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9장 - 잘라내야 할 것들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중년의 남성 마족. 전사장 헤에타리.
어쩌면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뒤를 맡아서 주변을 샅샅이 훑는 모습이나.
아주 굳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외모는 모르는 이가 본다면 우직한 무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헤에타리는 율리아의 아버지인 전대 마왕이 뽑은 자다.
이전부터 자신과 힘께 했었고 자신의 수족 역할을 했으며 곁에 남기 위해 제 식솔조차 두고서 마왕가로 혼자 올라온 인물이었다.
혹 권력의 중심에 설까 그 어떤 이와도 사사로운 대화를 10분 이상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하며 이야기가 정치로 흐르면 바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고 했다.
과거나 행실에 있어 어디 한 곳 흠을 잡을 곳이 없었다.
이 정도일 진데 율리아는 물론이고 그 곁의 이들, 그리고 클라우스조차 속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충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실상은 최악의 배신자였음을 꿈에도 몰랐다.
“뒤에 따라 붙은 기척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감사드리오, 전사장. 이런 굳은 일에 마다치 않고 따라오시다니.”
“마왕 전하를 위하는 길입니다.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마다치 않을 겁니다.”
헤에타리의 대답에 시종장 칼라굴은 감격스러운 눈빛과 흐뭇한 미소를 내보였다.
마족들은 본능적으로 더 강한 자를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많은 수의 자들이 율리아를 저버리고 그녀의 숙부에게로 갔다.
자신이 보기에 아직 마왕은 다 피지 않은 꽃이기에 가능성이 무척 높음에도.
그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따르며 결국 모두 이탈해버렸다.
헌데 그들 사이에서 헤에타리는 전사장으로서, 전왕의 수하로서 충심을 지켰다.
아직은 보잘 것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율리아의 곁을 철저히 지켰다.
그 모습이 어찌나 헌신적인지 시종장인 자신이 봐도 대단한 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였다.
“마왕 전하 곁에 전사장 같은 이가 셋만 더 있었어도 훨씬 좋았을 터인데.”
“과찬입니다, 시종장.”
창가에 걸터앉아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클라우스는 속으로 냉소를 삼켰다.
안타깝게도 사람 보는 눈이 나름 좋다는 시종장마저 완전히 속아 넘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저 전사장이라는 놈의 연기가 아주 대단하다는 방증이리라.
“저보다는 오히려 시종장 같은 이들이 더 필요합니다.”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가증스러운 말을 내뱉는데 들을 때마다 열불이 치솟는다.
처음에는 이유라도 좀 궁금해서 잠깐이나마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허나 그 이후로는 그냥 한 마디 말조차 못 하게 일단 입부터 찢었다.
그리고 눈을 파내고, 코를 자르고, 손가락을 하나씩 꺾어주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가치도 없는 놈이었다.
제 놈 딴에는 절대 걸리지 않을 희대의 배신을 꿈꾸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기도 했다.
다만 문제는, 그 배신을 당한 이들 중에 클라우스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분 적당히 하시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요.”
시종장과 전사장의 칭찬 세례를 막아 세운 건 재무관 메이로어.
굉장히 사무적인 목소리에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은 모습은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이었다.
처음에는 저 딱딱한 자세나 목소리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율리아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사방에 자꾸 뭔가를 보내니 더 수상했다.
나중에 가서야 그 편지들이 그녀가 지방의 귀족들을 마왕성으로 세금을 보내라는 회유서임을 알긴 했지만 그 때는 너무 늦은 때였다.
“미안합니다, 메이 재무관.”
“사과를 할 행동을 하지 마세요. 전사장님. 그리고 메이로어입니다. 똑바로 불러주세요.”
그래, 저렇게 차갑게 굴어대니 누가 저 여자를 가까이 하고 싶을까.
의심을 받아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손절하기 바빴지.
정작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던, 마왕가에 있어 꽤나 유능한 인재였는데 말이다.
“허허. 메이로어 재무관님. 너무 날카롭게 굴지는 마십쇼. 전사장은 그저 메이로어 재무관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제 업무가 더 중요할 뿐이에요.”
다 알고 들으니 지금이야 정말 제 일에만 집중하고자 하는 여인이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켜보면 뭔가 뒤가 구린 인물로 보일 뿐이다.
