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10장 - 흐르는 시간들
아카데미에 부임하던 당시, 클라우스는 루스칼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자신의 방에 취사 시설이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루스칼 총장은 꽤나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대륙 아카데미 내부에는 당연히 식당 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클라우스가 7년 동안 먹던 군대 짬밥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인, 말 그대로 화려하기 짝이 없고 맛 또한 상상 그 이상의 요리가 쏟아져 나오는 곳이었다.
대륙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이들이 어느 곳의 누구들인지 생각한다면 당연한 것.
따라서 그런 최고의 식당 시설이 있기에 따로 취사 시설이 필요할 리가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클라우스가 갑자기 취사 시설을 원하니 총장으로서는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 알겠네. 그리 해주도록 하지. -
하지만 루스칼 총장은 이유를 묻지 않고 클라우스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 하는 그런 이유가 있고, 클라우스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자신의 교수실에 취사 시설을 얻게 된 클라우스.
학기 초에는 쓰는 일이 없었지만 얼마 전부터 한 여인을 위해서 그 시설을 사용하는 중이다.
“미디움 레어 맞습니까, 율리아?”
“네. 맞아요, 클라우스.”
치이익!-
겉은 딱 알맞게 익고, 칼로 안을 갈라보면 딱 불그스름한 육질과 풍부한 육즙이 흘러나오는 스테이크가 완성된다.
약간의 데코를 거쳐 멋들어지게 담겨진 그 요리는 이내 율리아의 앞에 놓여진다.
“…매번 고마워요.”
“아닙니다. 오히려 나야말로 고맙죠. 아직 연습하는 단계인 요리를 이렇게 먹어주면서 또 평가해주는 이가 필요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도 매번 말하는데 이미 내게는 완벽 그 자체인 요리에요.”
율리아가 그렇게 대답해주니 앞에 앉은 남자가 빙긋 웃는다.
어서 들라 손짓을 하니 마왕은 우아하게 스테이크 한 점을 썰어서는 제 입 안으로 넣어본다.
잠시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던 율리아는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박수를 한 번 친다.
“마왕가의 왕실 요리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역시 당신 요리가 더 맛있어요.”
“하하.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다고 해서 그렇게 치켜세울 필요는 없어요.”“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신기하다니까요? 어쩜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는 거예요? 설마 그 남부의 악마라는 남자가 알고 보니 요리가 취미였을 줄이야.”
그 말에 클라우스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린다.
여인 앞에서 요리가 취미라고 하는 남자는 열에 아홉은 그 여자를 노리고서 하는 대답이다.
그 공식은 소설 속 마왕인 율리아에게도 무척이나 잘 통했는데, 단순히 맛이나 정성을 떠나서 율리아에게는 이 또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한 부분이 되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권력자를 한 번에 보내버리는 방법, 암살.
그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의심을 줄일 수 있는 것은 식사에 독을 타는 것이다.
율리아 역시 그런 독살의 위협을 수도 없이 받아왔다.
한 번은 왕실 요리사가 마왕가에 대한 충성 서약까지 어기고 독을 넣기도 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식사를 하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스트레스였다.
마왕가에 있을 때는 그래도 몇 안 남은 신하들이 철저하게 관리를 한다지만.
도망치다시피 온 이곳 대륙 아카데미에서는 그마저 불가능했다.
수백의 생도들이 같이 먹는 식사에서 무슨 독살이냐고도 할 수 있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에 식사에 독을 넣는 것 정도는 숙련된 암살자들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율리아는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그 날 식사를 거른다거나, 아니면 제 스스로 어떻게든 뭔가를 해서 먹어보려는 식으로 노력했었다.
물론 매번 결과는 좋지 않았고, 생물체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식생활에 대한 부분마저 스트레스로 다가오니 결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클라우스는 바로 그런 부분을 노리고 요리에 집중했다.
그녀에게 신뢰를 산 후 율리아가 보는 앞에서 요리를 해준다.
일부러 최대한 느리게, 천천히 준비하면서 독을 넣겠다는 낌새도 주지 않는다.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던 부분에서 또 한 번 클라우스가 나타나 도와준다.
