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10장 - 흐르는 시간들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 안.
커다란 탕 안에 두 남녀가 앉아서는 따뜻한 온수 안에서 몸을 녹이는 중이다.
특히 온 몸에 상처가 가득한 남자에게 등을 기대고서 앉아있는 여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를 한가득 입가에 그린 채 장난스럽게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체통을 지키소서, 마왕 전하.”
그런 여인에게 역시나 장난스럽게 말을 거는 클라우스.
율리아는 그 말에 킥킥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서 그대로 끌어당긴다.
직후 고개를 돌려서 그와의 달달한 키스를 나누고서는 기분이 무척 좋다는 듯 기지개를 킨다.
“클라우스. 내가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무엇이죠?”
“내가 이곳 대륙 아카데미에 온 이유, 알고 있나요?”
“말해준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죠.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모르는 게 있을 수밖에 없답니다.”
“도망친 거예요. 뭐 아군을 만들겠다, 혹은 서부의 이들과 화합함으로서 새로운 바람을 대륙에 가져오겠다, 뭐 그런 말을 겉으로 하기는 했지만. 결국 숙부의 손아귀에서 어떻게든 멀어지고자 발버둥을 친 거예요. 이런 내가 참으로 꼴사납지 않나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제 손을 내려다보는 율리아.
절세미녀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서는 그러고 있으니 괜스레 남자까지 기운이 쳐진다.
해서 클라우스는 조금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일부러 엉뚱한 대답을 해주었다.
“글쎄요. 지금의 율리아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렇게 생각이 안 드는데.”
뻔한 칭찬, 뻔한 아첨은 괜한 경계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뻔한 것도 때와 상황에 따라서 마음을 북돋아주는 응원이 될 수도 있다.
당장 지금의 율리아처럼,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우울함으로 작아지고 있는 이 때에 말이다.
“…고마워요.”
조금 전과는 달리 잔잔한 미소를 짓는 율리아.
그런 마왕을 잠시 바라보다 이번에는 클라우스가 먼저 나서서 그녀와 다시금 키스를 나눈다.
서로의 진득한 감정과 뜨거운 숨결이 확 올라오면서 간신히 잠재웠던 욕망이 다시금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게 느껴진다.
입술을 떼니 제 혀로 그 입술을 축이는 율리아가 보인다.
클라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렇게 했음에도 여전히 고픈 모양.
“오늘은 이 정도만 해두죠. 당장 내일 중요한 일정이 있잖아요.”
나름 합리적인 클라우스의 설득에 율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다시금 클라우스에게 등을 기댄 채 욕탕 안에 몸을 담그고 있던 율리아는.
“여기로 오면, 숙부도 최소한의 눈치 정도는 볼 줄 알았어요. 내가 바보였던 거죠. 숙부는, 그 남자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는데 지레짐작을 한 거예요. 멍청하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마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그때 그 인간들에게 몹쓸 꼴을 당했을 거예요. 상상이나 가나요? 대륙 전쟁에서 마족하면 그렇게나 두려움에 떨던 인간들인데. 그 인간 귀족들이 마족들의 군주인 마왕을 윤간했을 수도 있다는 거. 세상이 알면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아마 더욱 철저하게 고립되었을 겁니다. 당신은.”
“네. 그리고 종국에는 숙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다가 결국 그에게 더럽혀지는 여인이 되었겠죠. 외간 남자도 아니고 제 작은 아버지한테 가랑이가 벌려지는 조카라니. 참으로 우습고 또 우스운 일이네요.”
제 숙부만 생각하면 절로 소름이 돋는다는 듯 율리아가 가볍게 몸을 떤다.
그런 여인을 잠시 내려다보던 클라우스는 슬그머니 제 여자를 감싸 안아준다.
“내가 누구인지 알죠, 율리아?”
“…클라우스잖아요. 대륙 전쟁의 영웅. 남부의 악마.”
“그것도 있지만, 더 쉽게 말하자면 지키는 데에는 이골이 난 놈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내 여자고, 또 내 왕이니까. 절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지켜줄 거예요.”
