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9장 - 잘라내야 할 것들
“며칠 전에 아카데미 총장이 마족 생도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더니 그게 이거였군?”
“참나. 쌈박질이 전부인 줄 알았던 놈들이 무슨 음악까지. 우리가 원조인 것들을 마치 자신들이 먼저였다고 우기는 것으로 보이는데.”
“저런 저열한 것들이 뭘 알까. 귀만 어지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족 생도들이 준비했다는 무도회가 열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족 생도들이 무척 기대된다는 반응을 보일 때마다.
반대로 서부 연합의 생도들, 특히 인간 귀족 측의 생도들은 그런 마족 생도들을 비웃고 험담을 하느라고 아주 정신이 없었다.
그 험담이라는 내용이 클라우스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원래 춤이라 하는 것은 인간 측이 가장 먼저 선보인 것인데.
무도회라는 큰 행사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서로의 친분을 확인하고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 인간이었는데.
그걸 마족들이 주제도 모르고 마치 제 것처럼 대하고 있다는 식들의 말들이었다.
‘그거 아니야, 병신들아.’
원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입을 놀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냥 웃음만 나온다.
이미 전에도 언급했지만 인간들이 저들이 원조라고 하는 모든 춤들은 동부에서 시작되었다.
단지 그 유래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들 것이라고 생각만 해대서 알지 못 하는 것뿐.
심지어 무도회에서 쓰이는 음악, 그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조차 마족들이 원조다.
저 멍청한 귀족 자제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 하면서 그냥 입만 놀리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한 이가 바로 근처에서 자신들의 헛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 한 채로 말이다.
‘머저리 새끼들. 그냥 다 죽어라. 산소 아깝다.’
저것들을 살려보겠다고 도대체 몇 번의 회차를 소모했던 것일까.
대충 떠오르는 것만 못 해도 열 번은 넘어가는 것 같다.
그래도 인간이라고, 그래도 나랑 같은 종족이니까, 그런 마음에서 별 짓을 다했는데.
생각해보니 자신이 쓴 이 소설의 세계관에서 인간 귀족은 구제 불가능의 쓰레기.
그 중에서도 개 씹 호로 쓰레기들이라는 것을 왜 망각했던 것일까.
“자자, 다들 한 번 구경이나 하지. 과연 얼마나 대단한 무도회일지 말이야.”
“애들 발재간이나 조금 보다가 끝날 것 같은데. 푸하하하!!”
“차라리 평민 놈들의 춤사위를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과연 저 알량한 귀족 놈들이 자신들이 원조라고 믿고 떠들며 우기고 있는 것들이 실은 동부에서, 마족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걸 안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참 기대가 된다.
이미 봤던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건 보고 또 봐도 재미난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교수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강의가 조금 전 끝났기에, 그리고 옷도 좀 갈아입을 생각으로 그리 한 것인데.
“흠.”
자신의 교수실 앞에 한 여인이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여성 생도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단출한 복장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몸에서 흘러나오는 굉장한 매력과 아름다움은 다 가려지지는 않았다.
“나타샤 생도.”
“…클라우스 교수님.”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강의 시간에도 딱히 문제는 없어보였는데.”
“제가 교수님을 잠깐이라도 뵈러 찾아오는 게 혹 문제라도 있나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여는 나타샤.
평소 다른 생도들을 대하던 그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다.
인간들이나 수인 생도는 물론이고 같은 요정 생도가 말을 걸어와도 ‘짧게 말하세요.’ 라고 차가운 기운을 폴폴 풍기던 여자.
하지만 자신 앞에서만큼은 너무나도 여린 한 송이 꽃이 되는 요정이다.
“전혀요. 다만 내가 시간이 없어서 말입니다.”
“혹시 교수님도 잠시 후에 열린다는 마족 생도들의 무도회에 가시는 건가요?”
“네. 율리아 생도가 와줄 수 있냐 부탁을 해서 말이죠.”
