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10장 - 흐르는 시간들
한 주의 마무리를 하는 시간, 주말.
아카데미의 생도들에게는 어쩌면 평일의 강의 때보다도 중요한 때라고 할 수 있었다.
주말에는 그들에게 따로 강요되는 부분들이 없기에 평소보다 훨씬 자유롭다.
아카데미가 허락하는 선에서 지인들을 만날 수도 있고 외출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역시나 사교 모임.
서로의 사회에서 잘 나간다는 이들이 전부 모였으니 이번 기회에 자신의 경쟁자, 혹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는 이들에게 자신들을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그런 사교 모임에는 교수들도 은근히 많이 참여한다.
교수로서 가는 게 아니라 나중의 실권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얼굴을 비추려는 목적으로.
지금이야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그들 역시 거의 전원이 중간층이다.
진짜 의미의 ‘갑’ 은 바로 자신들이 가르치고 있는 생도들.
때문에 아예 빠르게 눈도장을 찍어두고 친분을 쌓아두려는 목적이 매우 강했다.
“하아아앗!!”
하지만 그 중에도 예외가 있는 법이고 그 예외는 역시나 클라우스.
딱히 의미도 없는 사교 모임에 갈 필요도, 그리고 이유도 없었던 그는.
카엘라와 한창 합을 겨루면서 공방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앗! 핫!”
이번에는 생도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실전와 같은 것이 아닌 단순한 대련.
때문에 카엘라는 손톱을 빼어든 지 않은 채 다만 주먹과 발로 클라우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일격 하나, 하나가 살벌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부웅! 웅!-
겉보기에는 그냥 미녀 한 명이 내지르는 지극히 가녀린 손짓 같은데.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무슨 거대한 둔기가 휘둘러지는 것 마냥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다.
속도도 속도지만 카엘라의 주먹이 휘둘러 질 때마다 그 괴력이 다 느껴진다.
누가 호랑이 수인 아니랄까봐 그 힘이 정말 대단하다 싶었다.
때문에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무기가 없는 카엘라를 상대로 목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바위도 맨 손으로 후려치는 수인이 목검 따위는 당연히 막아내고 맞받아칠 수도 있다.
물론 마력을 두른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거기까지 나아갈 단계는 아니니 패스.
“읏?!”
한창 공방이 이어지던 가운데 클라우스가 슬쩍 허수를 날린다.
당연히 그 허수가 진짜 허수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카엘라는 그걸 정면으로 받아치려고 와락 클라우스에게로 날아들었다.
어서 그 뒤에 숨기고 있는 진짜 공격을 자신에게 보여 달라는 듯이.
하지만 클라우스는 그런 카엘라의 속마음 따위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당연히 허수인 줄 알았는데, 몸의 위치도 전혀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카엘라는 속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그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약점을 잡은 클라우스는 빈틈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꺄악!”
결국 검의 손잡이 부분에 어깨를 가격당한 후 그의 발차기에 배를 정통으로 맞은 카엘라.
대련이라고는 해도 결코 과정이 약한 것이 아니었기에 충격이 꽤나 클 수밖에 없었다.
“콜록, 콜록!”
대련장 바닥을 몇 번 구르던 카엘라가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해낸다.
다른 여인이었다면 슬쩍 다가가서 괜찮냐고 묻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엘라 같은 경우에는 일단 ‘싸움’ 이라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승리는 승리고, 패배는 패배다.
승자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 따위는 없고 다만 패자만이 모든 걸 잃을 뿐이다.
오히려 수인들은 쓸데없는 자비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만큼 그녀가 스스로 일어서기까지 그냥 보고 있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날카로우시네요. 여태 몇 번씩 꼬아서 행동하시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하실 줄은 몰랐어요.”
“가끔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편이 더 잘 먹히기도 하지. 특히 카엘라, 너와 같이 싸움에 통달한 이들을 상대할 때는 더더욱 그래.”
“명심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쉽게 져드리지 않을 겁니다.”
“고생했다, 카엘라 조교.”
“고생 많으셨습니다, 클라우스 교수님.”
