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11장 - 잃어버린 것
베드르 영지에 일이 터졌다는 소식은 서신과 마법 등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조용하던 중립파들이 마왕에 충성을 하네 마네, 하고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저들을 놔두면 언젠가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그들 역시 이쪽으로 흡수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던 역성혁명 파벌, 즉 반(反) 마왕 파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중립파로 인해 정세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신들에게 무척 유리한 방향의 균형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뿐이다.
헌데 저들이 갑자기 마왕에게 붙는다면, 유리한 줄만 알았던 상황은 순식간에 뒤바뀌게 된다.
여태 조용하던 저들이 갑자기 왜 이리 대놓고 도발을 하겠는가.
일부러 건수를 던져서 반 마왕파가 중립파를 견제하도록 만들고, 그렇게 해서 갈 곳 없어지는 자들을 마왕가 쪽에 흡수시키려는 목적이 매우 강해보였다.
“베드르 영지에 일이 생겼다니.”
“허어. 그 자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다는데 모르는 척 하면 체면이 말이 아닌데.”
“상황을 주시하라고 일러두게.”
베드르 영주는 여기저기 발이 넓은 마족이다.
그에게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받아먹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강하지도 않고 영지도 부유하지 않지만 내로라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가 당당히 고개를 들고 서있을 수 있는 건 그로 인한 인맥이 많아서다.
그 마족의 영지에 변고가 생겼다, 누군가의 명백한 도발이다.
이리 된다면 그 도발은 단순히 그에게만 하는 행위가 아니다.
베드르 영주의 뒤에 어떤 마족들이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런 짓을 했는데 가만히 있는다면 베드르 영주에게는 그렇다 치고 그동안 받아먹은 것이 있는 본인들부터가 심히 불편했다.
여태까지 자신들을 띄워주고 이것저것 챙겨준 베드르 영주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체면치레를 위해서 주변의 마족 귀족들은 바로 파인 영지를 압박했다.
혹시 그쪽에서 뭔가 일을 꾸민 것은 아니냐고.
그에 파인 영주는 펄쩍 뛰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문했다.
아무리 자신이 베드르 영주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미쳤다고 영지전까지 벌일 정도의 도발을 감행하지는 않는다고, 그 증거가 있다면 제발 좀 보여 달라고 덧붙였다.
‘거기까지만 본다면, 지금의 정세가 평범한 때였다면, 조사 좀 해보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일단은 관련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괜히 서로 으르렁거리지 말라고 사방에서 압박을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국에 별 것도 아닌 여자라고 생각했던 마왕이 아카데미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고 얌전하던 중립파는 갑자기 마왕에 대한 충성을 떠들고 있지. 이런 상황에서는 굳건한 이도 상황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저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반대로 클라우스에게는 참으로 기분 좋게도.
이대로 조용히 이번 일이 끝날 수는 없었다, 반드시 크게 일이 번지고 만다.
단순하게 일의 규모로만 보자면 누군가가 중립파와 반 마왕파의 사이를 이간질시키기 위한 더러운 술수라고 생각할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명분만 따진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에서 불꽃을 키운 것과 마찬가지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 누구 하나가 명분만 만들어줘라.
그걸 이용해서 여태까지 눈치만 봐야했던 상황을 뒤엎을 수 있다.
마왕은 아카데미에서 이상한 꿍꿍이를 벌이고 있고 중립파는 그에 맞춰서 갑자기 침묵을 깨고 마왕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는 자들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된다면 얌전히 지내던 반 마왕파의 주된 세력들도 침묵을 깰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율리아의 숙부에게 몰려가서는 당장 일을 벌이자고 주장할 것이다.
‘그 놈도 병신 머저리는 아니니 뭔가 이상한 게 많다고 생각은 할 거다.’
율리아의 숙부가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한다.
단순히 제 조카를 탐하고 싶은 게 전부였다면 이리 일을 키우지는 않았을 테니까.
왕의 자리를 욕심내는 놈들은 결국 거기에 닿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놈이다.
