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11장 - 잃어버린 것
마족들이 인간 귀족들에 비해서 클라우스에게 호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적의를 가지고 있는 자들도 많고, 설사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존경을 한다거나 추종을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부분이다.
그런 부분에서 볼 때 팔라티나트 가문은 클라우스의 추종자가 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일단 이 가문은 초대 가주가 무인으로 시작한 만큼 무장에 대해서 무척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강한 곳이다.
흔들리지 않고 적과 싸우며 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자에게는 그게 적이든 아군이든 가리지 않고 예의를 차리는 것이 그들 팔라티나트의 방식이었다.
율리아의 숙부는 아직 제 세력이 미미하던 당시 그 부분을 이용했다.
팔라티나트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마치 명예로운 전사인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이후 팔라티나트가 자신을 지지하자 그들과 연이 닿아있던 가문들도 자연스레 지지를 천명.
허나 이후 더 많은 세력들이 들어오면서 너무 고지식한 팔라티나트는 자연스레 중심에서 밀려나 결국에는 반 마왕파의 가장 언저리에 머물게 되었다.
명백한 배신, 누가 봐도 이용만 해먹고 버린 것.
그러나 전대 영주는 끝까지 자신이 선택한 주군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앞에 앉아있는 에슐리의 부친이었다.
“전대 영주는 어디 계시지?”
“아버지는 한적한 곳으로 떠나셨어. 말씀은 안 하셨지만 염증이 나셨겠지. 이 상황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당신이 선택한 것, 당신이 감당해야 할 일인데.”
“내가 생각해도 그래. 하지만 어쩌겠어? 팔라티나트가 택한 주군인데.”
“아니지.”
클라우스의 반문에 에슐 리가 응? 하고 고개를 든다.
그의 앞에 앉아있는 대륙 전쟁의 영웅은 양옆으로 확실하게 고개를 젓고는 말을 잇는다.
“팔라티나트가 택한 주군이 아니라 네 아버지가 정했던 주군이지.”
“….”
“그리고 현 팔라티나트의 영주는 너다.”
“그래서 배신을 해라, 지금 이런 말이야?”
“말이 조금 웃긴데. 배신을 한 건 팔라티나트가 아니라 그 잘난 주인 아니었나? 배신을 당했으니 이제는 계약 관계도 끝이 난 거지.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내가 모를까? 아무리 왕과 귀족이라도 해도 한 쪽이 기본 조건을 어기면 더는 충성 계약이 성립이 안 돼.”
왕이 자신을 죽인다고 하면 ‘예! 죽이십쇼!’ 하고 목 빼어드는 세상이 아니다.
저놈이 나를 지켜주는 대신 나는 저놈이 명령하는 대로 따르는 계약 관계가 기본이다.
만약 주인이란 놈이 날 죽이겠다고 한다면 그에게 칼을 빼들어도 상관이 없다.
그 부분을 알기에 왕과 귀족들도 제 밑의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팔라티나트는 배신을 이미 당한 상황이다.
반 마왕파의 시작을 같이 했는데 그 파벌이 최고 전성기인 지금 그들의 위치는 어디인가.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입만 잘 터는 게 다인 베드르 영지보다도 대우를 못 받는다.
나름 명예로운 전사 가문으로 이름 높았던 곳이었지만 너무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율리아의 숙부가 점점 내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다른 귀족들도 연을 끊어버렸다.
이게 바로 율리아가 그리도 혐오하는 제 숙부의 방식이었다.
급할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처럼 굴다가 필요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린다.
헌데 또 버림 받는 쪽은 다른 이들에게 동정의 표조차 얻지 못 하게 제대로 작업을 당한 후 내쫓기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았다.
‘당장 팔라티나트 같은 경우에는 남매 모두가 포로로 잡혔다가 살아 돌아온 부분을 꼬투리 삼아서 율리아의 숙부 놈이 완전히 밀어내버렸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마족 놈이 부디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면서 힘을 들여 생포한 것이고, 또 잘 대접하다가 풀어준 것이긴 하다.
삼남매에게는 그들이 항상 제 윗세대에게서 교육을 받았던 참된 무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율리아의 숙부에게는 팔라티나트를 견제할 흘륭한 건수를 제공한 것이다.
