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9화 〉10장 - 흐르는 시간들 (129/341)



〈 129화 〉10장 - 흐르는 시간들

“그래, 아카데미 생활은 어떤가. 자네 취향에 맞나?”
“어떻게든 꼬투리 잡으려고 난리를 치는 귀족들이 없어서 살만 하더군요.”
“아하하하!”
“물론 총장님과 같은 분은 제외고요. 아아, 다넬 녀석도 제외려나.”
“인간들이 점한 이 땅에서 키엔마이어 후작을 그렇게 부르는 평민은 자네가 유일할 거야.”



루스칼 총장은 너스레를 떨면서 그렇게 답했다.
키엔마이어 후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귀족은 물론이고 평민들도 안다.
다른 머저리 등신 같은 귀족들과는 달리 전장에 나서서 직접 싸우고  승리를 쟁취한 정말  안 되는 진정한 귀족 가문.

때문에 평민들도 그 키엔마이어 후작 가문만큼은 함부로 욕하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일대의 평민들은 후작가를 능멸하는 자가 있다면 직접 나서서 혼쭐을 낼 정도.

그런 마당에 그 키엔마이어 후작의 이름을 막 부를 수 있는 이는.
아마도 그가 제 친우로 인정한 클라우스만이 유일할 것이다.

“벌써 중간시험 때가 다가오는군.”
“그렇군요.”
“딱히 성적에 미련을 가지지 않던 생도들조차 민감해지는 시기야.”
“당연히 그렇겠죠. 요정으로서 마족한테 밀리면 치욕스러운 것이고 귀족인데 다른 놈들한테 탈탈 털리면 당장 제 부모에게 혼이 날 테니 말입니다.”
“극성스러운 젊은이는 대게 그 극성스러운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가 많지. 아닌 경우도 있다지만 대부분이 그러해. 해서 교수들 대부분은 그냥 합격과 불합격으로 기준을 나누고 시험을 진행하려는 것 같네.”




루스칼 총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물끄러미 클라우스를 쳐다본다.
이유를 알고 있는 클라우스는 딱히  다른 대답 없이 그냥 커피만 홀짝일 뿐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결국 참다  한 총장이 슬그머니 입을 연다.
그는 클라우스가 내민 전투 마법 강의의 시험 방식 및 결과 발표를 둔 서류를 가리키면서 침음을 한 번 내뱉는다.



“일일이 순위를 매겨서 최상부터 최하까지 전부 나열할 필요가 있냔 말일세.”
“꼭 그럴 필요는 없겠죠.”
“그러면….”
“하지만 원래 그 강의의 시험 성적에 대한 부분은 교수의 재량껏 결정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총장님.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면 그냥 성적순으로 해서 1등부터 꼴찌까지 전부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클라우스의 대답에 루스칼 총장은 다시 한 번 침음을 내뱉는다.
그를 잘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에 더는 설득도 되지 않는다는  안다.
여기서  설득을 하려고 해봤자 귀족 귀에 평민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과 비슷할 거다.
한숨을 쉰 총장은  부분에 대해서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듯 차를 홀짝거린다.


“시험 때가 다가오니 슬슬 귀족들이 들러붙는 모양이군요. 아, 그들만이 아닌가? 요정 쪽에서도, 수인 쪽에서도, 하다못해 마족 측에서도 자꾸 사람을 보내서 망신당하지 않게 도와달라, 내지는 그런 일 없도록 주의해라. 이러 식으로 압박을 넣으려나요.”
“크흠.”
“이럴  보면 참 대륙 아카데미도 별 다른 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겉만 보면 참으로 대단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대륙 곳곳의 잘 나가는 자제들이 한 곳에 모여서 가르침을 받고 서로 알아가는 배움의 장.
여기까지는 낭만 아카데미 그 자체라고 볼 수 있겠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종족끼리, 그리고 같은 종족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는 견제를 하고 있음을.
마치 미래를 대비하는 젊은이들의 정치 싸움 예고편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 부분은 걱정 말게. 내가 확실하게 대답을 해두었으니까.”
“뭐라고 말입니까?”
“여기 들어오는 모든 자제들은 그 순간부터 아카데미의 생도로서 여기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들 맹세했으니  제 자식의 맹세를 더럽히려는  아니라면 그런 짓들 하지 말라고.”
“꽤나 날카롭게 대하셨군요. 그들 표정이 딱 상상이 가는데요.”
“어쩌겠나? 나를 총장 자리에 앉혀둔 게 바로 그들인데.”




