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7화 〉10장 - 흐르는 시간들 (127/341)



〈 127화 〉10장 - 흐르는 시간들

“….”
“….”




아카데미 안에 마련된 넓은 대련장.
그 안에서  여인이 서로를 마주본  닿으면 베일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고 있다.

 명은 동부 마족의 군주,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
그녀를 대하는 다른  쪽은 서쪽 요정의 유력한 가문, 벨라루스의 나타샤.
이번에 전투 마법 강의에서 추가 점수를, 그리고 또 다른 뭔가를 걸고 싸우는 여인들이었다.



“후회 없는 싸움이 되기를 바라겠어요, 나타샤.”
“…그쪽도요. 율리아.”




괜히 험한 말을 하거나 씩씩거리면서 힘을 빼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처음 만남 때처럼 으르렁거리거나 대놓고 적의를 불태우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서로가 서로의 기세를 살피면서 그 사이에 얼마나 성장했을지 확인할 뿐이다.

“율리아 생도. 그리고 나타샤 생도. 준비가 되었다면 시작해도 좋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카엘라가 뒤로 물러선다.
뒤를 이어서 생도들도 최대한 거리를 두고서 대련장 한가운데에   여인을 바라본다.
 강의를 듣는 이들 중에서 무력으로는 1, 2위를 다투는 이들이다.
자칫 휘말렸다가는 어디 몇 곳 다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찌  것 같습니까, 클라우스 교수님.”
“글쎄다.”



율리아와 나타샤에게 시선을 꽂고 있는 카엘라와는 달리.
클라우스는 딱히 크게 관심이 없다는 듯 책 하나를 읽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읽는 책의 제목은 ‘대륙 전쟁, 영광스러운 항전.’ 이었는데 동부의 마족들이 비겁하게 기습을 하여 패퇴 직전까지 몰렸던 전쟁을 서부가 잘 연합해서 결국 막아냈다는 식으로 써둔.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불쏘시개  이상  이하도 아닌 책이었다.

가장 웃긴 부분은 서부 연합에서 인간들의 활약상을 적어둔 곳.
정확히는 존재하지도 않은 인간 귀족들의 활약을 아주 상세하게 써둔 부분이었다.
순수하게 평민들이 저항하여 마족들을 몰아낸 소규모 전투를 귀족이 지휘했다지 않나.
제대로 된 지원 한 번 받아본  없는 남부에 위험을 무릅쓰고 지원을 했다지 않나.
심지어 명백한 패배를 중과부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운 영웅적인 전투로 적어놓기까지.




‘더 큰 문제는 이 불쏘시개가 왕국 귀족들에게는 거의 필수 도서라는 거지. 염병할.’

전쟁이 끝난지 500년이 지났나, 아니면 50년이 지났나.
이제 고작 5년이 지났을 뿐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자들 대부분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대놓고 말도 안 되는 조작질이라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클라우스 교수님.  부딪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율리아가 먼저 움직일 거다, 카엘라.”
“에? 나타샤 생도가 아니고 말입니까?”
“그래. 나타샤가 아니라 율리아가 먼저 움직인다. 그것도 마법을 이용한 공격이 아니라 바로 검을 들고서 직접 부딪칠 거다.”


확신 수준이 아니라 거의 선언을 하는 클라우스.
 모습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카엘라는 슬쩍 고개를 돌려서  둘을 확인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클라우스의 말은 곧 사실임이 밝혀졌다.


“어.”



카엘라는 물론이고 가장 흥미진진할 대련을 살피던 이들도 모두가 탄식을 흘린다.
당연히 먼저 공격을 할  알았던 나타샤가 아니라 율리아가 먼저 검을 들고서 상대방에게로 날아간 것이다.


심지어 나타샤조차 율리아가 선공을, 그것도 마법이 아니라 검으로 들어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 했는지 얼굴에 조금은 당황한 빛을 띤다.
하지만 곧 그녀는 살짝 뒤로 발을 떼면서 무섭게 날아든 율리아의 공격을 막아냈다.

따악!-


아마 서로 들고 있는 것이 진짜 검과 창이었다면 다른 소리가 났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지금보다도 더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거나.
역으로 더욱 과감하게 공격을 날릴 수도 있음이었다.



