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9장 - 잘라내야 할 것들
처음에는 그냥 눈앞에서 보자마자 죽였다.
그 놈으로 인해 받은 충격, 특히 눈앞에서 율리아가 범해지는 꼴은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뭐 이유를 물을 새도 없이, 그리고 대답할 시간도 없이 목을 날렸다.
‘덕분에 완전히 망해버렸었지. 갑자기 자신의 든든한 신하라고 생각했던 이를 다짜고짜 죽여 없앴으니 의심을 안 받으면 이상한 법이었어.’
헤에타리에 대한 율리아의 신임, 그리고 마왕가의 충성파들이 가진 믿음은 생각보다 깊었다.
전대 마왕에서부터 이어진 충심에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율리아를 지키던 모습.
그걸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이상 함부로 그를 대해봤자 좋은 게 없었다.
허나 헤에타리가 배신을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율리아를 포함하여 마왕가의 모든 이들은 그의 배신에 치를 떨게 된다.
그러나 그 때에 가면 늦어도 너무 늦는다.
그 전에 미리 손절을 하고 손발을 묶어서 언제든 잡아 족칠 준비를 해야만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그 배신자 새끼를 공식적으로 심판하는 게 내가 되면 안 된다는 거다.’
헤에타리를 자신이 공식적으로 죽이지 않는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이건 율리아에게 있어서 매우 중한 일, 마왕으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의무이자 권리다.
배신자를 처단하는 것은 최고 권력자가 대표로서 나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으로서 권위를 바로 세우고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시작부터 저 새끼가 배신자다, 철저히 조사해라, 그런 식으로 균열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사람이든 마족이든 결국 모든 것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의심에 불길 한 번만 붙여주면, 그리고 바람만 좀 일으켜주면 일이 진행되는 거야 금방.
조금씩 깎아간다, 조금씩 의심을 사게 만든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고 아주 조그마한 균열은 치명적이다.
그 단단한 신뢰에 의심 한 방울 들어갈 틈만 만들어주면 된다.
‘갑자기 이 무슨!’
온통 암흑천지가 되자 시종장 칼라굴은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곧 대비를 했다.
멀쩡하던 불길이 갑자기 일시에 꺼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좋지 않다, 분명 이 잠깐의 사이에 뭔가 사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껏 몸의 근육을 팽팽히 당기던 찰나.
파앗!-
재빠르게 마법으로 주변을 밝히는 마족 여성.
그저 평범한 일개 평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마력을 조율해서 빛까지 내고 있다.
상대방이 그래도 마법에 관해서 꽤나 실력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하여 칼라굴이 막 주변을 살피던 찰나였다.
‘…전사장?’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저런 덩치를 가진 이는 헤에타리가 유일하다.
헌데 조금 전까지 바로 제 옆에 있던 이가 바로 전사장이었는데.
도대체 어느 순간에 앞으로 가서 등까지 돌린 형태로 서있는 것이란 말인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의 뒤로 다가가는 순간.
‘살기!’
확실하게 느꼈다. 비록 늙고 비루해져 추해진 몸이라고 하지만.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살기조차 감지하지 못 할 정도로 병신이 되지는 않았다.
칼라굴은 그 살기의 근원이 헤에타리임을 알아차렸다.
채 이유를 알기도 전에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그의 뒤를 점하려는 순간.
슈악!-
뭔가가 번뜩이며 칼라굴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서 다행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전혀 파악을 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순간.
화악!-
꺼졌던 불이 다시금 밝게 타오르면서 주변의 모습이 전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칼라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넘어져 있던 메이로어를 일으키는 헤에타리였다.
“재무관. 괜찮습니까?”
“아… 네, 네. 저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이제 됐습니다.”
거의 헤에타리의 손을 뿌리치는 정도라고 해도 무방했다.
메이로어의 행동에 전사장은 그냥 난감하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칼라굴은 메이로어의 두 눈에 공포와 두려움이 깃들어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갑자기 불이 꺼지다니.”
“죄송합니다. 마력으로 밝혀두었음에도 이렇게 될 줄은 예측하지 못 했습니다.”
붉은 독거미 측의 이들을 타박하는 헤에타리를 보면서 칼라굴은 생각했다.
마력으로 피워둔 불길을 꺼야 한다면 그보다 더 강력한 마력이 필요하다.
메이로어는 전투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수준이니 당연히 불가능하다.
방금 아주 희미하게나마 불을 피운 이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인원들도 그만큼의 대단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허면 답은 하나.’
전사장 헤에타리,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분명 마력을 다룰 줄 안다.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불길을 모두 꺼트리고 이 주변을 충분히 암흑천지로 만들 수도 있다.
더해서 단 한 번의 기습으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어째서? 헤에타리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방금 내가 잘못 본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살기가 너무 확실했는데.’
다시금 빛이 살아나기 직전에 날아왔던 치명적인 일격.
그리고 재무관을 향해 서있던 헤에타리와 잔뜩 겁을 먹은 메이로어.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단순한 우연인 것일까?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
“….”
뒤에 있는 자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헤에타리의 모습을 보지는 못 한 것 같다.
이렇게 된다면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포착한 이는 자신과 메이로어, 단 둘이라는 것.
여태까지 가지고 있던 신뢰가 갑자기 흐릿해지고 그 사이로 차가운 의심이 밀려든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지금과 같은 일은 충분히 그런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곳곳에서 계속 이탈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
그런 때에 갑자기 자신들의 주군인 율리아가 엄청난 자금을 보내왔다.
마왕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했던 물품인 만큼.
반대로 이쪽의 빈틈만을 노리고 있을 자에게도 가장 원하던 순간일 수 있다.