패자가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가 고생했다며 모든 게 끝난다.
이제부터는 전사 카엘라가 아닌 여인으로서 대해도 좋을 때다.
“괜찮냐?”
“예?”
“배 말이다. 습관적으로 너무 세게 친 것 같아서 조금 놀랐다.”
“아뇨!? 오히려 예전보다 너무 약해지신 것 같아 걱정입니다. 혹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예전에는 더 아팠었나?”
“네. 당장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엄청 아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당시에 심신 단련 목적으로 빡쎄게 굴리기는 했다.
처음에는 자존심 높은 호랑이 수인이기에, 꽤나 반발하던 카엘라였지만.
너보다 내가 훨씬 더 강하다, 우위에 있다, 라는 부분을 강조해주니 금방 기세를 거두고는 클라우스를 제 서열 위로 인정하고서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율리아 생도와 나타샤 생도, 세실리 생도와 저녁 식사를 했었습니다.”
“나 빼고?”
일부러 장난기가 생겨서 짐짓 놀란 표정과 목소리를 해 보인다.
그러자 카엘라는 화들짝 놀라서는 살랑거리던 꼬리까지 딱 멈춘 채로 불안한 눈빛을 하고서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호, 혹시 불쾌하셨나요? 그러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장난이다.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 안 해도 돼.”
웃으면서 그렇게 말한 후 한껏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린다.
원래의 여인들이었다면 머리 다 망가진다면서 싫어할 짓이지만.
카엘라는 그저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또 골골송을 부르면서 더 만져달라는 듯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되어서는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데 보고를 하려고?”
“클라우스 사령… 그러니까, 교수님이 사령관 자리에 있을 때의 이야기들을 다들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다들 아주 반짝반짝 하시더라고요.”
“마족이 둘이나 있는데 그런 기대를 보였다고? 예상외인데.”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오히려 마족들에게 교수님이 선망의 대상일 겁니다. 강하고, 패배한 적 없고, 인간이지만 인간답지 않으신 면모가 있으시니까요.”
아첨이 아닌 걸 뻔히 아는데도, 카엘라는 진심으로 그리 대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왜 자꾸 저 말이 듣기 좋으라는 말로 들리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아무튼 대련 고생했고, 내가 아까 한 말 잊지 않았겠지?”
“이번 주말에는 교수님을 찾지 말라는 명령, 확실하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 이번 주말 동안에는 네가 나타샤와 세실리 좀 봐주도록 해. 다들 내가 유심히 보고 있는 녀석들인데 하루 쉬는 게 오히려 그 여인들한테는 치명적이야.”
“클라우스 교수님께서 신경을 쓰라 하셨으니 응당 그리할 겁니다.”
“…물어봐도 된다, 카엘라.”
“예?”
“무슨 이유로 이번 주말에 나를 찾지 말라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할 텐데?”
뜬금없이 주말에 자신을 찾지 말라는 명령.
카엘라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현재 조교의 위치에서 있으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교수에게 보고를 할 수도 있는 일이고.
클라우스 본인은 사령관 자리 내려놓은 지 몇 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카엘라는 여전히 스스로를 그의 부관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자리를 비우는 이유 정도는 알아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카엘라는 그냥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물어보지도, 하다못해 궁금해 하는 느낌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 부분을 클라우스가 묻자 카엘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교수님께서 다 생각이 있고, 또한 계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간단하게 알려주마, 카엘라.”
해서 클라우스는 일단 큰 그림이라도 보여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왕 말할 거, 카엘라도 무척 흥분되는 방향으로.
“보금자리를 새로 찾는 거다. 너, 그리고 내가 지낼 새로운 보금자리.”
* * * * * * * * * *
방으로 들어온 후 샤워를 하고서 책상 앞에 앉는다.
잠시 다음 주에 있을 중간시험에 대한 부분들을 확인하던 그는, 그걸 옆으로 치워두고 항상 제 품에 간직하고 있거나 비밀 장소에 두는 수첩을 꺼내 내용을 확인해나갔다.