“…그렇군요. 율리아가… 부탁을 했군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혹 시간을 좀 주면 입을 열까 싶었지만 회차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 설마 이 요정의 마음을 모를 클라우스가 아니다.
‘조금은 과하게 기를 꺾어두었나? 바로 할 말도 이렇게 뜸을 들이다니.’
시선을 피하면서, 두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리고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나타샤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고, 또 말하려다가 마는 모습을 반복한다.
금발의 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세상 어떤 남자라도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클라우스라고 해도, 마왕이 최고라는 불변의 생각을 가진 그라고 해도.
이런 상황 앞에서 굳이 참거나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들어오세요, 나타샤.”
“네. 감사합니다.”
조심스레 클라우스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나타샤였다.
아주 당당하게 들어와서는 마치 모든 게 제 것 마냥 돌아다니는 율리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
오히려 클라우스에게 혹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것까지 보일 정도다.
“편하게 있어요. 내가 초대해놓고 설마 뭐라고 할까.”
“아, 네. 그럴게요.”
대답은 그리 해놓고 의자에 앉아서는 또 좌불안석이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서 방 한쪽으로 향하는 클라우스.
그리고는 마력으로 물을 데우고 곧 요정들이 자주 마신다는 차 한 잔을 준비한다.
“마셔요. 나타샤.”
클라우스가 직접 차를 타서 내미니 나타샤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이런 사소한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그 숨김없는 모습에 괜히 더 미안해진다.
“슬슬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내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 하며, 무도회에 간다고 하니 묘하게 축 쳐진 모습을 보이는 것 하며. 묻고 싶은 게 조금 있습니다, 나타샤.”
“….”
“대답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됩니다.”
“아뇨. 대답할게요. 그러니까, 저랑 더 많은 대화를 나누신다고 하면요.”
“당연한 말을. 그래서 왜 내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죠?”“…그냥 조금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부끄러워 죽겠다는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국 제 할 말을 꿋꿋이 다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저 말에는 다른 뜻이나 노림수가 없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요즘 많이 바빠 보이셔서. 그래서 함부로 다가가지를 못 했어요. 그저 먼발치에서, 혹은 강의실에서 강의를 할 때만 본 게 전부였죠.”
“그랬군요. 나는 오히려 나타샤가 율리아와의 대련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하는 마음에 수련에만 집중하는 줄 알았습니다. 해서 방해가 될까 일부러 먼저 다가가지 않았는데.”
“아… 그, 그러셨군요. 그러셨어요. 저는 교수님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그저….”
“그저, 뭐요?”
나타샤가 말끝을 흐리니 클라우스가 은근한 어조로 되묻는다.
그에 요정 여인은 ‘그게, 그….’ 라고 말을 계속 흐리다가 결국 세차게 고개를 내젓는다.
딱 봐도 부끄러워서 대답은 못 하겠다는 귀여운 투정.
보통의 남자들이라면 괜히 이 미녀가 도망갈까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겠지만.
“대답 할 생각이 없나요? 난 나타샤의 다음 말이 무척 궁금한데.”
클라우스는 전혀 뒤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자신에게 그야말로 완벽하게 의지하고 있는 여인이라고 하지만.
반대편에는 도도하고 또 자존심 강한 요정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기에 괜히 세실리를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무시한다면 반드시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나타샤가 마음에 걸려하는 부분이 있다면 가능한 선에서 신경을 써준다.
네게 관심을 확실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또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만 해주면 이 여자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낭만을 품고 클라우스의 곁에 남는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한데 자신을 잊지 않고 돌아봐주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율리아처럼 소유나 독점이 아니라 그냥 의지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항상 곁에 있을 필요는 없지만 필요할 때에는 곁에 있어주는 정도. 그 선을 지키는 게 베스트 중의 베스트다.’
해서 지금도 이렇게 은근한 어조로 물어보는 것이다.
