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11장 - 잃어버린 것
다른 곳도 많은데 왜 하필 팔라티나트 영지였느냐.
자신을 추종하는 다른 마족들도 분명 있는데 왜 굳이 팔라티나트만 특별 대우를 했느냐.
그런 질문이 날아든다면 클라우스는 미소를 짓고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들도 그들이지만, 사실 진짜 노리고 있는 게 있으니까.’
클라우스가 만나러 가는 여인은 지금 이 시기에 딱 팔라티나트 가문에서 메이드로 있다.
그녀에 대한 동료들의 평들을 정리해보자면 대충 이럴 것이다.
너무 말이 없다든가 소심한 것을 떠나서그냥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든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것인지, 아니 살고 싶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정말 죽지 못 해서 사는 마족, 그런데 또 막상 죽을 생각도 없는 여인.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게 전부인 녀석이라고 그렇게들 말할 것이다.
클라우스조차도 처음에는 그녀의 진가를 몰랐었다.
사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메이드를 도대체 누가 눈여겨보겠는가.
심지어 팔라티나트 가문이 율리아를 따르는 가문도 아니었으니 율리아의 숙부가 몰락한 이후 이 가문도 클라우스가 회유하지 않는 이상 그대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메이드 역시 그냥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이 세계에서 저런 여자가 있다는 내용은 당연히 존재하지도 않았다.
창조주조차 전혀 몰랐던 그녀의 정체는 클라우스가 스물여덟 번째 회차에 진입했을 때 비로소 발견한 것이었다.
‘팔라티나트 가문을 회유해서 반 마왕파에 구멍을 내려고 했었나? 그 때 영주성에 잠입을 했는데 그 여자한테 딱 걸렸었지.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스킬까지 지워가면서 기척을 지웠음에도 그걸 용케 알아차린 부분에서 이미 보통 여자가 아님을 바로 알아야 했는데.’
괜히 불상사가 나기 전에 빠르게 제압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여자가 자신의 공격에 전부 반응하면서 방어를 성공한 게 아닌가.
물론 진심을 다 한 것이 아닌 딱 메이드를 제압할 정도의 힘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경험 부분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을 터인데 도대체 이게 뭘까.
이후 클라우스는 팔라티나트 가문을 회유한 후 그 메이드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아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지워버렸던 설정이 그렇게 있을 줄은 정말 몰랐는데.’
왜 가끔 가다가 그런 게 있으면 재미있지 않은가, 하고 넣었던 바보 같은 설정.
사상 최강의 메이드인지 뭔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애당초 확실한 주인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종의 대륙 서사 비슷한 글이라 그런 메이드가 있어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곧 폐기 처분했지만.
그 설정이 도대체 왜 이런 구석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확실한 건 그 메이드의 성능이 역시나 대단하다는 것이다.
재능 부분에서는 나타샤의 근접 전투 능력에 세실리의 마법 실력을 합친 수준이며 메이드의 업무 능력도 나름 평균 이상이고 무엇보다 일단 시키면 밤 시중도 아주 잘 들었다.
이전에 말했던 율리아와 거의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여인이 바로 그 메이드였다.
하지만 폐기 처분되었던 설정 때문인지 그 메이드한테는 크나큰 결함이 있었다.
바로 조금 전 그녀의 동료 메이드들이 한 말과 같이 삶에 의미를 두지 못 한다는 것.
그냥 태어나서 사는 거, 죽지 못 해서 사는 거, 이유도 의의도 없는 여인이었다.
하다못해 클라우스를 따르는 것도 그가 그녀를 메이드로 고용해서였다.
율리아처럼 그에 대한 사랑, 혹은 집착이나 카엘라와 같은 충성심, 나타샤나 세실리의 의존증과 같은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 클라우스와의 계약이 끝나고 그 계약이 연장되지 않는다면 그녀는 이후 자신을 메이드로 고용하고자 하는 이에게 찾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메이드 일을 더 못 한다면 다른 일을 찾을 것이고, 결혼을 하면 하는 것이고 애를 낳으면 낳는 것이고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아, 죽는구나 하고 눈을 감을 것이다.