루스칼 총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 귀족 가문의 출신이지만 꽉 막힌 귀족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커먼 속내를 지닌 귀족들과는 다른 남자이기에 클라우스도 좋게 평하는 남자.
당장 아카데미를 몰래 찾은 이들에게 저렇게 말하는 것도 꽤나 큰 용기와 결단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교수들도 과연 총장과 비슷한 생각이느냐. 그게 문제겠지.’


총장이 설득이 안 되면 그냥 교수들을 직접 설득하면 그만이다.
외부와 되도록 접점을 두지 않는 아카데미이지만 아예 꽉 막히거나 단절되지는 않았다.
충분히 안으로 서신을 보내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서 교수들을 설득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은근히 압박을, 아니면 대놓고 협박이라도 한다던가.



“클라우스 교수.”
“네, 총장님.”
“일단 이건 단순한 의도의 질문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네. 다른 뜻은 없어.”
“무슨 질문을 하실 생각이기에 그렇게 운부터 띄우는지 조금은 걱정이군요.”
“얼마 전부터 아카데미 내부에 묘한 소문이 돌아서 말이야.”


뻔하다. 지금 루스칼 총장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가 과연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하기에 저렇게 말부터 하는지 말이다.

“자네, 최근 들어서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과 꽤나 친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던데.”
“….”
“당장 마족 생도들이 주관했던 무도회에서도 그렇고 가끔 보면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을 개인적으로 지도해주고 있는 모습도 보이더군.”
“율리아 아그네사 ‘생도’입니다, 총장님. 마왕이 아니고요.”



모든 이들을 생도로 대하기로 했다면서 왜 마왕으로 칭하냐는 질문.
루스칼 총장은 그런 클라우스의 지적에 아아, 하고 탄식을 흘린다.
솔직히 마왕은 나도 아직 적응이 안 되어서 말이야. 라고 중얼거리 루스칼 총장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어간다.

“아무튼 율리아 생도 말일세. 자네와 가까운 사이인 것 같던데.”
“교수와 생도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그게 차라리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물론 그렇지. 당장 교수 알기를 우습게 아는 생도도 있고 대놓고 생도들을 차별하는 교수도 나오고 있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보자면 자네와 같은 경우는 좋은 쪽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묻는 것 아닌가. 둘이 가까운 사이냐고 말이야.”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봐주고 있는 정도입니다. 먼저 다가와서 고개를 숙이고 배움을 청하는 생도는 교수의 입장에서 굉장히 좋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루스칼은 반사적으로 ‘마치 마왕이란 자가 아무에게나 고개를 숙이는 상당히 예의바른 이라고 말하는 것 같군.’ 라며 대답할 뻔 했다.
아무리 상대가 클라우스라고 해도 마왕이 그렇게 친근하게 굴 인물은 결코 아니다.
루스칼 본인도 소식이 들어오는 루트가 있고 그걸 듣는  귀도 아주 잘 뚫려있다.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 엄청난 견제 속에서도 어떻게든 마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마족이다. 다른 자들은 이름만 마왕인 계집이라고 무시하지만 정말 속이 여린 것에 불과했다면 진작 항복을 하고 마왕의 자리를 내놓았겠지.’




그녀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만 몸을 숙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어찌 비칠지 몰라도 최소한 루스칼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아름답더군.”
“예?”
“마왕, 그러니까 율리아 생도 말일세. 다 늙은 내가 봐도  아름다워. 신이 직접 빚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른 인간 귀족들이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만한 말이군요. 인간 귀족이 마족에게 그런 엄청난 칭찬을 한다고 말입니다.”
“거기까지만 놀려먹게. 내가 그 치들과 동급이라니 조금 속상하군.”
“역겨우셨다면 사과드리죠. 루스칼 총장님.”