그런 부분에서 봤을 때 율리아의 숙부는 한 번 도전해 볼만한 수준은 확실히 되었다.
하지만 딱 도전을 해볼 만한 수준일 뿐 그 이상은 되지 않는다.
율리아보다 더 오만하고 더 감정적이며 더 귀가 얇다.
평소에는,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때라면 여유를 가진 채로 상대방을 능욕하는 스타일이나.
반대로 자신에게 불리해지는 상황에서는 평정심을 잃고 약점을 드러내는 마족이었다.
클라우스는 딱히 반 마왕파의 동태를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다.
회차를 반복하면서 저들의 반응이 다 똑같다는 것이야 진작 확인하고 있었고 이전의 회차들과 사건 방향이 달라진 것도 없으니 두 눈에 뻔히 보이는 것들이었으니까.
스슥, 슥-.
품에서 수첩을 꺼내서 이후 벌어질 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본다.
더는 중립파들의 이탈을 손 놓은 채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반 마왕파들.
결국 아무 관련도 없다는 파인 영지에 베드르 영주가 영지전을 걸도록 이끌고 만다.
당연히 파인 영지 쪽은 자신들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중립파에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분열로 인해 중립파의 힘이 분산되어 있던 터였고 결국 파인 영지는 베드르 영주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마왕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숨을 죽이고 있던 자들.
허나 정세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더는 초조함을 이겨내지 못 하고 행동을 개시한다.
반 마왕파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새로운 마왕을 세우려고 한다.
그렇게 판단한 중립파들이 반 마왕파로 흡수되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반작용으로 나머지 중립파들은 스스로 마왕에 대해 충성을 다하기로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을 보던 자들이 갑작스레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상당히 빈틈이 많아 보일 수도 있는 일들이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애당초 반 마왕파는 충성파나 중립파보다도 더 큰 규모를 지니고 있는 파벌이다.
두 세력을 동시에 상대해도 충분한데 그저 율리아의 숙부가 최고의 때를 잡아야 한다면서 거의 강제적으로 제 세력들을 눌러대고 있던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런 게 평소에는 그나마 좀 먹힐지 몰라도, 별 것도 없어보이던 놈들이 갑자기 힘을 합치려하는 그런 느낌이 들면 바로 위기의식이 들기 마련.
거기에 우리가 저들보다 원래 더 유리했다, 라는 자신감이 붙으면 당연히 이후부터는 신중하게 움직이자는 주장보다 이참에 아예 이번 기회에 다 뒤엎자는 주장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그 놈이라고 해도 이렇게 밑의 놈들이 하나같이 지금 일어선다면 동부 전체를 깔끔하게 먹어치울 수 있다고 매일 같이 지랄을 하는데 버틸 수 있겠어.’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빈틈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정치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에 호소하는 것.
지금 우리가 먼저 치지 않으면 분명 영지전을 핑계로 마왕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당장 아카데미에서 대놓고 레블랑 가문과 묘한 사이를 보이고 있고 남부의 악마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는데 이러다가 마왕한테 뒤통수를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율리아를 제 손아귀에 쥐려고 하는 그녀의 숙부에게 있어서 상상하기도 싫은 일, 그리고 기껏 다 잡아둔 물고기가 도망치려 한다는 자존심 상하는 의견.
결국 반 마왕파는 이번 기회를 놓치려고 들지 않는다.
중립파가 자신들을 먼저 건드렸다는 이유 하에 이것은 합당한 영지전이라고 하며 정식으로 파인 영지를 베드르 영주의 것이라고 선포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지?”
원래 영지전에서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의 가산을 몰수하든 아니면 영지를 통째로 빼앗든.
그것은 승자의 선택이지 패배자의 재량을 벗어난 일이다.
당연히 파인 영주 쪽에서는 반 마왕파 쪽에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하지만 마왕성은, 현 마왕인 율리아 아그네사는 달랐다.