“팔라티나트도 소식이란 걸 들을 테니 대충은 알고 있겠지.”
“당신이 마왕과 꽤나 가까운 사이처럼 보인다는 거. 듣기는 했는데 그냥 멍청한 것들의 헛소리로 알고 있었어. 당신을 잘 아는 자라면 설마 클라우스가 인간들을 포기하고 마왕에게 고개를 숙일까 싶었거든.”
“버림 받았고 쓸모없다고 못 박혀서는 손발까지 묶어서 내동댕이쳐졌다. 내가 그런 상황에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했을 것 같나? 하물며 전쟁도 끝나서 마음만 먹는다면 나 정도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을 테고.”
“멍청하긴. 당신을 죽이는 건 국가적 손실이야. 아무리 인간 귀족들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벌이지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에슐리는 반사적으로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정말, 아니지? 라는 뜻이었지만 클라우스는 그런 에슐리의 생각을 비웃듯 그냥 큭큭, 하고 냉기 어린 웃음만 터트릴 뿐이었다.
“…빌어먹을.”
결국 에슐리는 제 얼굴을 감싸 쥐고는 분하다는 듯 한숨을 터트렸다.
명예로운 전사들은 항상 필요할 때만 찾고,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고서는 다 내다버린다.
자신이 당했고, 자신의 아버지가 당했고, 자신의 동생들이 당했다.
그리고 이제는 전사로서 흠모하고 있던 이마저 환멸을 느낀다면서 나타났다.
“…다를 게 없잖아. 당신도 이러면, 결국 그 역겨운 자들과 다를 게 없어.”
“그렇게 되나?”
“그렇게 되고말고. 전사는 항상 전장에서 공으로 자신을 논하는 거다. 나는, 우리 가문은 평생을 그렇게 배우면서 살아왔어. 정계의 일에 관여하는 순간 전사의 삶도 끝나는 거야.”
“정계에 관여하라 하지 않았다. 너희를 버린 주군을 포기하고 새 주인을 찾으라는 거지.”
“바로 그 부분이 팔라티나트에 있어서는 정계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역시 뼈 속까지 무골인 여인이다.
팔라티나트 가문이 저래서 명성이 높았고, 그래서 율리아의 숙부에게 버림을 받은 거다.
저리 딱딱하게만 굴면 써먹을 곳이 한정적이니 결국 뒤로 밀리게 된다.
대게 보면 저런 가문은 주군 한 번 잘못 만나면 패가망신하게 되어 있다.
좋은 예로 율리아의 숙부가 있지 않은가.
“당신도 그렇잖아 그 더럽고 치졸한 자들 사이에서도 당신은 7년 동안 견뎠고 그래서 찬란하게 빛났어. 비록 적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당신의 그 모습을 기억해. 남부 사령관 클라우스.”
“….”
“당신이 그리도 혐오하던 자들처럼 되려는 건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기에 너희의 왕을 택한 거다. 그녀를 보는 순간 깨달았어. 저 여자가 진정한 의미의 군주가 될 것임을. 항상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하고 싶었던 존재가 될 것임을. 너가 그렇게도 말하는 전사로서 깨달은 거다.”
“….”
“전사는 자신을 알아봐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지. 난 이제야 그 주인을 만난 거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내게 뭐라 할 수는 없어.”
잠시 말을 멈추고 에슐리를 바라본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있는 이 모습은, 과거 그녀가 포로로 잡혔을 때 그녀 앞에 앉아있던 남부 사령관일 때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몇 달 안으로 반 마왕파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다.”
“여태까지 조용했는데 갑자기?”
“벼르던 놈들이 결국 폭발했거든. 아무리 그 남자라고 해도 제 부하들 전원이 싸우자고 씩씩대는데 거기에서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겠지. 만약 그들이 승리한다면 공신들이 되는 것이고, 그 공신들에게 나눠주어야 할 영지들은 어떻게 충당하게 될까.”
“그건….”
“중립파들이나 충성파 귀족들의 영지를 빼앗는다. 일단 그게 1순위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당장 반 마왕파에 어지간한 귀족들은 다 섞여있어. 땅이 부족할거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는 누가 표적이 될까.”
“….”
클라우스의 질문에 에슐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견제를 하는 마당에 정말 그 남자가 마왕의 자리에 오른다면 과연 팔라티나트를 가만히 둘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뛰어난 전사는 때를 보다가 최고의 순간에 결정을 내리고 행동한다.”