대륙 전쟁에서 최고의 영웅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위해서 요리를 하고 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 자신을 챙기고 신경 써주는 남성의 행동을 과연 어떤 여인이 모른 체 하고 지나칠 수 있을까.
‘이걸로 점수 참 많이 땄었지. 이번 회차도 당연히 그렇고.’
이 짓도 몇 번의 회차에 걸쳐 하다 보니 자연스레 엄청나게 늘었다.
오직 율리아만을 위한 요리이다 보니 당연히도 그녀의 입맛에 철저하게 맞춰진다.
나중에는 진정한 마왕이 되고, 서부를 박살내어 대륙을 통일한 후에도.
그녀는 왕실 요리사들의 음식은 일절 거부한 채 클라우스가 하는 요리만 먹을 정도였다.
단순히 섹스만으로 여자를 붙잡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언제나 메인 요리 만으로 승부할 수는 없으니 전채 요리나 디저트로 준비해야 한다.
그 곁에 곁들이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면 마왕은 절대 자신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처음이네요.”
“네?”
“먹는 걸로 행복하다는 걸 느끼는 거요. 처음이라고요. 매번 이 안에 독이 들어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가 나를 독살하지는 않을까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동부도 참 말세군요. 서부만 엉망인 줄 알았는데.”
“전쟁의 상흔은 여기저기에 남았어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마왕가의 위세도 지금에 와서는 거의 다 무너진 모래성이 되었죠.”
스걱, 스걱-.
약간은 굳은 손짓으로 나이프를 움직이는 율리아.
조금은 우울한 눈빛을 띠고 있던 그녀였지만 곧 고개를 내젓고는 일부러 미소를 짓는다.
이런 자리에서, 이런 멋진 요리를 앞에 두고 괜히 우울해지고 싶지는 않다는 말과 함께.
“그보다 진짜 맛있네요. 전쟁 중에 이런 걸 배웠을 리는 없고, 도대체 언제 이런 걸 배운 건가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요.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무조건 나를 밀어내겠구나, 군부에서 쫓겨나면 뭐 먹고 살 수 있는 일 하나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나온 게 요리였죠.”
“이 정도 실력이라면 인간 귀족들이 앞을 다투어서 초빙했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 치들한테는 딱히 대접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네요.”
“아. 그, 그렇겠네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클라우스와 귀족들 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이제 율리아도 거의 다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귀족들에게 요리를 만들어서 내놓다는 것은 그런 클라우스를 거의 모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다급히 사과를 하는 율리아였다.
물론 클라우스는 괜찮다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바로 접시로 머리통을 후려쳤겠지만 이 여인은 예외다.
정말 악의를 품고 자신을 모욕하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실수는 다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을 정도라 할 수 있었다.
“그보다 내게 뭔가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식사가 끝나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신 후.
클라우스가 비로소 용건을 말하니 율리아가 슬쩍 입술을 깨문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흘리다가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이 편지에요.”
“누가 보낸 겁니까?”
“마왕성에서 시종장을 맡고 있는 칼라굴이요.”
“믿을 수 있는 자입니까?”
“부왕께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제게 기댈 곳이었던 유일한 마족이랍니다.”
조금 더 과장되게 말한다면 할아버지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율리아가 어릴 적부터 그녀를 보아왔던 칼라굴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일단 서신 자체는 믿을 수 있는 것이겠군요.”
“네. 일단 읽어보세요. 저는 이미 한 번 봤는데, 도통 믿을 수가 없어서요.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클라우스, 당신의 눈과 생각으로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주었으면 해요.”
아무 것도 모르기는 개뿔. 이미 다 알고 있다.
아니, 다 알고 있다 하는 부분을 떠나서 그냥 클라우스가 만들어낸 상황이다.
그런 부분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 하고 있는 율리아를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율리아가 내민 서신을 받아들어서는 그 내용들을 확인했다.
‘…역시나.’
안에 적힌 내용은, 마왕성의 시종장 칼라굴이 몰래 보내온 소식은.