“뭐하고 있습니까, 시종장? 얼른 가야지요. 이러다가 시간을 지체하게 됩니다.”
“아, 네. 그러지요. 전사장.”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헤에타리를 가장 앞에 세우고 그 뒤를 걷는다.
그리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가장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메이로어의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것을 다시 한 번 파악할 수 있었다.
“전사장.”
미리 도시 근처 숲에 숨겨두었던 마차까지 향한 후.
칼라굴은 헤에타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지요.”
“출발하기 전에 근처를 한 번 확인해야 할 듯 싶습니다. 혹 미행이 붙지는 않았는지, 이쪽을 주시하는 자가 없는지 확인을 해야 해서 말입니다.”
“아아, 맡겨만 두세요. 금방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팡팡 치고는 그대로 사라지는 헤에타리.
이후 칼라굴은 백금화를 모두 실은 후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메이로어를 붙잡았다.
“재무관님.”
“….”
“메이로어 재무관님.”
“시종장님. 조금 전에, 조금 전에 보셨나요?”
“…무엇을 말입니까?”
“조금 전에 전사장이, 헤에타리님이 저를 해하려고 했어요. 손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뭔가를 봤어요. 그리고 살기로 가득 찬 눈빛도 전부 다요.”
“갑자기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는 겁니까. 지금 장난을 치실 때가 아닙니다.”
“제가 장난이요? 제 여태의 행실을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지 않을 텐데요.”
“….”
메이로어의 반박에 칼라굴은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혹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서,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어서.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을 해보았고 못된 장난은 하지 말라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무척이나 다급해보이는 메이로어의 눈빛과 목소리뿐이었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어둠이 밀려드는 순간 그가 돌변했어요. 마치 그 찰나의 틈에 우리들을 해하고 이것들을 전부 챙기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잘못 보신 게 아닐까 묻고 싶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는 시종장님의 목소리도 불안으로 흔들리고 계시네요.”
그녀의 말대로 칼라굴조차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정말 자신이 본 게 전부 사실이라면, 그리고 메이로어가 마주한 게 진실이라면.
헤에타리는 과연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불을 끄고 메이로어를 죽이고 칼라굴 본인에게까지 암기를 휘두르면서.
도대체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은 무엇일까.
‘…설마. 아니지. 아니어야 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전사장, 그 남자가?’
차라리 메이로어가 배신자라고 한다면 믿을 수라도 있겠다.
그녀가 마왕가에 들어와 업무를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출신 가문도 감히 왕좌를 찬탈하려는 자와 결탁한 세력이었으며.
딱히 율리아에게 충성을 다 한다는 느낌조차 없었기에.
아쉬운 마음은 들 수 있을지언정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사장은, 헤에타리는 다르다.
그가 배신이라니? 전대 마왕부터 마왕가에게 충성을 바친 남자인데?
대부분의 실력자들이 자신을 더 대우해줄 수 있는 이를 찾아 떠난 마당에 남은 유일한 자다.
그가 전대 마왕에게 바치던 충심을 누구보다 칼라굴 본인이 잘 알고 있다.
헤에타리가 마왕을 배신하고 마왕가의 사람들을 배신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다.
사박사박-.
이 때 헤에타리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칼라굴은 바로 표정을 정리했고 메이로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돌아보고 왔습니다, 시종장.”
“어땠습니까?”
“다행히도 따라붙은 이는 없었습니다. 정말 다행인 일이지요.”
“그러면 바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셔도 됩니다.”
헤에타리의 말에 칼라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부석으로 향했다.
원래는 메이로어의 차례였으나 굳이 자신이 맡겠다고 한 후 나선 것이었다.
마차를 출발시키기 전 칼라굴은 다시 한 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번쩍!-
“…!”
어둠속에서 이쪽을 주시하던 누군가와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상대방도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었음을 알아차렸는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이런 빌어먹을.
칼라굴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 다급히 마차를 몰았다.
발각되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찾아와서 제대로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시종장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헤에타리에게 이 일대를 살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일행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 능력을 지닌 그이기에.
혹 자신들의 뒤를 밟았을 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 테니까.
하지만 그는 뒤를 밟은 이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아예 확언까지 했다.
그렇다면 방금 전 자신이 본 저 정체불명의 눈빛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심지어 내가 상대방의 기척을 알아차렸음에도 전사장은 침묵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먼저 저 눈빛의 주인을 알아차렸어야 한다.
아무리 못 해도 자신이 발견한 직후 뒤늦게라도 눈치를 챘어야 함이 옳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마차 안의 전사장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속도를 더욱 더 높이는 마차를 바라보면서.
“진짜 이런 짓은 영 성미에 안 맞는단 말이야.”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클라우스.
솔직히 불을 꺼트리고 그냥 그 자리에서 납치하여 한 땀 한 땀 조져줄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헤에타리를 처단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율리아여야 한다.
제 사람이었고 자신을 배신한 자이니 자신이 잘라내는 것이 옳다.
그게 가장 위에 선 자로서의 책임이고 의무였다.
머지않아 칼라굴이 비밀리에 편지를 보낼 것이다.
전사장 헤에타리가 이상하다, 아무래도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그리 되면 율리아는 그럴 리가 없다고 입술을 깨물면서도 결국 의심을 할 것이다.
허나 의심만 한다고 해서 뭐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율리아는 클라우스를 불러서 정보 수집이 가능하겠냐고 묻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클라우스가 원하는 진정한 연극이 시작된다.
멀쩡한 놈 배신자로 만드는 것도 전혀 어렵지가 않은데.
배신자를 배신자로 만드는 것이니 어려울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