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7장 - 붉은 독거미
붉은 독거미의 아지트를 나서는 클라우스를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안젤리카의 방을 나서니 단원으로 보이는 여인 하나가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또 다른 길로 자신을 인도하는 여인의 뒤를 따르는 클라우스.
곧 그는 도시 뒷골목 어귀에 위치한 한 술집의 창고에서 나오게 되었다.
“살펴가세요.”
꽤나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단원을 흘끗거리다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길을 걷는다.
프리몬트 백작에게는 무척이나 놀랐을 종업원을 바래다준다고 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는 무척이나 건방지게 굴던 두 귀촉 애송이들을 실컷 잡아두었을 것이다.
명색이 왕국의 권세 있는 귀족인데 키엔마이어 후작에게 치이고 클라우스에게 또 치였으니 알게 모르게 짜증이 쌓였을 텐데 그걸 해소할 만한 상대를 만난 것이었다.
‘아무튼 하나 같이 쓰레기들. 희망이 없다, 이 인간 놈들은.’
자신이 몇 번이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율리아를 암살해보기도 하고 마족들이 인간 측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가지게도 만들었었다.
곧 큰 전쟁이 있을 거라고, 대비하라고 대현자 행세를 하기도 했고 전쟁에 나서 마족의 군세를 상대로 계속해서 승전도 거두어보았다.
하지만 작은 물줄기는 바꿀 수 있어도 큰 물줄기는, 그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어느 곳에서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구멍이 생기고 버티던 둑이 완전히 터지게 된다.
그 거센 물살에 서부 연합은 정말 완전히 휩쓸리게 되며 살아남는 건 저항하지 않고 마족들에게 미리 항복한 자들뿐이었다.
클라우스도 이제는 확실하게 인지했다.
정말 인간들을 위하고자 한다면 그나마 ‘사람’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을 골라내고.
그들을 미리 율리아에게 보여 믿을 만한 인간들임을 인식시켜둔다.
그 후 2차 대륙 전쟁에서 멍청한 돌대가리들이 쓸려나가는 동안 그들의 자치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조그마한 지역을 받아내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괜찮은 요정들이나 수인들도 그런 방식으로 살려두는 게 최고였다.
동등한 관계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복종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율리아는 어떻게 한다고 쳐도 마족 전부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대륙 전쟁에서 서로를 죽고 죽였던 사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고 해서 그 적개심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결코 아니다.
하다못해 본인이 은밀하게 뒤에서 율리아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인간하면 질색하는 마족들의 반발을 최대한 낮추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그런 반발에서 율리아가 가질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명분이다.
클라우스가,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자신을 여왕의 자리에 제대로 올려두었다.
너희가 뒤에서 저울질이나 하고 있을 무렵에 이 인간 남자는 자신을 도왔다!
이런 식으로 나서준다면 아무리 마족들이라고 해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쪽, 이쪽이네.”
꽤나 긴 시간을 걸어 마침내 조랑말 여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를 맞이한 것은 한쪽 테이블을 점하고 있는 프리몬트 백작.
그리고 그 옆에서 여전히 비굴한 표정으로 용서해달라고 조심스레 빌고 있는 두 귀족이었다.
슬쩍 주변을 살핀 클라우스는 여관 안이 무척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님도, 종업원도, 주인도 전부 사라지고 없다.
마치 누가 강제로 내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걱정은 말게. 모두에게 합당한 금액을 쥐어주고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 했으니까.”
“…프리몬트 백작의 주머니가 부디 제 생각보다 더 무거웠기를 바라겠습니다.”
“흠흠. 걱정 말게. 여관의 주인에게는 하루치 음식을 파는 것보다도 더 한 금액을. 여관을 찾은 자들에게는 훨씬 더 좋은 곳에서 머물 수 있는 돈을 주었어.”
“좋군요.”
역시 프리몬트 백작가.
든든한 뒷배인 키엔마이어 후작가 만큼은 아니어도 역시 대귀족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다.