‘원래의 규율대로라면 영지전에서 승리한 후 왕에게 정식으로 보고를 올리고 패배한 자의 가산이든 영지든 부디 자신에게 내어주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해야 한다. 그러다가 그게 점점 느슨해졌는데 승자의 권리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했던 마왕가가 그런 보고가 조금 늦어도 넘어갔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이번에는 마왕이 직접 대놓고 딴지를 걸 것이다.
영지전에서 승리를 하여 영지를 몰수하기 전 응당 마왕인 내게 보고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으나 너희들에게 내려진 모든 영지는 결국 왕가에서 내려준 것인데 어찌 그것들을 너희 마음대로 취하는 것이냐고.
역성혁명파가, 반 마왕파가 대놓고 율리아를 무시하던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아주 기본적인 부분, 호칭이라던가 왕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짓은 그들조차도 은연중에 피하고 있던 것이다.
당장 무도회에서 마족 생도들이 그래도 마왕이라고 불렀던 것이나 역성혁명, 반 마왕파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들도 다른 마왕을 세워야 하는 자들이니 그 왕의 권위를 심각하게 깎아내리는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율리아가 좋은 건수를 물고 늘어진다면.
영지 부분은 세금과 직결되는 것이고 마왕가로서도 결코 넘어가줄 수 없는 부분이라면.
과연 그들은 어떤 결론을 내리고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올 반응? 뻔하지. 오래 참아줬다, 뒤엎자.’
원래 그들이 원하던 그림은 율리아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 결국 질 걸 뻔히 알면서도 순순히 당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걸 걸고 싸우겠다 나서는 것이었다.
그리 된다면 명분에서도 자신들에게 크게 불리할 것이 없다.
왕이라는 놈이 신하들인 자신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죽이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도 당연히 자위 목적으로 왕과 대적할 수밖에 없다.
이건 반역이 아니라 그냥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그렇게 개소리를 해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 없을 것이다.
원래부터 자신만만하다 못 해 오만하던 자들에게 너희가 지금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부분을 은근하게 심어주었다.
중립파를 흔들어서 그들 중 일부를 반 마왕파에 흡수되도록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클라우스는 당장 영지전을 준비하겠다는 베드르 영주를 끝으로 몸을 돌렸다.
땔감이 넘쳐나던 곳에, 그러나 과연 누가 불길을 넣을지 눈치만 보던 곳에 제대로 불을 냈다.
이제 남은 건 저들끼리 활활 타오르다가 서로 재가 되어서는 다시 타오를 힘도 없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이 다음은… 아, 팔라티나트 쪽이군.’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는 아카데미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니 여유를 부릴 시간도, 휴식을 취할 시간도 아껴야만 했다.
중립파와 반 마왕파 간의 불화를 크게 앞당겼으니 이번에는 점점 약해지는 기존 율리아의 숙부 지지층을 약화시킬 차례다.
원래부터 율리아의 숙부를 지지했으나 이후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들어서 어느 순간 밀려나서는 현재 짐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가문들.
그 중에서 꽤나 쓸 만 해지는 한 가문을 클라우스는 알고 있다.
베드르 영지에서 두 시간을 더 내달려야 나오는 영지, 팔라티나트.
대대로 무장을 배출하던 가문인데 율리아가 마왕이 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선대 마왕 때부터 율리아의 숙부와 많은 부분을 교류하던 가문이었다.
원래는 율리아 집권 이후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게 맞긴 한데 그렇기 하기에는 아쉬운 부분들이 많아서 클라우스는 이후 회차들에서 살짝 계획을 바꾸었다.
일부러 그들과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남부 쪽으로 참전했던 그 가문들의 자제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모두 생환시켜주기까지 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인간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그 자리에서 붙잡아서는 그대로 끌고 간다면 다시 원래의 지휘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 할 가문이 아니니 율리아 쪽으로 끌어들이는 거 아니겠어. 무엇보다 열렬한 추종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 있는데 내 손으로 잘라버릴 필요는 없지.’
여태 고생한 게 몇 년인데,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 몇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