“얼른 마왕 전하께서 보내셨다는 것부터 확인하죠. 지금도 돈이 들어갈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에요. 이러다가 무슨 사달이라도 나기 전에 얼른요.”
메이로어의 재촉에 두 남성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스는 그들의 대화를 끝까지 듣고 있다가 세 남녀를 따라서 위치를 옮겼다.
“어서 오세요. 별이 참 아름다운 밤이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갑자기 날씨가 흐려질 때도 있지요.”
“…어머, 그러면 우산을 준비해야 할까요?”
“구름이 끼기 전에 얼른 그래야지요.”
율리아와 클라우스가 미리 알려준 대로 암호를 주고받는 이들.
서로의 존재가 확실하게 확인되자 마족 여인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여기서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기다리는 동안의 침묵이 생각보다 더 길어지자 헤에타리가 슬쩍 입을 연다.
“얼마나 큰 자금이기에 마왕 전하께서 마왕성을 비워도 좋으니 여기까지 오라 하신 걸까요.”
“자세한 말씀은 없으셨으나 분명 마왕성에 필요한 만큼은 되겠지요.”
“마왕성이 하루에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제대로 아실지 모르겠네요. 마왕께서 아카데미로 향하신지 한 달여 만에 마련하실 수 있는 금액이 절대 아니에요.”
갑작스레 찬물을 끼얹는 메이로어였다.
덕분에 칼라굴의 표정이 조금은 굳어지고 헤에타리는 난감한 웃음만 흘릴 뿐이다.
그리고 클라우스는 킥킥거리면서 메이로어 재무관을 타박했다.
‘이 여자야. 그게 너 딴에는 이성적이고 침착한 반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초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인다고. 저 날카로운 성격 안 고치면 큰일 날 마족이라니까.’
클라우스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사라졌던 마족 여인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를 잔뜩 뒤집어쓴 이들 대여섯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저마다 꽤나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든 채였다.
“확인해보시죠.”
휙!-
무력으로 따지면 전사장 헤에타리, 그리고 마왕가에서의 짬밥을 따지자면 칼라굴.
하지만 그들을 전부 제지하고 메이로어가 또 직접 나선다.
재무관으로서 자금에 관한 부분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겠지만.
저럴 때마다 참 상관이나 동료, 그리고 부하들에게 도통 사랑 받을 수 없는 직장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럴 수가.”
그런 메이로어의 입에서 정말 진심 어린 감탄,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흘러나온다.
재무관의 평소 언행이 항상 차갑고 또 잔잔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반응은 꽤나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메이로어 재무관님?”
“왜 그럽니까?”
“…마, 말도 안 돼요. 이게, 이게 이렇게 많이 올 수가… 도대체 무슨?”
칼라굴과 헤에타리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메이로어는 다만 주머니 안을 들여다 보면서 연신 감탄을 토해낼 뿐이었다.
결국 직접 이유를 알아보기로 한 두 남성이었고, 곧 그들 역시 재무관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허어?”
“시종장. 이거 지금 제가 보는 게 진짜가 맞습니까? 이거 아무래도….”
“동부에서 쓰이던 백금화가 맞습니다. 그것도 이 주머니 전부에 다 들어가 있지요.”
마족 여인은 은근히 자랑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럴 만한 것이, 동부에서 가장 큰 단위가 바로 이 백금화였다.
금보다도 더 귀하다고 하여 어지간한 귀족 정도는 되어야 만져볼 수 있을 정도,
그런 백금화가 주머니 안에 가득 쌓여 있던 것이었다.
‘안젤리카가 확실히 수완이 좋군.’
띠링-.
클라우스는 손가락 위에 올려둔 백금화를 연신 튕겨댔다.
서부 연합에서도 백금화가 쓰이긴 하지만 동부만큼은 많이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젤리카와 붉은 독거미는 어떻게 그 백금화들을 싹 긁어모아서 이렇게 전달 할 수 있었는가.
그 부분은 과거 대륙 전쟁 당시 서부로 들어왔던 마족 측에 원인이 있다.
군수품 조달은 전쟁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부분.
