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9장 - 잘라내야 할 것들
붉은 독거미 측에서 보내는 자금이 마왕성의 인물들에게 닿는 날이 되었다.
몰래 아카데미를 나서 그 뒤를 쫓기 전까지, 클라우스는 한 여인의 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를 해주는 게 아니라 구타를 하고 있었지만.
“학! 흐응!”
“흐아앙! 으긍!”
“아악! 크으응!!”
어느 누가 들어도 너무나 야릇한 신음 소리들이다.
정작 가해지는 건 애무나 성교가 아닌, 쏟아지는 무수한 검격들이었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잘 막아내던 세실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력적 문제가 드러나고 그러면서 틈이 생겨났다.
그 후 클라우스의 공격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고통과 쾌락, 그 사이에서 학학대던 세실리.
종국에는 그 둘 중 하나로 인해 그 자리에 쓰러져서는 거친 숨을 내뱉고 만다.
“흐응, 흐으으….”
“일어나세요. 세실리 생도.”
“네, 네! 일어났습니다!”
“아주 조금은 나아진 것 같습니다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아쉽고 또 아쉬워요. 정말 노력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아무 것도 안 한 채 그저 내 앞에 서는 건 아닙니까?”
“저, 절대 아니에요. 저는 정말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게 없는데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했다, 그게 다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다, 뭐 이런 말은 하지 말길 바랍니다. 정말 노력을 했다면 분명 보이는 게 있어야 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세실리의 성장도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애당초 성인이 될 때까지 마법에만 집중했고 근접 전투 쪽에는 완벽한 문외한이었다.
불과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이 정도 성장이라면 말도 천재라 불리는 게 맞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 여자는 계속 깎아내리고 괴롭혀야만 한다.
세실리에게는 클라우스의 인정이, 그래서 더는 볼 게 없다는 그 칭찬이.
오히려 네게 더는 볼일이 없다, 당장 꺼져라, 뭐 이런 말로 들릴 것이다.
‘진짜 피곤한 여자. 뭐 이런 변태가 다 나왔을까.’
육체적인 고통, 학대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해지는 것 역시 그녀에게는 쾌락이다.
부족하다, 더 노력해아, 개처럼 굴러라, 한심하다, 쓰레기 수준이다.
그런 말들이 오히려 세실리를 자극해서 더욱 더 폭주하게 만들어주는 연료라 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여러 여인들을 만나고 품에 안고 보지를 쑤셔 주었지만.
세실리 같은 경우는 정말 그녀 혼자만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수동적인 여인, 지배 당하고 싶어 하는 여인들이 물론 있기는 했다.
허나 이렇게 직접적인 고통으로 쾌락을 느끼는 이들은 세실리만이 존재했었다.
“교수님. 클라우스 교수님. 오늘은 벌 안 받나요? 오늘도, 오늘도 부족한 부분을 많이 보였는데요. 오늘도 막 엉덩이를 때려주시고 가슴을 꼬집는 그런 거….”
이제는 아예 대놓고 요구까지 해온다.
그에 클라우스는 짐짓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해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날 떠보는 겁니까?”
“네? 아, 아니에요! 저는 그냥 궁금해서….”
“시끄럽습니다. 세실리 생도. 당신은 그냥 내가 교육을 하면 받는 거고, 벌을 주면 또한 받는 겁니다. 그게 어느 때가 될지는 내가 정합니다. 당신은 그냥 군말 없이 따르면 되고.”
“당연해요! 저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시는 묻지 마세요. 내가 검을 들라고 하면 들고, 옷을 벗으라고 하면 벗고, 엉덩이를 내밀라고 하면 내밀면 되는 겁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까.
동부 마족들의 가문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가인 레블랑 가.
그곳의 금지옥엽 막내딸이 실은 상상 그 이상의 변태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실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자신의 그 변태 성향을 본인도 완전히 알아차렸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쾌감을 줄 수 있는 인물이 오직 눈앞의 이 남자일 뿐임을 알았는데.
