 넌 이번 중간시험을 무조건 통과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통과한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오늘 내가 특별히 점검에 들어갈 거다.”
“저, 점검이라면….”
혹시 그건가요? 정말 그건가요? 진짜 그건가요?! 라는 물음이 다 들리는 듯 하다.
클라우스는 속으로 염병, 하고 짧게 욕설을 내뱉은 후 품에서 슬그머니 뭔가를 꺼내들었다.
하나는 검은색의 긴 끈,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귀족들이 선물이라고 던져준 지휘봉이었다.
“세실리 레블랑 생도.”
“네, 네. 클라우스 교수님.”
“지금 걸치고 있는 옷, 다 벗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