허나 그게 항상 원활하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일단 점령지에서 필요한 것들을 돈으로 사들이려는 방식을 취하려 했었다.
점령지이니 그냥 뺏어도 되겠지만 그리 했다가는 민심을 다독이기가 너무 어렵다.
당장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승전보에 마족들은 점령한 땅의 민심을 최대한 마족 측으로 돌려두기 위해서 약탈을 자제했었다.
그런 일환으로 군자금을 일부 열어 필요한 물품을 충당했는데, 바로 거기에서 동부 측의 백금화가 여기저기 퍼져나간 것이었다.
‘이후 마족들이 다시금 쫓겨나가고 연합 측이 되돌아오자 마족들의 흔적을 지우려고 아주 안간힘을 썼었지. 그들이 지은 요새도 다 허물고, 물건까지 싹 다 없애버렸어.’
그리고 그 물건 중에는 백금화도 껴있었다.
하지만 이성을 지닌 존재라면 응당 욕망도 같이 지닌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마족들의 물건이라 하여 불길하게 여기다가 그들의 세공 기술과 백금이라는 희귀한 물건이 겹쳐져 어느 순간 서부의 백금화보다도 더욱 비싼 것이 되었다.
즉 서부에서도 꽤나 귀한 대접을 받는 그 백금화들인데.
붉은 독거미는 그 백금화를 주머니에 가득 담아서, 그것도 여러 개의 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촌티 나게 동화나 은화 같은 거스름돈을 싹싹 긁어모아 보낸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들의 세력을 증명하듯 아주 대단하게 보낸 것이었다.
“…재무관님?”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줄줄 새고 있는 마왕가를 메울 수 있어요. 아니, 메우다 뿐이겠어요? 그 뒤로도 가득 쌓이게 할 수 있을 정도에요. 도대체 이런 엄청난 자금을 어떻게….”
저들은 이 자금을 다만 율리아가 모은 것이라고 알고 있다.
아직 자신이 율리아 밑으로 들어갔다는 건 비밀 사항이고.
더해서 클라우스는 이번 일을 오롯이 율리아의 활약으로 돌리고자 했다.
율리아는 그럴 수 없다면서 반발하기는 했으나 신하의 활약은 곧 왕의 공이니 당연한 것이라고 그녀를 설득했다.
이런 거대한 자금을 율리아가 구했다 하면 당연히 충성파들의 마음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나중에 가서 실은 클라우스가 이런 저런 도움을 주었다, 하고 말 좀 하면 그만이고 말이다.
“저희는 명을 받은 대로 확실하게 전달했습니다. 착오가 없으시도록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귀빈 여러분.”
“…혹 그 분께서는 잘 계시는가? 어찌 이런 많은 자금을 보내신 건지….”
마치 손녀를 걱정하듯 칼라굴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물론 붉은 독거미 측은 의뢰자에 대해서 절대 말을 하지 않는 게 철칙.
그렇기에 자신들은 다만 말단이라는, 명령을 따른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밤이 길다 하지만 그만큼 보는 눈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마족 여인의 말은, 받을 거 받았으면 얼른 챙겨서 떠나라는 말.
괜히 늦장을 부리다가 일이라도 터지면 서로가 상당히 피곤하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칼라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이것들을 챙겨서 숨겨둔 마차로 이동하자고 했다.
‘…슬슬 움직여볼까.’
칼라굴의 말에 헤에타리와 메이로어가 막 움직이는 순간.
별안간 사방의 불길이 일순간 꺼지고 새카만 어둠이 모두를 덮친다.
- 스킬, ‘최면술’ 이 발동되었습니다. -
“시종장님?”
그 어둠 속에서 메이로어는 조금은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손에 들고 있는 이 묵직한 주머니만이 느낄 수 있는 전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여 걸음을 옮기는 찰나.
툭!-
“아!”
갑자기 뭔가에 부딪친 메이로어가 뒤로 넘어진다.
동시에 뭔가가 번쩍이면서 그녀의 앞에 드러났다.
“저, 전사장님?”
“….”
스르릉-.
그 순간 메이로어는,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한 채 검을 빼어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전사장 헤에타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즐거운 경크 시간이다.’
어딘가에서 창조주의 사악한 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