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9장 - 잘라내야 할 것들
“어떻게 잘들 받았을까 걱정이 되네요.”
다음날, 강의가 끝나고 교수실로 들어선 율리아는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입을 열었다.
그 엄청난 자금을 자신의 이름으로 보냈으니 당연히 제 신하들이 크게 놀랄 것이다.
과연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가 되는 건 당연한 일.
“아마 다들 믿을 수 없다며 좋아할 겁니다.”
“그렇죠? 그래서 더더욱 걱정이에요. 잘들 받았을지. 아직 들어온 소식은 없나요?”
율리아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자금은 확실하게 전달되었음을 다 알고 있지만 그건 오늘 저녁이 되어서야 붉은 독거미 측이 알릴 정보다.
그리고 전사장을 의심해야 한다는 시종장의 편지는 며칠 이내로 도착하게 된다.
시간적 여유만 있었다면 마왕성까지 따라갔을 수도 있다.
허나 그렇게 된다면 당장 시간적으로, 그리고 체력적으로도 한계에 봉착한다.
아무리 불굴 스킬이 있다고 해도 감당할 수 있는 범주가 정해져 있다.
“잘들 받았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당장 오늘 저녁에 있을 무도회부터 걱정하는 게 먼저 아닐까 하는데요, 마왕님.”
“읏… 진짜 거기 가야 하는 건가요, 클라우스님?”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미안하지만, 율리아. 당신이 마왕으로 있을 때조차 대부분의 귀족들과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 했죠. 당신의 숙부가 제지해서요.”
“…네. 부끄럽게도 그러네요.”
“마왕이 지고한 존재라고 하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반드시 중간 지배층과의 협력이 필요한 법이에요. 그걸 무시할 수 있는 건 정말 강력한 군주만이 유일하죠.”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잘 알아요. 마왕성에 있을 때 마족 귀족들과 제대로 된 대화조차 못 해봤고 그들과의 관계를 도모할 기회도 없었으니까. 이번 기회에 어느 정도는 그걸 메워보라 뭐 이런 말이잖아요.”
아카데미라고는 하지만 대륙의 내로라 하는 이들은 다 모인 곳이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그저 배우고 익히는 아카데미는 재미없는 감옥에 불과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순한 배움의 장이 아닌, 관계를 도모하고 연합을 형성할 수 있는 정치의 연속이기도 했다.
때문에 유력한 이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큰 행사들이 있곤 했다.
그리고 이번의 큰 행사는 마족 측의 귀족들이 주체가 되어서 연 무도회였다.
“의외였어요. 설마 서부 연합의 생도들도 참가하겠다고 할 줄이야.”
“좋은 뜻만 가지고 있는 건 절대 아닐 겁니다.”
“당연하죠. 오히려 꼬투리 잡으려고 오는 건 아닐까 걱정일 정도에요. 마족들의 무도회라는데 하는 짓은 짐승들이 난리를 치는 것 같다, 뭐 이런 식의 것 말이죠.”
“그럴 수도 있겠네요. 특히 인간 귀족 생도들은 더더욱 그러겠죠.”
“하지만 막상 와서 본다면, 절대 그런 말 못 할 걸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율리아.
사실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일단 수인들에게 무도회 따위의 개념이 아예 없다.
그들에게 있어 춤이란 예술적인 부분보다는 신앙적인 부분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요정들은 춤을 추기는 하지만 무슨 발레마냥 아주 느리게, 그리고 우아한 부분을 강조한다.
인간 쪽 춤이 그나마 무도회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알게 모르게 동부에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확 티가 난다.
그렇다면 동부의 춤은, 마족들의 춤은 어떻기에 그러느냐?
아마도 무도회 하면 떠오르는 화려하면서도 아름답고 정열적인 춤사위들.
바로 그것들이 마족들이 펼치는 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또 설정을 짜둔 게 이리 효과가 날 줄은 몰랐지.’
서부 연합이 동부의 마족들을 미개하다, 야만적이다, 라고 무시하지만.
정작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문화적인 부분이 많다.
이게 클라우스가 이 세계를 만들면서 대충 끼워둔 설정이었다.