이상이 나사 빠진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 그 마족 여인에 대한 것이었다.
‘도대체 걔를 어떻게 해야 한담.’
너무 최근에 알아버린 탓에 다른 여인들 마냥 공략을 어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심지어 드러나는 약점이 있기는커녕 그 안조차 텅 비어있던 터라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그 맹한 메이드를 휘어잡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다른 놈들은그녀의 진가를 전혀 모를 터이니 누가 채가기 전에 얼른 데리고 와야 한다.
이 세상에서 메이드는 천한 직업이 아니라 전문직으로 생각되니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아카데미로 불러 차근차근 속까지 파헤쳐서 완벽하게 길을 들이고자 클라우스는 마음먹었다.
타탓!-
이전과는 달리 클라우스는 아예 대놓고 팔라티나트 영주성 앞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회유를 할 목적이라면, 그리고 이들과 반 마왕파를 떼어놓을 생각이라면 이렇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억!-
클라우스가 영주성의 문 앞으로 다가가니 경비병이 할버드를 내리고는 소리 없이 물러서라고 경고를 해보였다.
원래 팔라티나트가 묵직한 맛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일개 사병들도 ‘웬 놈이냐!’ 혹은 ‘물러서라!’ 따위의 가벼운 말 대신 묵직한 행동으로 대신한다.
클라우스는 다시 한 번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그러자 경비병이 이번에는 할버드의 창날 부분을 그에게 겨누고는 바싹 경계를 한다.
도대체 웬 미친놈이 저녁에 이리도 무례하게 영주성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냐고 묻는 듯 하다.
“들어가서 전해주었으면 하는데.”
“…?”
“여기 삼남매의 은인이 왔다고.”
경비병은 클라우스의 말에 ‘웬 미친놈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뭔가를 느낀 것인지 그는 옆에 있던 제 동료에게 클라우스를 맡기고는 제 상관에게 지금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 사라졌다.
만에 하나, 정말로 영주의 세 자식들의 은인이라면 큰 무례를 범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얼마 후,성 안쪽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당연한 것이 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놈이 확실히 은인이 맞기는 한데 그저 은인이라고만 하기에는 또 과거 그의 자리가 명백한 적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척, 척척!-
채앵! 챙!!-
문이 열리더니 곧 날카로운 기세를 숨기지 않은 자들이 무기를 빼어든다.
완벽한 포위진을 만들고서 서슬 퍼런 날을 클라우스에게 겨누는데 당장이라도 저놈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작 그 한 가운데에 있는 클라우스는 여유만만 그 자체.
오히려 주변을 한 번 스윽 둘러보고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입을 연다.
“팔라티나트는 원수도 갚지만 은혜도 갚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오늘은 원수만 갚는 날인가보군. 아무래도 날을 잘못 고른 것 같아서 유감이야.”
“…미쳤군. 설마 했는데 정말 당신이 여기까지 올 줄이야. 여기가 서부인줄 아나? 동부에는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말 못 할 사정이 저마다 하나씩은 있는 법이지.”
아마 클라우스가 아닌 다른 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바로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을 이끌고 나온 팔라티나트의 가주는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보다 영주가 바뀌었군. 시간이 좀 많이 지났으니 영주 자리를 물려받은 건가, 에슐리?”
“이놈! 무례하다! 팔라티나트 영주님의 이름을 사사로이 부르는 것이냐!”
“다들 조용.”
곁에 있던 이가 바로 으르렁거리자 에슐리라고 불린 여인이 그를 제지한다.
그리고는 잠시 클라우스를 노려보다가 전원 무기를 내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돌아가. 못 본 척 해줄 테니까. 걸리지 말고 그대로 당신이 왔던 길로 돌아가도록 해.”
“돌아가지 말라고 해도 돌아갈 거다. 그런데 전할 말은 하고 돌아가야겠는데.”
“함부로 굴지 마. 여기는 서부가 아니야. 그리고 당신은 이제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우리 마족들의 철천지원수일 뿐이지. 당장이라도 당신을 이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어.”
