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11장 - 잃어버린 것
이른 새벽.
조용히 제 방을 나서서는 발걸음을 옮긴다.
꽤나 쌀쌀한 새벽 공기를 뚫고서 아카데미를 나서는 클라우스.
오늘 있을 강의는 카엘라에게 일임을 해둔 상태다.
당신의 빈자리를 어찌 채우느냐는 호랑이 여인의 걱정에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려울 거 없이 그냥 애들 데리고 나가서 덤비라고 하라고.
그러면서 지금의 이 대련이 중간시험은 물론이고 기말시험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거라고,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잊지 말라고 말이다.
딱히 시험에 뜻이 없는 생도들이라고 해도, 다른 생도들과 비교되는 건 또 엄청 싫어한다.
다들 한 자존심 하는 이들이니 내가 경쟁자로 생각하는 누구보다는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 속에 박혀있을 수밖에 없다.
클라우스는 바로 그 부분을 이용해서 자신의 빈자리를 카엘라가 채울 수 있게 만들었다.
저 호랑이 수인과 대련을 하면 시험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아마 다른 이들보다 더 위에 있기 위해서,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전에 있었던 대련만큼이나 진지하게 카엘라와의 싸움에 임할 것이다.
‘만약 카엘라가 지면 어떻게 하냐고?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어차피 생도들 수준으로는 카엘라를 이겨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타샤와 세실리가 합심을 한다거나 율리아가 전력을 다한다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지만 아직 두 여인은 서로 합이 전혀 맞지 않고 율리아는 주말 내내 자신과 섹스 삼매경에 빠져서는 꽤나 지쳤을 테니 카엘라를 상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머지 생도들은 말할 것도 없으니 결국 재미를 보는 건 카엘라라는 소리다.
카엘라의 능력이 조금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클라우스는 아쉬운 마음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수인답게 젊은 나이에 실력이 절정에 오른 카엘라.
지금도 그렇고 향후 몇 년 동안은 최정상의 실력자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허나 계속해서 성장하게 되는 율리아와 나타샤, 세실리와는 다르게 그녀는 지금이 최고치다.
유지를 하는 시간이 길다고는 하지만 클라우스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스킬을 써도 애당초 카엘라의 한계가 딱 거기까지인지라 율리아의 뒤를 잇는 실력자로는 키워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쉽군, 정말 아쉬워. 카엘라 정도면 수인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긴 하지만… 저기서 성장이 끝이라는 건 정말 아쉬울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실전 경험이라도 계속 시키고 있는 클라우스였다.
전장에서 부관으로 계속 데리고 있던 이유도, 그리고 아카데미로 불러와서 조교 역할을 맡기면서 아직은 애송이들을 상대로 싸움을 가르치게 하는 것도 그런 부분 때문이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가르치면서도 실력이 조금씩 향상되니까 말이다.
아쉬운 부분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많아진다.
허나 이제 자신으로서는 정말 어찌 할 수가 없는 부분들.
그래도 카엘라면 율리아를 제외하고서라도 자신이 부리는 여인들 중 다섯 명에는 충분히 드는 수준이기에 치명적인 부분이라고 보기는 좀 그랬다.
‘당장은 내 일에 집중하자.’
동선에 있어 의심을 받지 않도록 클라우스는 일단 도시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과는 정반대 방향의 곳이었지만 자신을 은밀히 주시하고 있는 이들이 분명 있을 터이니 그들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라도 이전 작업은 필수였다.
마차를 타고 도시에 도착한 후,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가로 스며든다.
그 직후 눈 깜짝하는 사이에 바로 그곳에서 사라져서는 동쪽으로 내달린다.
이전에도 이용했던 적이 있는 루트를 통해서,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간다.
클라우스가 가고자 하는 곳은 마족들의 영토인 대륙 동부의 한 귀족 영지.
딱히 실력이 강한 영주가 있는 곳도 아니고 엄청나게 부유하거나 땅이 넓지도 않다.
그러면 도대체 뭐 때문에 그곳으로 향하느냐, 클라우스는 그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쓸데없이 인맥 넓고 혀만 살아서는 아첨을 잘 하는 놈이 살고 있다고.