‘이번 학기가 끝나고 방학 안에 모든 걸 끝내는 게 베스트군. 일단 나타샤는 이번 주 주말을 이용해서 은밀히 은광 개발 쪽에 자금을 넣어보라는 서신을 보낼 테고, 세실리는 잔뜩 혼나고 싶다고 카엘라를 괴롭히겠군. 그리고 율리아는….’
탁탁 책상을 두드리던 클라우스는 수첩을 갈무리하고는 의자에 기대어 앉는다.
그 멍청한 인간들, 그리고 서부 연합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친 회차를 제외하고.
그것들 외에 다른 경우의 수를 얻어내기 위해서 또 지랄들을 했던 것까지 제외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진행했던 회치만 두 자리수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겹기도 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다.
이래나 저래나 결국 이 세상에서 탈출하지 못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뭐 그리 열심히도 발버둥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대륙 최고의 여인이라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하고.
손짓 한 번 그리고 말 한 마디에 그녀들을 움직이며 진정한 실세로 살아갈 때.
정말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지기도 했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는 말을 말도 안 되는 좆같은 소리라고 했었지만.
정말로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니 즐기는 법을 터득한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 속 세상을 즐기는 부분 중에는, 역시나 지금 오고 있을 여인과 연관이 있는 부분이 아주 많다고 할 수 있었다.
똑똑똑-.
저번에는 대놓고 그냥 휙, 하고 들어오더니.
오늘은 또 무슨 컨셉인지 노크를 하고서 얌전히 문 밖에서 기다리는 율리아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문을 열어주니 그 너머에 서있던 절세미녀가 우아한 동작으로 인사를 하고는 붉은 입술을 뗀다.
“안녕하세요, 클라우스 사령관님.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교수님이 아니라, 사령관님이다.
이런 컨셉이 몇 개 있었는데 또 은근히 헛갈린다.
지금 이게 정확히 뭘 노리는 마왕님의 자세였더라.
“차? 아니면 커피? 뭐로 줄까요.”
“오늘은 그냥 물 한 잔만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율리아의 대답에 바로 물 한 잔을 내어준다.
그걸 얌전히 받아 마신 여인은 갑자기 손목을 기울이고는 혀를 내밀고서 갑자기 날름날름대면서 뭔가를 따라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아, 그거구나.’
비로소 생각이 났는지 클라우스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확실히 귀엽기는 한 컨셉인데, 뭔가 심히 어울리지 않아서 이상한 그거이지 않은가.
“어제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었어요. 당신에 관한 이야기였죠.”
“그런가요? 카엘라한테 들은 것 같기도 하군요.”
“네, 맞아요. 카엘라. 당신의 부관. 당신의 고양이.”
“호랑이입니다.”
“뭐 어때요. 결국 당신 앞에서는 고양이인데.그보다 고양이를 좋아하나 봐요?”
“네. 좋아합니다.”
클라우스가 바로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해주니 율리아가 싱긋 미소를 짓는다.
그러더니 또 한 번 손목을 구부리고는 혀를 날름거리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한다.
“야옹.”
고양이 소리인지, 아니면 유혹하는 여인의 소리인지.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본다.
“고양이 좋아한다면서요. 그래서 전장에서도 그 큰 고양이를 데리고 있던 것 같은데요, 클라우스 사령관님. 전 어떤가요? 저도 오늘 하루는 고양이가 된다고 하면, 당신의 모든 걸 다 알려줄 건가요?”
그리 말한 율리아가 다시 한 번 냐오옹, 하고 소리를 낸다.
아마 이 모습을 카엘라가 본다면 ‘저는 그런 소리 안 내요!!’ 라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나는 말 잘 듣는 고양이가 좋습니다.”
“야오옹~?”
“일단 팬티만 벗고 이리 올라와보세요.”
그러자 율리아는 입 꼬리를 올리고는 바로 제 팬티를 벗어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팬티를 제 입에 앙 하고 물고서는 슬쩍 클라우스에게로 다가온다.
시작부터 요망함을 단 일말도 감추지 않는 마왕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