“…포로 송환 전날에 했던 말이네.”
“기억하고 있으니 다행이군. 그러면 이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 텐데, 에슐리 팔라티나트 영주.”
팔라티나트는 반 마왕파에서는 하한가로 곤두박질 친지 오래.
반대로 지금 마왕의 곁으로 온다면 상한가를 칠 수 있으니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버림받은 주제에 배신은 불가능하다 따위의 개소리는 말고 행동하라는 뜻이다.
너희들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해줄 테니 고민하지 말고 합류해라.
눈앞의 남자는 에슐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에슐리는 클라우스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의 말대로 그 남자는 더는 자신의 가문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
정말 그가 마왕의 자리에 오르면 나중에 뭔가 건수를 잡아서 이 가문을 노릴 수도 있다.
이미 버림받은 주제에 무슨 신의를 논하고 있단 말인가.
전사는 악한 의도를 가진 자에게서 자신들의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그리고 전사라 하면, 응당 자신을 필요로 하고 알아주는 이를 모시고 싶어 하는 법이다.
“…그래도 힘들다, 클라우스.”
“이유는?”
“그 남자가 미쳤다고 우리들을 그리 놓아줄까. 당장 지금도 감시가 꽤나 엄중해. 주변의 영지들은 죄다 팔라티나트의 이웃에서 감시역으로 바뀐 지 오래다.”
“당장 행동할 필요는 없어. 하던 대로 조용히 지내다가 출병 요청을 받으면 수락해서는 선두에 서면 된다. 그 후 그대로 다 끌고 투항하면 되겠지.”
“전장에서 투항을 하라고?”
“애당초 반역자들의 명분 없는 싸움인데 버티고 싸우는 게 더 불명예다.”
거기까지가 클라우스가 할 말의 끝이었다.
나머지는 이제 에슐 리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 뿐.
이 이상은 클라우스도 도울 수가 없었고 더 설득할 생각도 없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쉽기는 하지만 이렇게 흔든 것만으로도 수확이 있는 법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클라우스가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니 에슐리가 슬쩍 입을 연다.
그 질문이 뭐냐는 듯 고개를 돌리니 에슐리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마왕 전하, 나는 많이 본 적이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없지. 그래서 하는 질문인데, 어떤 분이시지?”
“너희들의 왕이었던 여인에 대해서 인간인 나한테 질문하는 건가? 부끄러운 줄 알아라.”
“….”
날 선 클라우스의 비판에 에슐리는 침음을 내뱉을 뿐 다른 말은 하지 못 했다.
명예로운 전사라 하는 자들이 결국 왕을 배신하고 반역을 도모하는 세력에 붙어있는 것이니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 남자보다는 백배, 아니 천 배는 낫다고.”
“…충분하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에슐리는 오늘 한 번만 이런 방문을 허락하겠다고.
다음부터는 절대 이렇게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은인이기는 하나 또한 적이었기도 하니 당연한 대우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아, 그리고.”
문고리를 잡았던 클라우스는 문득 뭐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돌린다.
아직 할 말이 남았냐는 에슐리의 반문에 그는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약속 기억하나?”
“약속?”
“너희 삼남매를 송환시킬 때, 나중에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했었지.”
“그 부탁, 지금 이거 아니었어? 마왕에게 충성해라, 이거 말이야.”
“그건 제안이지 부탁이 아니야, 이 멍청아.”
“…허면 뭘 부탁하고자 하는 건데.”
팔짱을 낀 채 클라우스를 바라보는 에슐리.
무슨 대단한 부탁을 하려고 저러는 건가 궁금해 하는 눈치다.
그런 팔라티나트의 영주에게 클라우스는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 한 부탁을 했다.
“아카데미에서 교수실 청소를 맡아줄 이가 필요해서 그런데, 메이드 하나 데리고 갈 수 있나 싶어서 묻는 거다.”
“…뭐? 잠깐만, 지금 뭐라고? 메이드?”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일인지, 에슐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다.
여기까지 와서 부탁을 한다는 게 메이드 하나 데리고 가는 거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장난에 가까운 헛소리란 말인가!
“농담 아니다.”
“…진짜라고?”
“응.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