제 실수로 그걸 놓친다면 아마 죽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다음 주에 무작위로 다시 한 번 볼 겁니다. 그 때 확인했을 때 오늘보다 나아진 점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찌 될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클라우스 교수님!”
이것으로 오늘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났다.
오늘 밤에는 나타샤를 찾아가 한껏 귀여워해줄까 생각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 같잖은 놈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배신자 놈을 으스러트려 놓아야 했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사방에 깔린다.
창가에 앉아 주변을 살피던 클라우스는 곧 아카데미 외부가 텅 비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 방의 창문을 열었다.
- 스킬, ‘암행’ 을 발동합니다. -
- 상대방이 당신을 탐지하지 못 할 확률이 대폭 올라갑니다. -
- 기척을 더욱 정확하게 깔끔하게 지워낼 수 있습니다. -
이 지겹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 클라우스를 유지시켜주는 것, 오직 그만이 쓸 수 있는 스킬들.
그 중 하나를 발동한 클라우스는 가볍게 창틀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오늘 밤에는 업무가 있다고 미리 말을 해두었으니 여인들도 함부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탓, 탓!-
단 일곱 걸음 만에 아카데미의 벽까지 다다른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이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인원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스킬까지 쓴 클라우스의 기척을 눈치챌 수 없는 수준들이었다.
뭐가 자신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지 상상도 못 한 채 다만 제 임무를 다할 뿐이다.
아카데미를 벗어나자 클라우스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냈다.
원래 이 암행 스킬을 쓰면 기척을 거의 완벽하게 지워낼 수 있는 대신 체력 소모가 크다.
당장 처음 이 스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막 썼을 때에는 덕분에 도중에 탈진해서 쓰러진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 스킬, ‘불굴’ 을 발동합니다. -
- 강력한 의지로 체력의 한계가 늘어납니다. -
사령관 자리를 달고 괜히 최전방에서 칼춤을 춘 게 아니다.
바로 이 스킬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이 스킬을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더해서 여인 여럿과 관계를 가져도 오히려 그녀들 모두가 지쳐 떨어지게 할 수도 있었다.
“후우.”
호흡 한 번에 한 걸음씩, 한 걸음에 말도 안 되는 거리를 뛰어넘는다.
암행 스킬의 특성상 이쪽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포착하게 되면 바로 스킬이 종료된다.
그런 이유로 빛으로 가득한 낮보다는 어둠이 깔린 저녁때부터가 적격의 시기다.
붉은 독거미 측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자정쯤이 되면 도착하니 딱 시간이 맞는다.
불굴 스킬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체력 소모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그나마 아카데미의 위치가 국경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긴 하지만.
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면 한나절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이긴 하지만.
그걸 두 다리로 이용해서 두 어 시간 만에 도달한다는 건 다른 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히 클라우스도,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다.
숨이 턱 밑 바로 아래까지 차오르고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갈 수도 있겠지만 혹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닿으면 절대 안 되기에 그럴 수도 없다.
심지어 이 근처부터는 국경이다, 그나마 서부와 동부에서 가장 잘 훈련된 이들이라 할 수 있는 병사들이 사방에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순식간에 발각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체적인 전투력은 클라우스보다 한참 밑이라고 해도 기척을 감지하거나 어둠 속에서 형체를 알아보는 것 하나만큼은 뛰어난 자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찾았다.’
그 어둠속에서 몇몇 인원들이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음을 파악한다.
어쩔 때에는 뇌물을 먹이기도 하도, 또 어느 곳에서는 개구멍을 이용하고.
그러다가 국경 근처의 마을에 다다르자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저 안에 비밀 터널을 파고서 동부 측과 암거래를 하거나 정보들을 모으는 것이다.
이래서 클라우스가 붉은 독거미를 손에 쥐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여인 주제에, 그것도 뒷골목에서 미소를 팔고 몸을 파는 주제에 뭘 하겠느냐.