그놈한테 받아먹은 게 하도 많아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마족이 있다고.
가용 가능한 스킬들을 모조리 동원해서 단시간 내에 동부로 진입한다.
당장 어제 밤까지 율리아와 절정의 시간을 보냈던 터라 몸이 상당히 피곤하다.
만약 불굴 스킬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불가능한 길이 되었을 터.
클라우스는 최대한 체력 분배를 잘 해서 바쁘게 발을 놀렸다.
도중에 발각 위험도 있었고 체력이 한계까지 몰려서 부득이 쉬어야 하기도 했다.
정말 만에 하나 자신의 잠입이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 추적대가 붙을 것이다.
마족 추격대가 얼마나 끈질기고 또 유능한지 아주 잘 알고 있는 클라우스로서는 이길 수는 있어도 되도록 부딪치기 싫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의 다 왔군.’
그래도 기어코 자신이 생각했던 곳까지 다다르고 마는 클라우스였다.
저 멀리 보이는 성을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속도를 멈추고 대신 은밀함을 높였다.
암행 스킬은 주변이 어두울 때 써야 최고의 효율이 나오기에 지금은 적절치 않다.
기척을 죽이는 거야 수도 없이 해본 일이니 어려울 게 없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대한 긴장을 해서 몸을 움직인다.
클라우스가 당도한 곳은 어느 마족 귀족의 영지로, 율리아의 숙부를 지지하는 자였다.
심지어 그 지지 세력들 중에서 꽤나 높은 인지도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미 말했듯이 실력이 좋은 이도 아니고 영지가 부유한 것도 아니다.
딱히 특출한 것이 없음에도 그가 그런 인지도를 가지게 된 것은 역시나 그의 화술 덕분.
여태까지 그의 화술을 이용해서 재미를 좀 보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 양날의 검에 율리아를 몰아내려는 자들이 베일 차례였다.
최대한 은밀하게 이동한 후, 이제 막 경작을 시작한 농토 옆의 산에 불을 지른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우물 안에 역한 것들을 풀고, 뭔가 수상쩍은 일들이 일어나려고 했었음을 보여주는 것들도 잔뜩 만들어준다.
그렇게 한참 그 일에 열중하던 클라우스는 마침내 영지민들이 반응했음을 알아차린다.
지체 없이 하던 일을 ‘급하게’ 멈춘 티를 낸 후 이쪽의 흔적을 어떻게든 지우려고 했던 부분들까지 전부 만들어둔 후 바로 자리를 뜬다.
평화롭던 영지에 일대 소란이 들이닥친다.
갑작스러운 일들을 대충 해결하고 나자 당장 영주성은 이번 일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베드르 영주님. 아무래도 파인 놈들이 벌인 짓 같습니다.”
“말조심하시오. 증거도 없이 영주님께 그런 말씀을 드리다니.”
“이렇게 대놓고 우리들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일 놈들이 그들 말고 또 누가 있소.”
“맞는 말이긴 합니다. 자신들의 흔적을 깔끔하게 지우지는 못 했지만 증거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은 철저하게 지워냈습니다.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닙니다, 베드르 영주님.”
가신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베드르는 이를 갈았다.
자신의 바로 옆 영지에 이웃하고 있는 파인 영주.
율리아의 숙부를 지지하는 자신과는 달리 중립의 자리를 표명하는 자였는데 오래 전부터 자신과 그는 꽤나 질긴 악연으로 이어진 사이였다.
매일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으나 그래도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참고 있었다.
그건 파인도 마찬가지였기에 둘은 원치 않는 평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상황이 바뀌었지.’
중립파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이내 분열이 시작되었다.
누구는 마왕을 지지해야 한다고 하고, 또 누구는 마왕의 숙부를 지지하자고 하고.
오직 극소수만의 인원이 계속해서 중립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외칠 뿐이었다.
마왕에 대한 충성파가 힘을 거의 잃은 상황에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던 두 세력. 역성 혁명파와 중립파.