씀씀이도 크고 망설임도 없고 돈 좀 써서 다른 뭔가를 얻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그래. 귀족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지.’
클라우스가 귀족들을 가장 혐오하는 이유.
가진 게 많으면서도 뭔가를 얻고자 할 때 갑자기 속이 좁아지는 것 때문이었다.
최소한 치러야만 하는 가치가 있는데 귀족의 권리, 명예 뭐 이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운운하면서 말 그대로 단가 후려치기를 시전하곤 했다.
없는 놈보다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지방의 약한 귀족이든 중앙의 강력한 귀족 이든 하나같이 그 지랄들이었다.
“그보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연신 빌고 있는 두 놈을 바라본다.
말 그대로 정말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데 하나도 애처롭지가 않다.
오히려 그 비굴한 모습에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해진다.
“프리몬트 백작.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려운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네.”
“저 두 귀족의 뒤통수를 한 대씩 때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절대 제 손을 더럽히지 않는 클라우스.
무엇보다 평민이 귀족을 때리는 것보다 귀족이 귀족을 때리는 게 그림이 더 예뻤다.
그리고 부탁을 받은 프리몬트 백작도 그 정도 부탁은 당연히 들어줄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크게 팔을 휘둘렀다.
퍼억! 퍽!-
“끄억!”
“깩!”
덕분에 앞으로 고꾸라질 정도로 세게 뒤통수를 맞은 두 귀족은 제 머리통을 붙잡고 낑낑댔다.
프리몬트 백작은 대륙 전쟁의 산 증인에 나름 전투에서 몇 번 나가본 인물이다.
멋지게 칼을 휘두르는 건 어려워도 사람 머리 아프게 때릴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있었다.
“그 여인은 잘 바래다주었는가?”
“예.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고 있을 겁니다.”
“부끄러운 것들. 귀족 이름에 똥칠하는 것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대낮부터 여인을 탐하려고 했냔 말이다. 이 머저리들아!”
원래는 귀족과 귀족 간에 지켜야 할 룰이 있었다.
한쪽은 시골 귀족, 다른 하나는 대귀족이라고 해도 결국 그 둘은 같은 귀족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니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헌데 그게 대륙 전쟁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힘이 강하면 무조건 상대방을 압박해도 문제의 소지가 거의 없었다.
평민들을 힘으로 굴복시켜야하다 보니 강한 쪽이면 장땡이라는 것이었다.
“영지전을 취소해달라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
“허면 가서 내 마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있도록. 조금이라도 허투루 하는 모습이 보이면 그때는 정말 단 한 번의 기회도 더 주지 않을 거다.”
프리몬트 백작의 자비(?) 에 두 귀족, 리어만과 피오가 후다닥 날아간다.
아까 전까지 귀족으로 으스대던 꼴은 다 어디 가고 다 망가진 모습만 남았다.
“에휴.”
답답함의 한숨을 내뱉은 프리몬트 백작은 슬쩍 클라우스의 눈치를 보았다.
혹 이 남자가 저들을 당장 이 자리에서 조져두기를 원했다면 자신이 잘못 선택한 건데.
마음에 들지 않아 키엔마이어 후작에게 이번 사실을 알리기라도 하면 당장 후작이 달려와서는 자신을 상당히 귀찮게 할 것이 뻔히 보였다.
“저 둘을 내보낸 걸 보니 따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 모양이군요.”
다행히도 제 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딱히 그 부분에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백작은 여태 여기에서 상대를 기다렸던 이유를 꺼내놓았다.
“그, 아카데미에서 혹 어떤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는 건가?”
“당연히 제 강의를 원하는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허면 혹 그 안에….”
“걱정 마세요. 백작의 두 남매 분들은 거기에 없습니다.”
전투 마법은 일단 기본적인 근접 전투술에 마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강의다.
안타깝게도 프리몬트 백작도, 그리고 그 두 남매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클라우스의 전투 마법 강의보다는 기본적인 일반 마법이 더 급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한편 클라우스의 대답에 프리몬트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제 아들과 딸이 워낙 제멋대로에 호기심도 강한지라 그 클라우스의 강의를 들었을까.