“흣!”



한 번 거리를 좁히자 율리아는  이상 거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공격을 퍼부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전투 마법 강의에서 근접 전투가 떨어지는 생도들은 율리아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하고 놓쳐버릴 정도였다.



“클라우스 교수님. 저기 마왕. 그러니까 율리아 생도 말입니다. 혹시 실전 경험이 있나요?”
“내가 알기로는 없다. 전장에 나선 적도 없지.  그런 질문을 하지, 카엘라?”
“…동작이 너무 간결해서요. 보여주기 식으로 몇 번 휘두른 솜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율리아 딴에는 정말 엄청나게 노력했으니까.”
“아무래도 그 수준을 벗어난 것 같습니다. 클라우스 교수님께서도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느끼고 있고말고. 율리아는 어쩔 수 없는 사기 캐릭터라는 것을.
하나를 알려주면 하나를 아는 게 당연한 것.
하나를 알려주었는데 둘을 안다면 이미 거기서부터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 가다가 세상에는 하나를 알려줬는데 열을 아는 이가 나올 때가 있다.
그 정도 수준이면 천재라는 말도 부족할 지경이다.
교환비율 성립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하나를 알려줬는데 열을 안다니.


율리아 아그네사,  동부 마족들의 군주.
그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기 캐릭터다.
당장 저기서 보여주고 있는 움직임도 불과 한 두달 전까지는 꿈도 못 꾸던 것들이다.
그런 율리아에게 특훈을 해준 것은 역시나 클라우스.

전장에서 자그마치 7년이나 뒹굴던,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경험과 짬밥.
그걸 거의 통째로 율리아에게 탈탈 털어 넣은 것이었다.


‘내가 설마 율리아 만나면 매일 섹스만 했겠어. 이건 일종의 마왕 키우기 게임이라고.’



처음에는 당연히 헤맸고 갈피를 잡지 못 했다.
마왕가에서 수련 목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정식으로 수련도  율리아이긴 하지만.
그냥 목검  쥐고 검술  번 펼치는 것과 막지 못 하면 죽고 공격하지  하면 내가 당한다는 식의 처절한 혈투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  상황이었다.


클라우스는 바로 그 부분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채워주었다.
어차피 이름만 마왕이라는 부분 때문에 율리아에게 다가오는 이는 하나도 없고.
원래 그녀를 감시해야 하는 임무를  리르는 이미 클라우스가 완전히 조교를 해두었고.
결정적으로 이곳 아카데미에는 클라우스의 감지를 뚫고 몰래 지켜볼 이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된 특훈은 그야말로 율리아를 단순히 검    아는 마왕에서.
이제는 어떻게 빈틈을 만들고 그 찰나의 순간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해야 할지 아는.


 그대로 ‘슈퍼 루키’ 의 탄생으로 이끈 지름길이 되어주었다.




‘나타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난 굳이 가르자면 율리아 코인을 풀 매수한 놈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하나에만 투자해야 한다면 무조건 율리아일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나타샤에게도 섹스를 하면서 선물을 하나 안겨주었다.
특성 개발로 원래는 하위권에서 간신히 바동거려야  마법 운용력을 끌어주지 않았던가.

굳이 따지자면 두 여자 모두에게 선물을 준 것이니 동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그 선물을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맞게 어찌 사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나타샤 생도의 마법 실력이 제가 알던 것과 많이 다른데요.”




조교로 오기  클라우스의 강의를 듣는 생도들에 대해서 조사를 했던 카엘라다.
그 조사에서 나타샤 벨라루스는 근접 전투 능력, 특히 창을 잘 쓴다고 되어 있었지만.
요정으로서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마력 운용 능력이 떨어진다고 되어 있었다.
헌데 그 보고서가 보기 좋게 틀린 것이니 카엘라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원래 다들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잖아. 최소한 비장의 무기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거지.”
“그런 부분들을 용케 속이고서 오늘까지 온 것이군요. 흐음… 나타샤 벨라루스라. 확실히 앞으로 계속 주시를 해야겠습니다.”



말 뿐만이 아니라 미리 들고 온 수첩에 나타샤의 이름을 적고 또 뭔가를 끄적인다.
누가 클라우스의 부관 아니랄까봐 아주 착실한 호랑이다.