바로 전사장 헤에타리의 이상한 행동에 관한 객관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칼라굴의 생각.
일단은 대놓고 의심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 날 있었던 일들이 너무 결정적이었던 지라 도통 불길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사장 헤에타리. 이 마족은 어떤 자입니까? 기본적인 정보는 있으나 마왕성에서 받는 평가나, 율리아 당신의 생각이 어떤지 말이에요.”
다 알면서도 그런 느낌은 모조리 지운 채.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의 모습으로 그리 묻는 클라우스다.
“부왕께서 직접 뽑은 자에요. 주 임무는 마왕가를 지키고 왕을 위협하는 자를 처단하는 것.”
“마왕가가 가진 직속 무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군요.”
“네. 부왕께서 붕어하신 이후로도 다른 자들처럼 숙부를 따르지 않고 제게 충성을 다 하던 인물이죠. 권력에도 욕심이 없고, 대화가 그런 쪽으로 흐를 것 같은 낌새가 나면 바로 자리까지 피할 정도로. 정말 순수한 무인 그 자체에요.”
“그런 남자가 배신을 한다. 이거 참 어려운 문제로군요.”
잠깐 말을 끊고 율리아의 얼굴을 살핀다.
의심을 하는 이는 거의 제 가족처럼 여겼던 시종장.
그리고 의심을 받는 이는 결코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전사장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는 것일까.
둘 중 하나는 정말 배신자일 수도 있고 혹은 오해 때문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이 중요하군요. 우리가 보낸 자금을 받던 날에 갑자기 주변을 어둡게 하더니 곧장 시종장과 재무관이라는 마족까지 공격했던 것. 당장 눈앞에 엄청난 돈이 있고, 또 마왕가에 그런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는 걸 확인했으니 막거나 방해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어요.”
“그러면 클라우스, 당신의 말은 전사장이 정말 배신자라는 건가요?”
“율리아가 부탁한 것처럼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그게 가장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겁니다. 물론 뭔가 오해가 있을 가능성도 있고 역으로 전사장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계략일 수도 있겠지만 이 서신을 보낸 시종장이라는 마족, 율리아가 가장 믿는 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클라우스의 질문에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럿의 충직한 이들이 곁에 남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믿을 수 있는 마족.
그게 바로 시종장 칼라굴이었다.
“허면 더더욱 전사장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면, 율리아의 측근 중에서도 배신자가 있다는 최악의 가설이 현실이 되는 것이죠.”
“….”
율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혹은 배신감이 드는 듯 주먹을 쥔다.
입술을 앙다물고는 잘게 몸을 떨면서 어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이미 클라우스가 일을 벌인 이상 결론은 단 하나다.
가증스러운 배신자를 의심하고 끝내는 결정적인 한 건을 잡아서 잡아 족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전사장에게 놓인 운명이고 율리아가 택할 수 있는 미래였다.
율리아가 앉아서 계속 끙끙거리는 동안 클라우스는 앞의 식기들을 전부 치워냈다.
괜히 여기를 깨지기 쉬운 것들로 채워두었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와장창! 하는 소리들과 함께 산산조각이 날 테니 말이다.
“율리아.”
“….”
“지금 바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지 않아도 돼요. 의심만 하는 선에서 더 주의 깊게 살피라는 명령을 내리는 선택지도 있죠. 나 또한 정보가 부족하면 움직이지 않아요. 확실한 뭔가를 손에 쥐기 전까지는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배신자로 인해 내가 난처해질 수도 있잖아요.”
“내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걱정이냐.
조금은 오만하면서도 또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잠시 클라우스를 쳐다보던 율리아는 갑자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와락 품에 안겨든다.
“아무래도 우리 둘이서, 함께 고민 좀 해봐야 할 것 같죠?”
“…그런데 왜 내 셔츠를 벗기고 있는 걸까요?”
남자의 말에 밤의 여신이 싱긋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제 검지를 붉은 입술 위에 살포시 올리고는 귓가에 속삭여 온다.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