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9장 - 잘라내야 할 것들
세상 어디를 가도, 어느 시대가 되어도 배신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게 소설 속 세상이든, 그리고 인간이든 요정이든 수인이든, 그리고 마족이든.
충성하는 자가 있다면 반대로 기회만 되면 배신을 하는 놈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고의 배신자는, 믿을 수 있는 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후. 마지막에 아주 거하게 뒤통수를 날려버리는 놈이지. 당하는 입장에서는 뼈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현재 율리아 휘하에 남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이들은 마왕이 곧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여 노선을 갈아탔다.
그게 아니라면 살길이라도 도모하기 위해서 중립파로 돌아섰다.
절망적인 상황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였다.
율리아의 곁에 남은 자들은 그런 순간에도 마왕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은 자들이다.
라고, 다른 이들의 시선에.
그리고 율리아의 마음에 그리 정리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안에 배신자가 또 있다는 거다.’
아직 율리아 쪽 회차를 많이 진행하지 못 했을 무렵.
배신자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 하던 놈에게 제대로 당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본인은 목이 잘렸고 그 전에 이미 율리아는 모든 충성파가 보는 앞에서 제 숙부에 의해 잔혹하게 강간당하고 실신하기까지 했다.
그 이후 클라우스는 제 뇌리에 그 놈의 이름을, 생김새를 선명하게 박아두었다.
하다못해 시체의 냄새까지 맡으면서 아주 철저하게 자신에게 각인시켜두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회차를 반복하던 일단 넌 철저하게 죽이고 또 죽여주마.
그 끔찍한 장면을, 눈앞에서 율리아가 겁탈 당하는 장면을 보게 만들어준 그 놈.
눈깔을 파내고 내장을 꺼내서 하나씩 씹어 먹어도 모자랄 바로 그 자식.
클라우스는 이번에도 그 배신자 놈을 아주 산산이 으깨서 똥통에 흩뿌릴 생각이었다.
“그러면 혹시 클라우스, 당신이 생각하는 배신자가 있나요? 이미 우리 동부의 정세를 죄다 파악하고 있을 정도면 대강의 이름들은 다 알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아요. 다만 항상 조심을 하자, 이런 뜻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증거가 없다.
그리고 그놈은 여태껏 충성을 다해서 율리아와 그의 부친을 섬기는 척을 해왔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율리아라고 해도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당장 그가 정말 배신자이냐 아니냐는 둘째 치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이들의 시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괜스레 배신자로 의심했다가는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충성파들에게 그야말로 정을 찍어 조각을 내는 것과 다름이 없을 수준이었다.
여태껏 모시던 주군이 갑자기 누군가를 의심한다.
그런 모습은 곧 그 의심의 대강이 내가 될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이든 마족이든 억울한 의심을 받게 되면 실망을 하게 되고 분노하게 된다.
율리아도 그걸 잘 알기에 함부로 남은 이들을 의심할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아직은 바로 잘라내기가 좀 모호하지. 증거도 없고 나머지는 정말 율리아에게 충성하는 자들이니까. 괜히 그들을 흔들면 오히려 나중에 피곤해지는 법이다.’
해서 클라우스는 미끼를 던지기로 했다.
수초 사이에 숨어서 때만 기다리던 놈이 도저히 물지 않고서는 못 배길, 그런 미끼.
한 입에 확 물어 채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을 먹음직스러운 미끼 말이다.
“연락은 해두었습니까?”
“네. 일단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 중 셋이 그쪽으로 향할 거예요.”
“정확히 누가 오는 겁니까.”
“시종장 칼라굴. 재무관 메이로어. 그리고 전사장 헤에타리. 이들 셋입니다.”
이름 중 하나를 듣는 순간, 클라우스는 또 한 번 맹렬한 분노가 타올랐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일 것이다.
이미 수도 없이 죽이고 또 죽인 놈임에도 이름만 들었다 하면 여전히 이런 반응이었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율리아도 이제 꽤나 실력에 물이 올랐다.
조금만 더 살기를 흘렸다면 아마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을 수도 있다.
클라우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그 자식은 이번에도 죽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고 가혹하게, 본인은 물론이고 식솔들까지 전부 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최후를 선사해주리라 클라우스는 또 한 번 결심했다.
