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9장 - 잘라내야 할 것들
“으으응….”
흐릿하던 시야가 점점 밝아진다.
카엘라는 그 속에서 천천히 제 몸을 움직여보았다.
가랑이 사이에서 아릿한 통증이 전해져 오는 게 설마,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일어났구나, 카엘라.”
“사, 사령관님.”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서는 자신을 부르는 클라우스.
카엘라는 그런 남자를 바라보다가 제 천막 내부를 살펴보았다.
태풍이라도 분 듯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테이블은 넘어져있고 지도들도 다 넘어가서는 아주 난리통도 아니었다.
이미 거기까지만 해도 정신이 아찔한데, 사방에 흩어져 있는 액체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것은 투명하고 또 어떤 것은 허연 색을 내뿜는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서, 설마.”
“이제 와서 기억 안 난다고 하면 나로서는 상당히 곤란할 거야.”
설마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
비록 이성이 날아가고 본능에 지배당하여 몸을 놀리긴 했지만.
카엘라는 그 순간에도 카엘라였고,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주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참지 못 하고, 그만 클라우스와 아주 거하게….
“흐, 흐아아앗?!”
거기까지 생각한 카엘라는 제 얼굴을 감싸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도대체 어쩌자고!
감히 자신이 저 남자와 관계를 가졌단 말인가, 수컷과 암컷이 되었단 말인가!
미련한 것아! 더 참았어야지, 더 인내했어야지, 더 버텨냈어야지!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도대체 이 무슨 얼굴조차 들기 힘든 부끄러운 일인가!
“사령관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미 할 거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끄흐으… 정말 죄송합니다….”
“아서라. 나도 너도 아주 제대로 즐겼을 뿐이다. 괜찮다, 카엘라.”
클라우스의 대답에 카엘라는 더욱 더 부끄러웠다.
아까 전 자신이 외치던 말, 행동하던 것들 전부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 카엘라 보지에 팡팡해주세요!! -
- 사령관님의 자지! 온다! 온다앗!! -
- 보지로 또 가요! 카엘라 보지 또 가! 가버려어어엇!! -
“…으아아아아아!!”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태까지 참았던 것들이 터졌다곤 하지만, 그렇게나 클라우스의 품을 원했다지만.
떠올려보니 정말 부끄러운 말들을 너무나도 많이 내뱉었다.
그보다 더 창피한 행동들을 수도 없이 보이고 말았다!
미쳤구나, 네가 정말 미쳤어! 카엘라는 연신 자책을 하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여태 잘 참아왔는데, 수도 없이 많은 유혹 앞에서도 멀쩡했었는데 어째서….
“카엘라.”
“네, 네. 사령관님.”
“이리 와봐.”
손짓으로 자신을 부르자 카엘라는 조심스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혹 혼이 난다거나, 실망했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지만 클라우스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는 게 다였다.
“넌 잘못 한 거 없다. 내가 대놓고 유혹했고 이성을 흔들었지. 얼른 암컷으로 돌아오라고. 그래서 널 유혹하는 이 수컷에게 안기라고. 그렇게 말이다.”
“….”
“그러니까 넌 수인으로서 아주 당연한 반응을 보인 거다. 그게 전부야.”
“아닙니다. 사령관님께 그런 감정을 애당초 품으면 안 됐었는데. 제가 불충하게도 그런 마음을 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빈틈이 드러난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라니까 그러네.”
“허나 어찌 되었든 제가 그런 마음을 품었기에….”
돌고 돌아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는 카엘라였다.
이래서 섹스를 할 때는 부관 카엘라보다 호랑이 수인 카엘라가 더 낫다니까.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클라우스는 살며시 그녀의 귀를 만져주었다.
보들보들한 감각이 들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흐으응….”
그리고 카엘라 역시, 귀를 만져주는 클라우스의 손길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입가에 점점 행복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좋아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괜히 이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를까 억지로 참아내고 있다.
“몸은 괜찮나?”
“네?”
“네가 하도 매력적이어서, 나도 제어를 충분히 하지 못 했거든.”
그 말을 들으니 얼추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자신이 매달리던 순간마다 클라우스도 거절치 않고 계속 허리를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셀 수도 없이 사정이 계속되었고 배 안이 가득 찼다.
“….”
슬며시 제 배를 만지작거리던 카엘라는 갑자기 고개를 떨구기 시작했다.
그 반응은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르고 고해성사를 앞둔 이의 모습처럼 보일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또 왜 그래. 괜찮다니까. 나도 너만큼이나 즐겼고, 또 즐거웠다.”
“그게, 그게 아닙니다. 지금 제가 사죄를 드리는 건… 다른 부분 때문입니다.”
다른 부분 때문에 그런다? 클라우스가 그리 반문하니 카엘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제 배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리고 자신을 안아주고 있는 남성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께서 이렇게나 마음을 써주셔서 제게 씨를 넣어주셨는데. 심지어 아주 가득 넣어주시는 아량을 베푸셨는데… 흑, 흐윽! 흐으으윽!!”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더니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카엘라.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다.
이미 지금의 상황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는 클라우스마저도 순간 가슴이 덜컥일 정도였다.
혹시 내가 뭘 잘못 했나, 뭘 했기에 이 여인을 울린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 실은… 실은, 저 발정기가 아니었습니다.”
“으음?”
“이렇게나 씨를 많이 받았는데… 아,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때였습니다. 흐윽! 흑!”
수인 여성들은 다른 종족의 여성들과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아이를 밴다.
발정기라고 하여 각 종족마다 정해진 때가 있는데 그 때 성관계를 가져야만 아이가 생긴다.
