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8장 - 호환 (虎患)
이건 꿈이다, 그래. 꿈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풍경이, 지옥에서나 볼법한 장면이 펼쳐질 수가 없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사람이었던’ 것들, 온 천지에 뿌려진 피, 나뒹구는 살점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극히 멀쩡하던 아지트가 이리 변하다니.
이럴 수가 없다, 이럴 수가 없어. 그래, 이건 정말 가능한 일이….
그르르-.
허나 귓가에 들려오는 으스스한 맹수의 울음소리에 남자는 이게 현실임을 깨달았다.
오금이 저려오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아무리 다리에 힘을 주려고 해도 도통 제 몸이 말을 들어먹지를 않았다.
나름 칼밥 좀 먹었다고 생각했고, 사선도 꽤 넘나들었다고 여겼고, 그래서 어지간한 두려움 정도는 면역이 생겼을 거라고 자신했었는데.
“으, 으아아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8월 형제들의 리더였던 화상을 입은 남자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디선가 물이 새는 소리가 들리면서 지린내가 코를 찌른다.
남자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보니 아마 두려움에 못 이겨서 오줌이라도 지린 모양.
터벅, 터벅-.
투욱, 풀썩!
목의 살점이 한 움큼이나 찢겨나간 시체를 아무렇게나 내팽겨 치는 여인.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서서히 다가오는 그 모습은 가히 공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샛노란 안광을 번뜩이면서,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사냥꾼이 다가온다.
그 앞에 선 사냥감은 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미 온몸이 굳어서는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데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사, 사, 살려, 살려주세요.”
간신히 입술과 혀를 움직여 나온 첫 마디는 바로 그것.
사냥감으로서 사냥꾼에게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만에 하나 사냥에 싫증이 났다거나, 혹은 이미 충분히 배를 채웠다면 놓아줄 수도 있다.
최소한 도망이라도 한 번 쳐보라고 기화라도 줄 수 있었다.
남자는 그런 자비를 기대하면서 입술을 떼어 연신 중얼거렸다.
제발 살려달라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이렇게 빌겠다고.
“한 번만, 한 번만 넘어가주십쇼.”
“….”
“제발, 제발.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굳어있던 혀와 입술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고민했다.
“있는 돈 다 드리겠습니다. 그 미친년들이 얼마를 지불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보다 몇 배가 되는 돈을 드리겠습니다.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스릉-.
하지만 여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상하게 생긴 단검을, 아니 단검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상한 날붙이를 세울 뿐이었다.
“아우, 아우으…!”
그 싸늘한 예기를 품은 날붙이가 입 사이에 걸쳐진다.
이대로 옆으로 조금만 힘을 준다면 그대로 피가 튀면서 입이 귀까지 찢어질 것이다.
남자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연신 우으으!! 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눈앞에 선 사냥꾼은 싸늘한 미소를 짓고는 다른 손으로 뭔가를 해보였다.
손을 오므리는 듯 한 저 행동은, 입을 다물라는 제스쳐.
남자는 그에 반사적으로 입술을 다물게 되었다.
제 입에 그 무시무시한 날붙이를 품은 그대로 말이다.
“으으읍! 으으으!!”
말 그대로 입에 칼을 물게 된 남자.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안타깝게도 사냥꾼은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스걱!-
살이 찢어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고 사방으로 피가 튄다.
쩍, 하고 벌어진 남자의 얼굴 사이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날붙이.
아니, 섬뜩한 모습의 손톱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남자의 목을 그대로 그어낸다.
푸슉!- 핏! 피잇!-
심장 박동에 따라 잘린 단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쏟아지는 피는 곧 사람의 목숨,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져 소리 없이 절명한 남자.
한 때 뒷골목의 어느 누구도 건들 수 없는 강자라던 8월 형제단의 최후였다.
“….”
그 비참한 최후를 선사해준 호랑이 여인, 카엘라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손톱과 송곳니에 뜯기고 찢어지고 베이고 잘린 시체가 한 가득이었다.