그리고 만약 들었다면 아무 것도 모르고 이 남자에게 무례한 언행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런 걱정이 아주 한가득 들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아카데미로 백작의 자제 분들을 보러 가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아직 한 달이 조금 더 된 것에 모자라지만 벌써부터 보고 싶어서.”
“원래 부모란 다 그런 법이죠. 아이는 아무리 커도 아이 같고, 품에 안고 싶고.”
“자네의 말대로야. 그럴 수밖에 없지.”
“찾아갈 거면 내일보다는 내일 모레가 나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때에 기본 마법과 그 이론에 대한 강의가 없는 날이니까요.”
그러자 프리몬트 백작은 처음 보는,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유용한 정보를 받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는 그런 기운이 전해지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딱 이거면 다 되었다 싶네요. 그러면 슬슬 숙소로 돌아가시죠. 여기 사람들 엄청나게 불편해하고 있을 텐데.”
“알겠네, 알겠어. 아무튼 키엔마이어 후작께는 제발 비밀로 해주게. 그 분이 찾아올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려서 수명이 하루하루 깎이는 느낌이야.”
백작의 넋두리에 클라우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귀족은 어쩔 겁니까? 정말로 영지전을 할 생각은 아니겠죠?”
“자네도 알다시피 내 영지와 그 둘의 영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그래서야 영지전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 성립조차 되지 않지. 조금이라도 이런 생활을 해본 놈이라면 영지전에 대한 말을 꺼낸 순간부터 진심으로 대할 생각이 없음을 깨달았을 텐데 말이야. 아무튼 요즘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들이 더 입을 놀리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
프리몬트 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뒤를 따라 수행원들도 같이 발걸음을 옮기고 잠시 후.
여관 바깥에서 프리몬트 백작의 일갈과 함께 또 누군가가 머리통을 맞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즐겁게 들으면서 잠시 그곳에 앉아있으니 여관 주인이 다가온다.
그리고는 방금 전 나가신 분께서 전부 계산을 해두었다며 그에게 방 열쇠를 주었다.
역시 키엔마이어 후작이 갈구면서도 은근히 챙기는 귀족답게 눈치는 좋다.
그런 이유로 클라우스도 프리몬트 백작을 내다버리지 않는 것이었고.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았기에 클라우스는 주인이 내어준 열쇠를 가지고 2층으로 향했다.
도시에서 꽤 좋은 여관이라는 말답게 방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아카데미 안 그의 방만큼은 아니어도 대륙 전쟁 당시의 천막에 비하자면 천국이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더라.’
아카데미 생활이야 클라우스 본인이 원한다면 더 끌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대륙을 진동시키는 마왕의 비선실세지 아카데미 교수가 아니다.
율리아가 얼른 제자리를 찾고 나타샤는 제 가문을 먹고, 세실리는 진짜 마왕의 새로운 수하가 되며 다른 여인들도 얼른 자신들의 자리로 가야만 한다.
스슥, 스스슥-.
품에서 수첩을 꺼내든 클라우스는 뭔가를 표시하고, 또 지워갔다.
그리고 때로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수첩 몇 장 분량에 뭔가를 빼곡하게 적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렇게 그 행동에 열중하던 어느 순간.
‘…왔나.’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제 딴에는 한 몇 십분 정도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이후 일들에 대해 생각한 것 같은데.
벌써 몇 시간이 흘렀다고 하니 클라우스는 조금 놀랍기도 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서는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를 가리고 있던 후드를 넘기니 요정의 뾰족한 귀와 금빛이 머무는 머리칼.
그리고 마족 특유의 불그스름한 눈동자가 반짝이는 여인이 드러났다.
“빨리 왔군. 밤 정도는 되어야 올 줄 알았는데.”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붉은 독거미의 단장, 요정과 마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안젤리카는 그리 말하면서 방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