“다들 원래는 마왕성에서 꽤나 대단한 힘을 누릴 자들이군요.”
“실상은 부려야 할 이들조차 남지 않아서. 혹은 믿을 수가 없어서 스스로 직접 움직이는 자들이지만요.”
그런 그들이 무척이나 고맙다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짓는 율리아.
허나 저 미소도 나중에 가면 배신감에 가득 찬 비틀린 냉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정말 누구를 믿어야 할지 한동안 방황도 하게 된다.
바로 그 타이밍에 마지막 한 발까지 내딛으면 이제 율리아는 완벽하게 자신의 것이 되리라.
“현재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마지막 남은 근위병들만 해서 백 여 명에 그나마 저를 따르겠다는 이들의 사병들까지. 그들 모두를 합친다고 해도 8백이 채 안 될 거예요.”
말 그대로 한줌 밖에 되지 않는 규모다.
동부의 마족 전체를 아우르는 마왕성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8백이 전부란다.
대륙 전쟁으로 인해 서부와 동부의 인적 자원이 많이 소모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동원할 수 있는 정규병으로만 서로가 3만 이상은 남은 상황임을 알고 있다.
헌데 그 상황에서 그냥 귀족도 아니고 마족을 대표하는 왕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8백.
이건 제아무리 그 8백이 정예 중의 정예라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심각하군요.”
클라우스는 제 감상을 숨기지 않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덕분에 율리아는 잠시 얼굴을 붉히며 부끄럽다는 기색을 내비쳤으나 곧 고개를 내젓는다.
“제 탓이에요. 저 때문인 거죠. 제가 어리석어 믿지 말아야 할 이들과 믿어야 할 이들을 구별치 못 했고, 그로 인해서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어요. 그래서 다 떠난 거죠. 그들을 탓할 생각 없어요. 결국 모두가 살기 위해서 이러는 것인데. 제 곁이 다만 죽음만이 남은 곳이었다면 떠나는 게 당연해요. 오히려 떠나지 않은 이들이 비정상으로 보일 정도로요.”
“그렇게 말하면 나도 비정상이 되지 않습니까?”
슬쩍 농담을 날려주자 율리아는 클라우스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짓고 만다.
괜스레 자신을 비하하는 발언이 나오자 자신을 감싸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대로 남자의 푼에 안겨왔다.
“…솔직히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요. 당신이 왜 나를 선택했는지.”
“이유는 다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알고 있어요. 인간들은 애당초 당신을 버렸고, 요정들은 너무 쓸데없이 너무 자존심이 세서 간다고 해도 얼마 가지 못 할 것이고. 수인들은 당신의 부관 때문에라도 조금은 불편하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생각해도 우리 마족들에게 귀의하는 것만큼 이상하지는 않잖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가진 악감정이 많다, 이게 가장 큰 이유겠죠.”
“네. 솔직히 말하면 걱정이 들어요. 당신은 이미 제게 충성하겠다 약조를 했지만 다른 이들이 과연 그걸 받아들일지. 나중에라도 인간 귀족들처럼 당신을 몰아세우지는 않을지.”
없을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 나오게 된다.
인간이라서, 대륙 전쟁에서 자신들을 패퇴시킨 남자라서, 그래서 믿을 수 없다고.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서 왔는지 모른다, 혹여나 거짓 항복이면 또 어쩔 것이냐.
온갖 추측과 음해가 난무하는 건 으레 있는 일이었다.
자신과 마족은 7년의 기간 동안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당연한 결과다.
적과의 동침은 지휘고하와 신분을 막론하고 항상 불편한 법이다.
‘그래서 내가 널 이렇게 가지고 있는 거잖냐.’
세상 어느 누구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본인도 모르겠지만.
율리아는 외부의 방해가 없다면 그야말로 최강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여태까지는 온갖 시달림으로 인해 제 능력을 꽃 피우지 못 했지만.
일단 주변만 안정시켜주면 바로 그 안에 있던 능력을 확 이끌어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것을 흐릿하게나마 눈치 채서.
그래서 그런 이유로 끝까지 율리아의 곁에 남은 자들도 있을 것이다.