비위가 강한 자들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참상을 본다면 결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수인들도 이 정도로 과하게 사냥감을 대하지는 않는다.
목덜미를 물거나 베어서 단번에 제압을 하거나 다른 급소를 노려 깔끔하게 죽인다.
이렇게 잔혹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으로 대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역겨워.”
하지만 카엘라는 다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손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낼 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건 오직 클라우스, 클라우스, 그리고 클라우스 뿐이다.
자신의 사령관이자 영원한 대장이요 최고로 강하고 멋진 수컷.
그가 명령을 내렸다, 저들은 나의 적이니 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런 클라우스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할 뿐이었다.
퉤엣-.
입안을 우물거리며 혀와 입천장에 묻어있던 피까지 전부 뱉어버리는 카엘라.
당장 클라우스 앞으로 보고를 하러 가야 하는데 이런 역겨운 것들을 머금은 채 감히 그 분의 앞에서 입을 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마침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도대체 이런 쓴 물건을 왜 마시는지 모르겠지만 소독 효과가 있다고 얼핏 듣기는 했다.
퐁!-
술병을 막고 있던 마개를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해서 뽑아버린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한 후 입안에 들이붓고는 잠시 우물거리다가 거하게 뱉어버린다.
“캬악! 캇! 퉤, 퉤퉤! 아으으. 도대체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야.”
이걸 마실 바에 차라리 피를 마시는 게 낫지 않을까.
인간들이나 요정들은 수인들이 사냥을 하여 그 생피를 마시는 관습을 야만적이라고 했다.
수인들 입장에서는 이 사냥감의 힘을 전부 제 것으로 만든다는 상징적인 의미부터.
피에는 몸에 좋은 것들이 많기에 필수적으로 먹어야만 하는 실질적인 이유까지 있음에도.
그들은 그냥 시뻘건 피를 마시는 게 야만적이다, 역겹다, 라고 몰아붙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술이라는 것을 입에 넣어보면.
도대체 인간들은 뭐 그리 잘났다고 수인들에게 야만적이라고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마지막이었지.’
품안에서 클라우스가 손수 만들어준 지도와 약도, 그리고 필요한 정보가 쓰여 있는 쪽지를 확인하면서 카엘라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약하디 약한 보통의 인간들이라고 해도 그들을 일일이 살해하면서 복잡한 지하와 여러 아지트들을 전전하다보면 시간이 많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클라우스가 내어준 이 정보들로 인해 그런 시간들을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리 준비하신 거지? 비밀 통로부터 시작해서 어디를 시작점으로 삼고 어디를 마지막으로 지정해서 싹 정리를 해야 하는지. 마치 수십 번이나 모의전을 돌려보신 것 같아.’
만약 이게 사냥이 아니라 전투였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대단한 일이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적을 분쇄할 수 있는 정보라면 제아무리 탄탄한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해도 그대로 돌파당하여 완전히 무너졌을 것이 확실했다.
초식동물들이 무리를 만들어 외곽에서 맹수들의 공격을 막아내면 꽤나 난처할 수 있어도.
그 맹수가 안으로 파고들어 그 무리를 산산이 조각낸 후 달려든다면 그냥 여기저기 널려있는 먹잇감이 될 뿐이다.
‘역시 사령관님. 나의 대장님. 이 세상 최고의 수컷이시다.’
이쯤하면 충분하다, 원래는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하는 게 맞겠지만.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남자는 오히려 흔적을 일부러라도 남기고 오라고 했다.
누군가가 이들을 공격하여 아주 참혹하게 궤멸시키고 시체들을 마치 경고하듯 걸어두었다.
클라우스가 정확히 누구를 노리고 어떤 효과를 원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카엘라는 그 부분까지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은 다만 그의 충실한 수족, 충성스러운 부관일 뿐이다.
싸우라 하면 싸우고, 죽이라 하면 죽이고, 사냥하라 하면 하면 된다.
그 외의 모든 일은 클라우스가 알아서 해주니 걱정이 없다.