클라우스의 은근한 어조에 총장은 되었다는  손을 내젓는다.
그리고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난 괜찮다고 생각하네.”
“또 뭐가 말입니까.”
“마왕과 자네의 관계 말이야. 누구는 말도 안 된다고 하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절대 불가능하다고도 하겠지. 마족과 자네의 사이가 얼마나 껄끄러운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총장님?”
“하지만  속에서도 피어나는 게 어쩔 수 없는 마음이란 것이 아니겠나.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한 게 아닐까 싶어. 대륙 전쟁의 상징인 자네와 마족들의 군주인 마왕이 연결된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대륙 평화의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역시 루스칼 총장, 서부와 동부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남자다운 예측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율리아와 클라우스가 확실히 그렇고 그런 사이이긴 하다.

다만 클라우스 쪽은 애당초 그런 좋은 뜻을 품은 게 전혀 아니라는 부분이 다르긴 했지만.

“그런 거 아닙니다.”

클라우스는 일단 단호하게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둘의 사이가 가까운  맞으나 서로가 서로를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중이다.
둘이 부족한 부분이 있고 넘치는 부분도 있으니 그걸 서로 보완하는 것이다.
 설명에 루스칼 총장은 은근한 눈빛을 하고 있다가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이들이 꽤나 많을 걸세. 당장 귀족들도  소식을 듣고서는 얼씨구나, 하고 환호성을 지를 테지.”
“아직도 저를 물어뜯고 싶어 한다니 참으로 황송하군요.”
“여전히 그대는 대륙 전쟁의 영웅이니까. 그리고 평민들의 우상이니까 말일세. 어떻게든 뭔가를 이용해 깎아내리지 않으면 불안해서는 견딜 수가 없겠지.”
“아무 짓도 할 수가 없는 아카데미에 스스로 갇혀주었는데 뭐가 그리 걱정인 건지.”
“자네도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겪어봐서 잘 알지 않는가. 권력을 쥐고 있는 이는….”
“항상 최악을 가정하면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네, 아주 잘 알고 있지요.”


그거 때문에 참 지겹게도 당해오지 않았던가.
루스칼에게는 10년이 넘는 세월이겠지만, 클라우스에게는 못 해도  백 년은 되었다.
참고 참고  참으면서 넘어가주려고 해도 결국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냥 다 뒈지라는 심정으로 마족 쪽에 붙는 게 아니겠는가.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군요.”
“아아, 그렇군. 한창 바쁜 때에 이렇게 불러서 너무 오래 앉혀두었어. 미안하네.”
“아닙니다. 꽤나  좋은 커피 얻어먹었으니까요. 이제는 힘도 없는 대륙 전쟁의 망령 하나 봐주신다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루스칼 총장님.”
“알면 잘하게. 자네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제 그만 좀 듣고 싶어!”

총장의 외침에 클라우스는 노력해보겠다는 뜻으로 미소를 짓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총장실을 나선다.
이제는 텅 빈 그의 자리를 쳐다보던 루스칼 총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왕과 너무 가까워. 마족들과 너무 친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인단 말일세, 이 사람아. 내가 어떻게든 막아내고는 있지만 결국 귀족들도 언젠가는 다 알게 될 터인데. 그걸 어찌 하려고 그리 대놓고 움직인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건지 원….”




잔들을 치우면서 루스칼 총장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신 입장에서는 마족과 인간 측의 관계 개선을 도모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일이라고 하지만.
귀족들 입장에서는 그렇게도 원하고 원하던 클라우스의 명성을 깎아먹는 데에 최고로 좋은 건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생각을 하면서 루스칼 총장이 걱정이라는  한숨을 내뱉지만 정작 클라우스는.




‘귀족 놈들이 지껄이든 짖어대든 이제는 상관없다. 오히려 그놈들 때문이라도 더 빨리 이 똥통을 빠져나갈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거잖아?’



자신은 그냥 우수한 생도에게 관심을 조금 더 쏟은 것뿐인데 자꾸 이상하게 몰아간다.
그래서 더는 서부에 발을 붙일 곳이 없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족들에게 귀의한다.
이게 바로 귀족들, 너희가 함부로 떠들고 다닌 결과라는 거다! 라고 말이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말든 이제 클라우스는 신경을 끌 생각이었다.
더는 여기서 스스로를 감추고 낮추면서 지낼 이유가 없으니까.
이런 모욕 속에서 굳건히 버티는 남부 사령관 클라우스는 더 필요가 없으니까!



“오늘은 누구를 불러야 하나….”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면서, 골똘히 생각을 해본다.
잠시 갈등하던 남자는  결심을 내렸다는  어디론가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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