왕을 바로 곁에서 모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를 살피는 능력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상대를 살피는 것으로 보았을 때 율리아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느꼈다면.
마지막까지 희망을 걸고서 흉복을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배신으로, 결정적인 공을 세우려고 하는 기회주의자일 수도 있겠지. 실제로 그 놈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뭐가 되었든 일단 두 가지는 확실하다.
하나는 현재 율리아가 보유한 전력이 말 그대로 보잘 것 없는 모래 한 줌이라는 것.
그리고 그리도 힘든 상황 속에서 기가 막히게도 배신자가 숨어있다는 것.
“그래도 클라우스, 당신 덕분에 한 시름은 덜었어요. 숙부가 자금을 완전히 막아버려서 남은 이들에게 봉급조차 제대로 지불하지 못 할 정도였으니까.”
“꼬박꼬박 숙부라고는 부르는군요.”
“…부왕께서는 비록 숙부에게 실망했으나 끝까지 아우로서 대했어요. 저 역시 부왕의 뜻을 받들어 비록 적이기는 하나 또한 숙부로서 최소한의 대우는 할 거랍니다.”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에 가서 수련이라 더 하지 그래요. 아까 보니까 나타샤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데.”
빈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원래는 마력이 발목을 잡아서 2차 대륙 전쟁이 터지고 나서도 제 활약을 못 하던 나타샤다.
하지만 이번에 클라우스가 그 마력을 풀어줬기에, 최소한 발목은 잡지 않게 해주었기에.
현재 나타샤는 아카데미에서 근접 전투로는 이길 수 있다 자신할 생도가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요정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마족 생도들조차 그녀의 근접 전투 능력을 보고서는 ‘발군이다.’ 라고 솔직하게 인정했을 정도다.
“…응원은 못 해줄망정 그렇게 몰아붙이기 인가요?”
“이것도 하나의 응원 아닐까요? 율리아의 상대가 나타샤이고 그녀의 상태를 이렇게 몰래 알려주면서 조금 더 힘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교수로서 공정성을 뒤로 하고 지금 율리아를 챙기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율리아는 그게 그렇게 되나? 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다 말고 은근한 눈빛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의 손을 붙잡고는 제 가랑이 사이로 가져다댄다.
“…뭐하는 겁니까?”
“응원해줄 거면 조금 더 부드럽게 해줄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이렇게?”
“알고 보니 진짜 밝히는 마왕님이군요.”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랑 하는 게 좋기도 하고, 여기를 벗어나 마왕성으로 돌아가면 이제 이럴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 말대로, 교수와 생도의 관계는 아카데미에서가 끝이다.
마왕성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율리아는 왕으로서, 그리고 클라우스는 그런 왕의 신하로서 서로에게 지켜야 할 예의를 지키면서 다만 고요히 지낼 뿐이다.
물론 도중에 참지 못 하고 서로를 한껏 탐할 수도 있겠지만 아카데미와 같은 관계, 그리고 분위기를 내기는 꽤나 힘들 것이다.
“그러면 내기 하나 할까요?”
“무슨… 응읏!”
팬티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오는 남자의 손길.
그리고 부드럽게 보지를 애무하는 느낌에 율리아가 바로 교성을 토해낸다.
얼른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 허리와 엉덩이까지 살살 돌리는 모습은, 정말 색욕의 여신이 있다면 바로 이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3분 동안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죠.”
“만약 소리를 낸다면요?”
“오늘은 하루 종일 구르는 겁니다. 침대가 아니라 대련장 바닥에서 말이죠.”
“…조, 조금은 무서운 내기네요.”
세실리를, 나탸사를, 그리고 자신을 대하는 걸 봐서 안다.
평소에는 몰라도 일단 대련장 위에 올라가면 사람이 바뀐다.
정말 죽일 듯이 몰아붙이는데 그 모습이 가히 악마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그래서, 포기입니까?”
“누가 포기한대요? 얼른 시작하지 않고 뭐하는 거죠, 클라우스?”
자신만만한 마왕의 목소리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짓고는 손을 움직였다.
곧 율리아의 보지가 조금씩 젖어가면서 입술을 앙다문 채 어떻게든 버티려는 여인의 몸짓이 방에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