“믿어요. 믿을게요. 당신이 내게 보여준 그 마음만큼, 나도 최선을 다할게요.”
여태껏 클라우스가 준비한 모든 것이 빛을 완벽하게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마음 놓고 기댈 곳 없이 혼자서 외롭고 긴 싸움을 계속 하던 여인.
그런 그녀에게 우연히 날아든 기회는 어느 순간 필연이 되고 운명으로 변했다.
서로가 각각 배신을 당하고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던 상황.
바로 그 타이밍에 아주 깊숙이 파고들어서 마음속에, 그리고 몸에 클라우스라는 인간 남자의 흔적을 아주 꽉 채워두었다.
“당신은 이곳으로 도망쳐왔다고 했죠, 율리아.”
“네. 맞아요.”
“가끔은 그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찾은 어떤 곳이, 혹은 어떤 이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는 법도 있어요. 그런 걸 바로 운명이라고 하고 또 하늘의 뜻이라고 하죠. 당신이 이 아카데미에, 내 옆에 있는 한 숙부라는 작자가 율리아에게 다가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당장 보세요. 원래 당신을 은밀하게, 또 때로는 대놓고 감시하던 눈길이 어느 순간 전부 다 사라지지 않았나요?”
그러자 율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카데미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거의 대놓고 자신을 감시하는 눈길들이 조금만 집중해도 느껴졌는데 그게 어느 순간 전부 다 사라졌다.
“당신.”
율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클라우스가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 자신 말고 또 누가 이 아카데미에서 당신을 챙기겠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만난 지 두 달도 채 안 되었는데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요.”
“그렇게 느껴지나요?”
“네. 이런 말 솔직히 조금 우습다는 거 인정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당신이란 남자가 오직 나를 위해서 하늘이 내려준 그런 존재 같다고 해야 할까.”
우습지 않다, 오히려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기에 뜨끔했을 정도다.
하늘, 곧 창조주가 오직 율리아만을 노리고서 클라우스라는 인물을 만들었으니까.
그 캐릭터에 들어가서 대륙 최고의 여인이라는 그녀를 꽉 쥐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보다, 내일 자신 있나요?”
“설마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렇진 않지만, 상대를 너무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요.”
“….”
“나타샤의 마법 실력은 여전히 중위권에 간신히 걸치고 있다고 하지만 전투 부분은 이야기가 전혀 달라요, 율리아. 그녀가 진심을 다한다면 카엘라조차 상처 없이 제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말이죠.”
카엘라의 전투에 대한 실력이나 감각, 센스는 이미 율리아도 인정한다.
당장 클라우스와 목숨을 건 혈전을 눈앞에서 본 생도니까.
그런 카엘라가 상처 없이는 제압하는 게 힘들 정도라면 확실히 율리아가 강적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시간이 벌써 많이도 지났지.’
이전에 말했던 한 달 후, 같은 상대와의 대련.
거기에서 승자에게 추가 점수를 주겠다 했던 날이 당장 내일로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율리아의 상대는 근접 전투 부분에 있어서는 생도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나타샤 벨라루스.
심지어 나타샤는 클라우스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율리아에게서 그를 조금이나마 되찾기 위해 두문불출하면서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천재 중의 천재, 사기 캐릭터 중의 사기 캐릭터린 율리아라고 해도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율리아가 너무 규격 외의 사기 캐릭터여서 그렇지 나타샤도 평균은 훨씬 뛰어넘는 괴물 중 하나였다.
“클라우스가 보기에는 어떨 것 같나요? 뻔한 대답 말고 전투 마법 강의의 교수로서. 그리고 대륙 전쟁의 참전자이자 생환자로서 대답해줬으면 좋겠어요.”
“흠.”
율리아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잠시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보였다.
수도 없이 했던 대답이라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최고의 대답을 내뱉을 수도 있지만 일단 고민을 하는 모습은 보이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투 마법 강의의 교수로서, 그리고 대륙 전쟁의 참전자이자 생환자로서 답한다면 그래도 율리아가 조금 더 유리하지 않을까 싶네요.”