다만 시킨 일만 잘 하면 절로 행복해지는 칭찬이 돌아올 뿐이었다.
‘얼른 돌아가자. 사령관님 곁으로.’
대충 온몸에 묻은 피를 닦아낸 후 카엘라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몸짓이 어찌나 가볍고 행복해 보이는지, 마치 낭군님을 보기 위해 잔뜩 치장을 하고서 그의 집으로 찾아가는 여인을 보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상쾌한 밤공기가 카엘라를 맞이한다.
여태 지하의 퀴퀴한 냄새와 기분 나쁘게 진득한 습기를 조우하다가 바깥으로 나오니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후아.”
가볍게 몸을 풀면서 어둠속으로 사라질 준비를 하던 호랑이 여인.
그러다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사냥을 즐기던 곳에서 여러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었다.
호랑이 귀가 연신 쫑긋거리고 입꼬리가 서서히 위로 올라간다.
‘드디어 봤네.’
원래라면 최대한 늦게 발각될 수 있도록 주변까지 싹 다 죽여 없앴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스가 원한 건 은밀함이 아니라 경고였다.
죽여야 할 놈들은 최대한 빠르고 또 잔혹하게 처리하고 오늘 일을 퍼트려야 할 놈들은 살려두는 게 오늘 카엘라가 할 일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기에 안으로 들어가려던 이들이 죄다 구역질을 한다.
아마 저들은 한동안 자신들이 봤던 그 광경을 잊지 못 하고 두려움에 떨 것이다.
카엘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선 건물 사이로 몸을 날렸다.
어느 곳은 좁고 또 어느 곳은 넓었으며 아직 사람들도 꽤나 많이 다녔기에 누군가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음에도 결국 어느 누구도 호랑이 여인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 했다.
타탓!-.
늦은 밤에서 막 새벽으로 넘어가는 때에, 마침내 조랑말 여관에 다다른 카엘라.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관 벽을 두어 번 디딘 후 힘차게 도약했다.
그리고는 아주 사뿐하게 클라우스가 머물고 있는 방의 창틀을 밟고선 안을 살폈다.
‘주무시나?’
딱히 움직인다는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해서 카엘라는 클라우스가 자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최대한 조심스럽고 은밀한 발걸음으로 막 방안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왔냐.”
“히익!!”
고양이든 호랑이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예상치 못 한 목소리가 나오면 놀랄 수밖에 없다.
정말 식겁한 카엘라가 반사적으로 손톱을 뽑았다가 곧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곤 다급하게 경계심을 거두었다.
“사, 사령관님.”
“아침이 다 되어서야 돌아올 줄 알았는데. 참 급했나보구나. 이렇게 빨리 일을 끝내고 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 했는데.”
예상치 못 했다는 인간이 기척까지 숨기고 카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부분에 충분히 의문을 품을 수도 있었지만, 마치 언제 올지 다 알고 있었다는 그림이지만.
호랑이 여인은 다만 저 남자가 자신의 감조차 속이고 기척을 지웠었다는 것에 놀랄 뿐이었다.
“이리 빨리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령관님 덕분입니다.”
“내 덕이다?”
“사령관님께서 내어준 지도와 정보가 무척 유용했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예상하신 위치로, 예견한 속도로 도망가더군요. 덕분에 편하게 몰이사냥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불편한 부분은 없었고.”
“전 괜찮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다만 사령관님의 명령을 따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습니다.”
“…고맙다, 카엘라. 그리고 수고했다.”
그르릉-.
세상 어떤 이가 저 최고의 수컷에게 고맙다는 말을, 그리고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있다고 해도 자신만큼 많이 듣지는 못 했을 것이다, 분명 그러할 것이다.
카엘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헤실헤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보다 몸이 많이 더러워졌겠는데.”
“아, 이건 제가 바로 나가서 처리를….”
“물 받아놓았다.”
“…네?”
“씻으면 된다.”
“저기, 사령관님. 저는 그냥 제가 알아서….”
“그래? 네가 오늘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씻겨줄까 했는데.”
그 순간, 호랑이의 두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