덕분에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마족들의 무도회에 참가한다는 서부 연합의 생도들이지만.
곧 그곳에 와서 감탄만 연신 내뱉다가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간 귀족들이 또 태클을 걸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고.’
율리아에게서 피어나려는 배신자의 싹을 잘라내듯이.
그나마 조용히 흘러갈 수 있는 아카데미 생활을 꼬이게 만들 인간 귀족 생도들은 이번 기회에 아예 기를 펴고 다니지 못 하도록 묵사발을 내둘 필요가 있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을 잘라내서 제대로 세우지도 못 하게 만드는 고자 수준으로 말이다.
“당연히 교수님도 참석하실 거죠?”
마왕으로서가 아니라, 율리아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생도로서 묻고 있다.
그 질문에 클라우스는 잠시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마족들의 춤을 한 번 제대로 보고는 싶은데 오늘 꽤나 바쁠 듯 해서요, 율리아 생도.”
“…바쁘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클라우스 교수님.”
“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좋아요. 그러면 저와 무도회에 함께 가는 건 어떨까요, 클라우스?”
이번에는 생도가 아니라 여인으로서, 그리고 마왕으로서 하는 제안.
그에 클라우스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짓고는 조금 전과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았다.
“바쁘기는 합니다만, 율리아가 원한다면 따라가겠습니다.”
“군주의 명령에 대한 복종인가요?”
“그렇게 보였나요? 나는 그저 절세미녀의 부탁을 거절치 못 한 바보 같은 남자였는데.”
“좋네요. 절세미녀도 좋고, 바보 같은 남자도 좋고. 합격이에요, 클라우스.”
율리아는 책상 위에서 내려와서는 클라우스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한다.
한 번 여인으로서의 황홀경을, 그리고 남자를 대하는 쾌감을 알게 되니 거기에 적당한 선에서 흠뻑 빠져든 모습은 그녀의 매혹적인 부분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인은 자신의 매력을 알고 이용하는 이라고 했던가.
지금 율리아가 딱 그런 여자라고, 클라우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전 이만 다른 강의를 들으러 가야겠네요.”
“다름 강의가 역사 강의였나요?”
“네. 거기에 대륙 전쟁에 대해서 한창 나아가고 있죠. 곧 클라우스, 당신의 활약이 아주 장황하게 나오는 부분이에요.”
그러자 클라우스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조금은 부끄럽다는 모습을 보인다.
이미 사방에서 전쟁 영웅이니 남부의 악마이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불러주고 있다.
본인은 다만 율리아를 더 쉽게 손에 쥐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한 것인데.
그로 인해서 참 많은 곳, 많은 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게 되었다.
“과장된 게 많으니 너무 열심히 듣지는 말아요, 율리아.”
“이상하네요? 오히려 교수님은 축소된 부분이 많다고 하던데?”
“엄청 열정적이네요. 다른 강의들은 실망스러운 게 많다고 하지 않았나요?”
“처음에는 그랬는데, 더는 저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니까 평가가 높아졌나 봐요. 이제는 교수도, 생도들도 저를 이름뿐인 마왕이라 무시하지도 않고요. 아, 물론 그 인간 귀족의 검술 강의는 여전히 꽝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역겹다고 할 정도랄까.”
솔직한 감상에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온다.
대체 어떤 검술 강의이기에 율리아가 이리도 비웃는 것인지 한 번 지켜보기도 했다.
결과는 같은 인간 귀족들도 느끼하다고, 징그럽다고 수군거릴 만한 강의였다.
그놈의 빌어먹을 출신만 아니었다면 바로 아웃이었을 텐데.
이런 부분에서 보면 대륙 아카데미도 대륙의 정세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놈도 잘라버리고 싶어.’
클라우스가 그런 병신 머저리 같은 교수를 그대로 두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런 놈도 나중에 한 번 이용해 먹을 가치가 있기에, 그래서 놔두는 것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아마 밤중에 두 팔이 사라지는 마술을 겪을 지도 모르겠다.
“전 이만 가볼게요. 이러다가 정말 늦겠네.”
“얼른 가세요. 괜히 늦었다가 싫은 소리 듣거나 눈초리 받지 말고요.”