“역시 마법에서의 우위가 가장 큰가요?”
“네. 대규모 난전이 아닌 이상 1:1 싸움에서는 마법의 격차가 나면 어지간해서는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승부가 나게 되어 있어요. 미처 막을 수 없는 공격들의 사각지대를 마법으로 커버하고 적의 방어를 무시하고서 일격을 넣을 수도 있으니까요.”
“….”
“물론, 그런 부분 속에서도 예외는 항상 있는 법이죠. 당장 카엘라도 마법 부분은 그리 특출하지 않음에도 실력은 어지간한 전투 마법의 달인들보다도 더 뛰어나니까요.”
클라우스의 대답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검술에 대해서 본인이 생각해도 나름 괜찮다고 여기는 그녀였지만.
나타샤가 선보이는 창 앞에서는 지금의 율리아로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과하게 긴장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한 경계는 필수일 겁니다. 나타샤 벨라루스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요정이에요. 다른 요정들처럼 너무 과하지도 않고 딱 적당한 선을 알고 있기에 그만큼 또 무서운 상대이기도 하죠. 아, 물론 율리아에 비하면….”
“아뇨. 괜찮아요.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여인이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클라우스, 당신이 그렇게 은근히 공을 들여서 접점을 만들어두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꼬옥-.
율리아가 슬그머니 클라우스의 손을 맞잡는다.
분위기가 마치 어딘가로 제 정인을 떠나보내면서 날 잊으면 안 돼요. 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나를 위한 거죠? 나타샤도 그렇고, 세실리도 그렇고. 당신 곁의 여인들.”
“네. 난 남성이고 그들은 여인이니 당연히 나를 사용해야죠. 설마 내가 남자를 유혹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걱정 마세요. 이건 율리아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여기에서는 속마음을 살짝 드러내준다.
오직 너 하나만을 바라보는 순애보다, 라고 백날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
어차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다른 여인들 안고 있는 걸 알게 될 터인데.
그렇다면 이왕 밝혀질 거 스스로 말하는 편이 백 배 천 배는 낫다.
나를 위한 부분, 당연히 있다.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중에는 율리아 너를 위한 이유도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혹 속이 뒤틀려도 조금만 참아달라고,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대답을 들으니 내일 더더욱 이기고 싶어지네요.”
참방, 참방!-
짐짓 화가 났다는 목소리로 율리아가 첨벙거린다.
마치 어린 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은 모습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러자 율리아는 웃지 말라고, 나 지금 정말 진지하다고 투덜거렸다.
물론 그것도 그녀의 장난임을 모를 리가 없는 클라우스였지만 말이다.
“클라우스. 내가 나타샤를 이긴다면, 그 때는 뭘 해주실 거죠?”
“갑자기요? 그런 내기를 걸면 반대로 나타샤가 이겼을 때도 뭔가를 걸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데.”
“나타사갸 날 이긴다면 이번 주 주말에 그 요정을 좀 위로해주세요.”
“…정말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요정 쪽에서 인맥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클라우스가 만들어준 사이, 이것도 인연인데 돈독히는 못 해도 일단 유지 정도는 해야죠.”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게 소유욕, 독점욕이 확실히 강한 율리아다.
그런 율리아의 입장에서 저런 제안은 꽤나 파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다음 나오는 조건이 중요하지만 말이다.
“대신, 내가 이기면 이번 주 주말 내내 당신은 내 거에요. 나타샤, 세실리, 카엘라 조교, 다 필요 없어요. 이틀 밤낮 내내 당신은 내 거야. 내가 볶든 삶든 지지든 내 맘이라고. 알겠어?”
그렇게 말하는 율리아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온다.
그래, 이래야 내가 아는 진정한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 다운 거지.
클라우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밤낮을 가리지 않는 마왕과의 섹스 삼매경은 그도 내심 바라는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