퍼엉! 펑!!-
콰지직! 콰직!-

그러는 사이 한창 부딪치던 율리아와 나타샤 사이로 마력들이 펑펑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중간 중간에 공격 마법을 섞어서 빈틈을 만들거나 아예 그로기 상태로 만들려는 모양인 것 같은데, 여기서 놀라운  그 마법 싸움을 나타샤가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동안 마력 운용을 정말 엄청나게 연습했는지  정신없는 와중에도 실수 한 번 하지 않고서 침착하게 율리아의 마법들을 전부 격추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생각했던 생도들의 대련과는 조금 다르군요.”
“넌  생각했는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저 생도들을 맡으시는 교수님께 혹 실례되는 말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애들이 싸우는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해한다. 거의 대부분이 적의를 가진 상대와 제대로 싸워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니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끗발 있다는 곳의 자제들이다.
감히 어떤 이가 그런 이들을 상대로 이빨을 드러내면서 싸우자고 덤비겠는가.
클라우스는 그렇게 답하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책에 두고 있었다.
한창 최고의 부분에 다다른지라 글자들에서 도저히 눈을  수가 없었다.



- 대륙 전쟁에서 귀족과 평민 모두가 온갖 희생을 해가면서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여기서 필자가 아쉬운 것은  모든 공이 한 명에게만 향했다는 것이다.  뒤에는 여러 귀족들의 지원들이 있었음에도 평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웅이 되어 버린 것. 필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




정말 몇 번을 봐도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불쏘시개다.
이런 책을 필수 도서라고,  읽어야 한다고 갖은 지랄을 떠는 귀족들을 생각해본다.
나오는 건 오직 한숨이요, 드는 생각은 하루 빨리 마족 쪽에 붙자는  전부다.



클라우스가 책을 딱 덮는 그 순간에, 마침내 두 여인의 대련도 슬슬 마무리를 향해 간다.

엎치락뒤치락하던 싸움의 향방은 조금씩 율리아에게로 기울고 있는 중이었다.
율리아의 체력과 나타샤의 마력, 둘 중 뭐가 먼저 바닥이 나느냐가 이번 싸움의 관건.
거기에서 결국 승리한 쪽은 그동안 클라우스에게 특훈을 받은 율리아라고 할 수 있었다.

“크읏!”

결국 율리아의 마법을 다 막아내지 못  나타샤가  어깨에 마력 응어리를 허용하고 만다.
다행히 관통상을 입었다거나 골절 같은 중상이 아닌, 단순한 타박상 정도에서 멈출 충격.
하지만 지금과 같은 살벌한 싸움에서는 그런 빈틈이 승패를 결정짓게 된다.


따악!-


율리아는 클라우스에게 배웠던 대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나타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그녀는 크게 검을 휘둘러서 상대방의 창을 하늘 높이 띄운다.
제 무기를 놓치고 뒤로 훌쩍 물러나는 금발의 요정 여인.


이대로 무기 없이 맨손으로 더 전투에 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타샤는 자세를 바로 잡고는 제 앞에 서있는 율리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졌어요. 율리아, 당신의 승리에요.”
“하아, 하아….”


아직은 호흡이 비교적 안정적인 나타샤와는 달리.
율리아의 호흡은 꽤나 거칠어진 상태였다.
조금만  시간을 끌었다면 아마 승기는 역으로 나타샤에게 기울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아직은 나아가야 할 부분이 많군.’


자리에서 일어난 클라우스는 율리아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에 다행이라는 미소를 짓던 율리아는 나타샤를 바라보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면서 멋진 싸움이었다고, 나중에 또 이런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다며 진심을 다해서 나타샤의 실력을 칭찬했다.

“나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나타샤 역시 잔잔한 미소를 짓고는 율리아의 손을 맞잡는다.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종족, 요정과 마족이 보일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하지만.
두 여자 모두 한 인간 남자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후 다른 생도들의 대련들이 지나간다.
클라우스는 그 모습들을 지켜보다가 슬슬 대련장으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잔뜩 혼나기를 원하는 앙큼하고 발칙한 영애를 괴롭히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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