“원수이기도 하지만 너와 네 두 동생의 은인이기도 하지 않나? 죽을 뻔한 삼 남매를 그래도 동부로 돌려보낸 게 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말이 틀리나?”
“….”
클라우스의 말에 에슐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클라우스의 정체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전 대륙 전쟁에서 그와 한 번 맞서 싸운 적이 있고 아주 거하게 깨졌으며 하마터면 목이 잘릴 뻔한 것을 클라우스가 포로로 대우해줘서 결국 송환까지 되었던 그녀였다.
“…따라와.”
결국 에슐리는 병사들을 물리고 클라우스에게 따라오라 말했다.
오늘 일을 함구하라는 명령조차 내리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나 이곳 팔라티나트의 영주에 대한 충성도는 굳건한 모양이었다.
여가주의 뒤를 따라 계속 걸음을 옮겨 마침내 영주의 집무실에 다다른 클라우스.
그에게 자리조차 권하지 않은 채 바로 의자에 몸을 던진 에슐리는 매서운 눈매를 하고서는 입술을 뗀다.
“자, 얼른 하고 싶은 말 해. 그리고 다시는 이런 미친 짓 하지 말고.”
“마왕의 편에 서라.”
순간 에슐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친 짓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단 1초 만에 다시금 미친 짓을 하고 있다.
팔라티나트 가문이 반 마왕파의 일원임을 모르고서 하는 말인가?
심지어 나중에 들어온 세력도 아니고 원래부터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의 숙부를 지지하던 곳이 바로 팔라티나트인데?
“지금 뭐하자는 거지?”
“난 현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를 지지한다. 그걸 알았으면 해서, 그리고 이왕 너희들 삼남매도 따라왔으면 해서.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다.”
에슐리는 침묵을 유지한 채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을 것이다, 여전히 서부와 동부의 사이는 최악인데.
대륙 전쟁에서 마족들을 수도 없이 도륙한 남부의 악마가 바로 눈앞에 있다.
비록 자신과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동생들을 살려주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마족에게 있어서 클라우스는 너무나도 무서운 적이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마왕이 남부의 악마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어.’
마족으로서 어떻게 남부의 악마를 휘하에 둘 수 있느냐! 라는 것보다.
오히려 클라우스가 어떻게 마족의 밑에 있으려 하겠느냐! 가 더 중요할 정도였다.
그만큼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충격 그 자체였는데 심지어 사실인 모양이다.
‘정말이라면 없애야 한다.’
자신의 가문,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제 가족들을 위해서.
지금 저 남자를 죽여서 끌고 간다면 다시 반 마왕파의 중심에 설 수 있다.
갑자기 섞여든 어중이떠중이들을 몰아내고 원래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응. 절대 못 하지. 넌 절대 날 못 죽여, 에슐리. 네 두 동생도 그렇고.’
팔라티나트의 삼남매, 에슐리와 애틀리, 그리고 에밀리.
이 셋은 클라우스를 추종하는 마족들, 그 중에서도 아주 열렬한 쪽이었다.
물론 삼남매 중 장녀인 에슐리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자신을 속이고 또 속이겠지만.
무의식적으로 클라우스를 자꾸만 떠받는 것이 또 특이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보라, 은혜고 뭐고 가문을 위해서라면 바로 죽이면 되는데.
그 위대한 대륙 전쟁의 영웅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에 놀라서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겠지만 저 정도면 아주 열렬한 추종자라는 데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이건 아주 훌륭했던 적에게 보이는 예의다, 에슐리. 팔라티나트가 그런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는 걸 뛰어넘어 분노심이 들더군. 해서 찾아왔다. 어려울 때 이용하다가 형편이 좋아지니 딱히 뛰어난 게 없다고 버리는 놈을 따르지 말라고. 나와 같은 배를 타자고. 그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클라우스의 말에 에슐리의 입술이 씰룩거리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설마 그 클라우스에게 그 정도로 고평가를 받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는 듯.
당장이라도 ‘정말 클라우스 당신이?!’ 라고 소리라도 칠 것 같은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