그런 와중에 갑자기 중립파가 이리 흔들리니 자연스레 정국도 뒤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파인 놈이 마왕을 지지하려고 판을 짜는 건가? 이렇게 무리수를 던지면서?’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이간질을 하려는 누군가가 꾸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 동부의 상황은더는 혼란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는 상황.
당장 자신과 연이 있는 자들도 모이기만 하면 현재의 정세에 논하면서 그저 연약하기만 한 줄 알았던 마왕이 알고 보니 뭔가를 숨기고 있는 이는 아니냐고 소곤거리고 있었다.
바람 한 줄기가 큰 태풍으로 변해서 세력을 흔들 수도 있는 상황.
바로 그런 때에 이런 도발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있었다.
오히려 베드르 본인에게는 좋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웃 영지에게 공격을 받았고 완벽한 명분이 생겼다.
혹 서로 부딪쳐서 자멸하거나 완전히 이탈할까 걱정하던 이 상황에서 자신이 속한 역성 파벌에 조금 더 강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그런 명분 말이다.
“지금 당장 다른 분들께 오늘 일을 알리도록 한다. 기어코 저놈들이 일을 벌이려고 한다고 말이야.”
화술이 뛰어나고, 그래서 인맥이 넓은 남자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만심이 강하고 허영심도 그 못지않게 많은 자임을 알고 있다.
해서 클라우스는 베드르가 더 자세한 조사를 하기 보다는 아예 이참에 오늘 일을 트집 잡아 중립파들을 완전히 찢어버려서는 그 일부를 역성 혁명 파벌 쪽으로 끌어들이자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일들이 진행되었고 말이다.
‘원래는 통할 수가 없는 전략이지만, 얼마 전부터 정세가 너무 흔들렸으니까. 위기는 곧 기회라고 판단하고 그걸 덥석 문 거지.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걸 벌였는지는 제대로 파악도 해보지 않고 말이야.’
물론 베드르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설마 웬 인간 남자가 경계를 뚫고 여기까지 와서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자신은 그저 역성 혁명 파벌 쪽에 명분을 주기 위해서 이번 일을 공론화한 것인데.
그게 역으로 마왕가 쪽에 힘을 실어주는 일로 번질 줄은 상상도 못 할 테니까 말이다.
“명분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되는 법이지.”
멀리 어딘가로 달려가는 파발마들을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난장판일수록 명분은 더더욱 중요한 법이다.
권력 투쟁 속에서 명분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아군을 끌어 모으는 구심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적들이 모이지 못 하게 만드는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다들 명분, 명분,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하다못해 뒷골목의 양아치들조차 허접한 것이라도 명분을 찾아서 일들을 벌인다.
어떤 누구한테 우리 막내가 맞았다더라, 하는 게 단순한 시비가 아니라 명분이 되는 거다.
우리가 공격을 당했으니 반격을 하는 건 당연한 거다.
그 생각만으로도 결속력이 강해지고 이탈자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공격을 했으니 얻어맞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 라는 생각이 들면.
과연 그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던 이들이 진심을 다해서 도우겠는가?
괜히 휘말려서 손해를 볼 바에 나는 빠져있겠다고 중얼거리면서 간이나 보고 있을 것이다.
‘역성혁명을 꿈꾸는 놈들과 아직도 헤매는 중립파들의 갈등이 극에 달해야 한다. 그 와중에 자신들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혁명 파벌 놈들이 영지전을 일으키게 해야지. 왕가의 명령에 따라 한동안 금지되었던 그 영지전을 말이야.’
율리아를 견제하고 있어서 마족 귀족들이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결국 자신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그 마족도 마왕의 자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가면 왕권을 약화하는 데에 앞장섰던 자들이 숙청 1호라는 걸 모르고 있다.
허나 그걸 알기에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너무 많이 모였다.
클라우스는 바로 그 부분을 흔들어서 실컷 이용해볼 생각이었다.
내가 상대와 물어뜯으면서 싸우는 것보다, 다른 이와 물어뜯고 싸우는 적을 바라보는 게 훨씬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