네게 마음을 쓰고 있다. 네가 내 질문에 얼버무린다면 관심을 꺼버리는 게 아니라 더 관심을 가지고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볼 것이다.
일이 어떻게 흐르든 넌 내 여인이니까, 내 것이니까. 그걸 다시금 알려준다.
“…호, 혹 제게 흥미가 떨어지신 줄 알았어요.”
“흥미라. 그렇게 말하니 섭섭하네요. 마음이 떠났다, 이런 단어를 기대했는데.”
“제, 제 말이 그거에요. 말을 잘못 했어요. 정말이에요, 교수님.”
“그렇겠죠. 비록 전부를 줄 수는 없다고 해도 나름 신경을 쓰고 있는 여인인데. 설마 나타샤가 생각하는 나라는 남자가 흥미만 가지고서 여인을 괴롭히다 도망가는 놈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죠?”
“당연하죠! 당연한 말입니다!”
“다행이네요. 아무튼 나타샤.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주지 못 하는 건 이미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율리아 아그네사를 따를 것이고, 그녀가 항상 내 첫 순위에요.”
“….”
“허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절대 안 버립니다. 어찌 되었든 내가 품은 여인인데. 감당조차 하지 못 할 것이었다면 애당초 안아주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후 천천히 나타샤의 곁으로 다가가자 움찔 놀란 요정이 옆으로 비킨다.
나타샤의 바로 옆에 앉은 클라우스는 손을 뻗어 은근한 기색으로 그녀를 당겨온다.
“…바, 바쁘시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나타샤가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다니 풀고 가야하지 않을까요?”
“그건….”
“혹 이미 오해가 다 풀렸다면 다행이겠지만요.”
클라우스의 손에서 슬쩍 힘이 빠진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나도 시간 쓰면서까지 이러지는 않겠다는 뜻.
그에 나타샤난 화들짝 놀라서는 저도 모르게 그의 두 팔을 붙잡고 말았다.
“다, 다 안 풀렸어요.”
“정말입니까? 오해가 안 풀렸나요?”
“네? 아, 그러니까… 그, 거의 다 풀리긴 했는데 아주 조금 남았다고 할까요.”
“그러면 안 되죠. 오해는 다 풀어야 하는 법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나타샤?”
“맞아요. 오해는 다 풀어야죠!”
율리아가 대놓고 요구해오는 스타일이라면 나타샤는 은근히 원하는 타입.
지금도 굉장히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한 번 안아달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당장 율리아에게조차 오늘은 시간이 없다고 못 박아둔 상황인데 나타샤라고 해서 없던 시간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럴 때는 분위기로 승부수를 띄우는 게 최고다.
마침 상대가 가장 잘 휩쓸리는 나타샤이니 어려울 것도 없다.
“으응, 클라우스님. 클라우스님….”
품에 안겨서는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나타샤.
얼른 움직여서 제 야한 몸을 한껏 만져달라는 듯 꼬리를 살랑거린다.
막 클라우스의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향하던 찰나.
“…역시 아닌 것 같군요.”
갑자기 고개를 저으면서 손을 떼어내는 클라우스.
덕분에 무척이나 당황한 나타샤는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본다.
“지금 당장 나타샤, 당신을 위해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도 없고, 일정도 있는 터라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건 나타샤에게 실례되는 일입니다. 당신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 다른 뭔가에 쫓기는 마음이 든다는 건 결코 옳지 못 한 것이에요.”
“그건….”
“나타샤가 나를 생각하는 것만큼 나도 나타샤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어요. 이런 짧은 시간동안 나타샤를 대하는 건 아주 큰 실례입니다.”
“어, 어어….”
“조금만 더 오해하고 있어주겠어요, 나타샤? 조만간 시간을 내서 그 오해, 처음부터 아주 제대로 풀어주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핑계, 그러나 표정과 연기로 말이 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잠시 클라우스를 쳐다보던 나타샤는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있어 오늘 못 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자신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갔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