“제가 그런 대접을 받는 게 싫으신가요, 교수님?”
“네. 내 학생이 그런 대접 받는 거 당연히 싫습니다. 그리고 내 여인이, 내 왕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더더욱 싫습니다. 여전히 당신을 그저 이름뿐인 마왕이라고 여기는 놈들이 당신을 더욱 무시하는 꼴을 봤다가는 내가 눈이 돌아버릴 수도 있어요.”
“참아주세요. 저도 이제는 예전처럼 병신 같이 지내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여태는 살아남기 위해서 저를 숙였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율리아는 그렇게 말한 후 슬쩍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볼이 아니라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너무 당신한테만 의지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는데. 자꾸만 당신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미안해요, 클라우스.”
“전혀요. 원래 남자들은 이런 미녀가 자신한테 의지하기를 무척 바란답니다.”
“그렇게 장난 식으로 얼버무리지 마요. 전 지금 진지하다고요.”
“나도 무척 진지한 건데요?”
그 증거라고 말하듯 바로 율리아를 잡아당겨서는 다시금 키스.
이번에는 가볍게 입술을 맞추는 게 아니라 거의 이대로 침대로 돌격해도 무방할 정도의 그런 격렬한 키스라고 할 수 있었다.
츄릇-.
서로의 입술과 숨결을 한껏 탐하다보니 다시금 욕망의 불길이 확 치솟는다.
그냥 오늘도 강의 나가지 말고 이 남자랑 해버릴까.
율리아의 마음속에 그런 강렬한 유혹이 막 고개를 들려는 찰나였다.
“진정해요, 율리아. 나중에요.”
“…정말 못됐어요. 한껏 불만 지펴두고 이렇게 빠져나가다니.”
“오늘 무도회에서 멋진 춤 한 번 보여주면 생각해보도록 하죠.”
“하아? 뭐라는 거예요. 당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제가 정하는 거라고 했죠? 당신은 내 남자야. 내가 원하면, 안는 거라고. 알겠어?”
순간적으로 율리아의 본모습이 튀어나오고 있다.
특히 이런 부분에서는 정말 지지 않고 무조건 우위를 점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이전에 있었던 섹스에서 여인이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드는 게 또 얼마나 큰 육체적, 정신적 쾌감을 가져다주는지 제대로 알아버린 모양.
“후우.”
들끓던 제 속을 진정시킨 것인지 여인의 눈에서 활활 타오르던 욕망이 사그러든다.
아쉽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율리아는 클라우스의 볼을 살며시 핥으며 입술을 뗀다.
“…제가 당신의 여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제 남자가 된 것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매번 이기려고만 들지 마요. 자꾸 그러면 강의 시간에 확 덮쳐버릴 거야.”
이제 한 달이 약간 지난 시점인데 벌써부터 여왕님 포스가 슬슬 흐르고 있다.
한 번 자신감이 붙고, 그 자신감이 그녀의 재능을 꽃 피워주니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밖으로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던 것이었다.
바로 저런 부분에 마족들이 하나둘씩 매료되게 된다.
본능적으로 강자를, 자신과 제 가족 지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떠받드는 자들.
그런 동부의 거주민들에게 율리아 아그네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절대군주라 할 수 있었다.
‘아직은 먼 이야기지만.’
자신이 도와주면 그 기간을 몇 년 이내로 단축할 수 있다.
동부는 물론이고 서부마저 통합하여 전 대륙을 호령하는 여인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여인의 뒤에 앉아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면 그만인 것이다.
“제 말, 확실히 이해했지요, 클라우스 교수님?”
“…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했어요.”
“다행이네요. 그러면….”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직 당신은 생도고, 나는 교수이지 않나요?”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먼저 강하게 밀고 들어간다.
당장이라도 여인을 덮쳐서는 이대로 확 잡아먹을 듯이 바짝 끌어당긴다.
조금은 놀란 모양인지 두 눈을 깜빡이는 이 사랑스러운 여인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여기서 날 이길 생각은 아직 하지 말아요, 율리아.”
“…이래서 당신이 좋다는 거예요.”
율리아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입술을 흠뻑 탐하는 클라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