물론 그 때가 아니더라도 성교는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아이는 가지지 못 한다.
거기에 더해서 인위적으로 오는, 쉽게 말해 외부 자극으로 찾아오는 발정기에서도 임신은 되지 않는다.
오직 그 종족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정해진 발정기 기간에만 부모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실 발정기가 아니다, 네가 이성을 잃은 것도 그냥 마음에 빈틈이 많아서일 뿐 발정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뭐 이런 말인 건가?”
“흑, 흑….”
발정기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래서 아기를 가질 수 없었던 때였음이 얼마나 아쉬웠던 것인지.
카엘라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로 고개조차 제대로 끄덕이지 못 하고 있었다.
실상은 클라우스가 카엘라의 발정기가 지금이 아님을 알고서 대놓고 유혹한 것인데 말이다.
“울지 말고. 질문에 대답을 해야지.”
“네. 그렇습니다….”
끝내주게 아름다운 여인이,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눈부신 형태의 나신으로.
가슴은 여전히 터질 듯 부풀어있고 보지에서는 애액과 정액을 흘리면서 품에 안겨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면서 한다는 말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때에 하필 일이 이렇게 되어서 너무나 슬프다고 훌쩍거리고 있다.
귀엽다, 예쁘다, 뭐 이런 부분들을 떠나서.
이렇게 되면 무모한 도전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지 않은가.
비록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원래 한 번은 들이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할 수 있었다.
“카엘라.”
“네, 사령관니…이이이임?!”
갑자기 퍼뜩 놀란 여체가 다급하게 남자의 품에 안겨온다.
도대체 어느 틈에 또 잔뜩 풀어진 보지에 자지를 쑤셔 넣은 것인지.
클라우스와 카엘라가 또 다시 하나가 되어서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중이었다.
“발정기가 아니라서 슬프다고 했지. 허면 그 슬픈 감정, 이걸로 털어내라.”
“힉! 흐윽?! 이, 이러시면 안 돼요! 저, 저 지금 아기 못 가져! 흐으윽!!”
“그게 중요한 건가? 지금 내가 널 이렇게 안고 있는데?”
“아, 아아! 마, 맞아요! 안 됩니다, 사령관님! 이, 이 이상은 안 돼요! 사령관님께는 저 따위보다 더 훌륭하신 여인들을 맞이해야 할… 아으응!!”
이미 너로도 충분해. 충분하다 못 해 아예 흘러넘칠 지경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카엘라의 보지를 다시금 맹렬하게 탐하기 시작하는 클라우스였다.
* * * * * * * * * *
붉은 독거미 측에서 1차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편지를 보내 지정한 곳으로 필요한 자금을 수송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에 율리아는 대륙 서부와 동부의 중간 지점에 있는 마족 측 경계소와의 접선을 일러주었다.
겉으로는 경계를 감시하고 있는 곳이었지만 실상은 마왕성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중간 지점이라는 말과 함께.
“그쪽 경계소로 은밀히 사람들을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알려준 암호는 확실하게 알아들었냐고 확인하셨고요?”
“네. 그리고 그리 허투루 일을 할 여인들은 아닙니다. 여인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 험한 곳에서 여인의 몸으로 살아남다 못 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곳이에요.”
클라우스의 말에도 율리아는 영 찝찝한 얼굴이다.
그래도 명색이 자신은 마왕이고 클라우스는 전쟁 영웅인데.
손을 벌릴 수 있는 곳이 암흑가의 웬 이상한 집단이 전부라는 사실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지금쯤이면 아마 동부가 꽤나 시끄러울 겁니다.”
“이전에 클라우스, 당신이 손을 써두었다고 했었죠. 그것 때문인가요?”
“여태 조용하던 중립파가 갑자기 흔들리니 당신의 숙부를 지지하는 자들도, 당신을 지지하는 자들도, 그리고 중립을 고집하던 자들도. 아마 모두가 당황했을 겁니다.”
아직 아카데미 쪽으로 확실하게 전해지는 건 없지만 클라우스는 확신할 수 있다.
심지어 지금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이제는 전부 다 외워두고 있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파악한 율리아의 숙부는 급히 내부부터 정리하려고 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다가 아님을 직감할 거다. 그리고 다급히 아카데미로 더 많은 이들을 보내게 될 거야.’
클라우스가 이곳 대륙 아카데미를 아직 떠나지 않는 이유.
충분히 율리아를 데리고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음에도 여기에 머무는 이유.
바로 여기 있으면 다른 이들의 방심을 이끌어내기 아주 좋은 게 그 이유였다.
당장 율리아를 견제하는 자들도 그렇고, 자신을 견제하는 자들도 그렇고.
행적이 완전히 노출되는 이 아카데미에서 지낸다고 하면 긴장을 풀 수밖에 없다.
적당히 감시하고자 하는 이에게 사람을 붙여두고 제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 율리아 입장에서는 복수의 칼날을 갈기 좋은 최고의 순간이고.
클라우스에게는 마왕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까지 제대로 박히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율리아. 자금을 받으면 바로 마왕성으로 이송하지 말라고 하세요.”
“네?”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어요.”
“….”
순간 율리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가 곧 풀어진다.
떠날 사람, 배신할 사람, 포기할 사람, 그렇게 다 떨어져 나가고.
남은 건 이제 오롯이 마왕인 자신에게 충성을 다 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수하들 사이에 또 배신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유쾌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상당히 불쾌한데, 당신이 그리 말하니 갑자기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미안합니다, 율리아.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에요. 여태까지는 별 게 없어서 활동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바로 이 순간만을 위해 몸을 숨기고 있을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들리네요.”
“확신은 아닙니다. 다만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