힘도 약하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을 내던지는 것밖에 모르는 주제에!
그런 방심 속에서 붉은 독거미들의 단원들은 빠르게 세를 불렸다.
결과는 이렇게 서부와 동부를 잇는 비밀 통로까지 가지고 있는 거대한 세력이었다.
‘…진짜 볼 때마다 대단한 여자들이라니까.’
그 노력이 가상하다 못 해 처절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륙 전쟁이 끝난 이후 최대한 몸을 사려야했기에 대놓고 조사를 하지는 못 했지만 단 5년 만에 그 정도 성장이라니, 나중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야 당연한 부분이다.
안젤리카를 목숨 걸고 살려둔 게 나중에 또 한 번 이득이 되는 것을 떠올리면서.
클라우스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경계가 삼엄하다고는 하나 빈틈이 아예 없지는 않고 그 틈을 노리면 어렵지 않게 서부를 벗어나 마족들의 땅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렇게 한 10여 분을 달리니 조그마한 국경 도시 하나가 나타났다.
이곳부터는 서부 연합의 영토가 아닌 마족들의 땅이다.
마족과 인간의 생김새는 큰 차이가 없기에 따로 위장을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최대한 자신을 숨기려고 하면 더 큰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이미 몇 번이나 오고 갔던 곳, 회차를 진행하면서 빈틈을 수도 없이 봐둔 곳이다.
뭐 할 것도 없이 단번에 성벽을 넘은 후 클라우스는 한 건물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적당한 곳을 찾아 잠시 쉬면서 우리의 배신자놈을 어떻게 조져줄까 즐거운 고민을 하던 순간이었다.
‘왔군.’
느껴지는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내밀어본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노년의 남성은 시종장 칼라굴.
전대 마왕, 율리아의 부친부터 마왕가에서 일한 마족으로서 비록 전투 능력은 떨어지나 충성심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인이었다.
어머니를 잃고 그 후 아버지까지 잃은 율리아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가족이라고 느낄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존재이기도 했다.
‘나중에 보약 한 번 해서 먹어야지.’
당연히 저 노인은 배신자가 아니다.
오히려 율리아가 눈앞에서 험한 꼴을 당할 때 분노를 참지 못 하고 피까지 토하면서 죽기까지 했던 골수 마왕가 충성파다.
그렇지 않아도 늙었는데 마왕가의 몰락 이후 덮친 일거리에 치여서 더 망가지고 있는 중이다.
칼라굴이 죽으면 율리아가 꽤나 상심하는데 썩 유쾌하지 않은 타이밍에 죽기에 클라우스는 여태 신경을 써서 그의 수명을 더 늘리는 방법으로 대하는 중이었다.
‘중간에 들어오는 여자가 재무관 메이로어.’
원래는 동부의 세금을 모아 그 세금들이 어디에 쓰여야 할지 정하고 마왕에게 보고하는.
굉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 할 수 있으나 지금은 말단 재무 관리 수준에 불과했다.
사실 처음에는 정말 마왕가 안에 배신자가 있다면 모두가 메이로어를 의심했었다.
그녀의 출신이 율리아의 숙부를 지지하는 가문이기도 했고 그녀 자신도 딱히 율리아에게 충성한다기보다는 그냥 제 자리가 재무관이기에 거기에만 충실한다는 느낌이 강했던 게 이유였다.
더해서 얼마 되지는 않으나 어찌 되었든 돈이 마왕가로 들어오는 상황에서 그녀에게 오는 보고서들 사이에 정체불명의 편지 여러 장이 끼어 있기도 했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메이로어 본인이 배신자가 아니라고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모두가, 심지어 초창기의 클라우스조차 그녀를 의심했었다.
모든 정황 증거가 그녀를 가리키고 있는데 본인은 아니라고 말조차 하지 않으니 그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알고 보니 배신자는 그녀가 아니라, 결코 배신을 해서는 안 되는.
절대 배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놈이었다.
‘어서 와.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