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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화 〉7장 - 붉은 독거미 (96/341)



〈 96화 〉7장 - 붉은 독거미

자리에서 일어난 안젤리카는 뭔가를 달그락거리더니 차를  잔 내왔다.
그에 클라우스는 제 취향을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차보다는 커피로.”



안젤리카는 미소를 짓고는 감사합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갑자기 웬 감사 인사냐고 묻는다면 클라우스의 취향을 안젤리카로서는 이제 막 알았다.
정보를 하나 내어준 것이니 당연히 고맙다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을 대접 받은 클라우스는 내용물을 홀짝거렸다.
확실히 왕국의 뒷골목을 꽉 쥐고 있다 하더니 자금도 상당한 모양이다.
평민들은 감히 꿈도 못  설탕을 이렇게 막 사용할 수 있는 걸 보니까.



“후우우.”



안젤리카는 클라우스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재 책상에 걸터앉았다.
연신 연기를 내뿜으면서 길쭉한 담뱃대를 뻐끔거리는 여인.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렇지 않아도 고혹적인 모습이 훨씬 더 부각되어 보인다.


그렇게 한 10분이  흘렀을까.
클라우스가 찾아온 이유는 말하지 않고 커피만 마시고 있으니 답답해진 모양이다.
안젤리카는 담뱃대를 손에 쥔 채로 제 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륙 전쟁의 영웅님을 보채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제가 많이 바빠서요.”
“당연히 그러겠지. 지금도 계속 세력을 확장 중일 테니까.”
“그렇죠. 아주 많이 바빠요.”
“도대체 왜 그리 바쁠지 조금은 궁금해지는군.”



안젤리카의 표정이 살짝 굳은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거기에서 허와 실을 구분해내는 것이 클라우스의 가장 무서운 부분임을.

적이었던 마족도 알고 또한 아군이었던 서부 측도 알고 있다.
물론 귀족 나부랭이들은 여전히 클라우스를 얕보고 깔보는 데에 바빴지만.




“그렇게 재촉을 하니 아쉬운데. 커피 맛이 워낙 좋았는데 말이야.”
“돌아가실 때에 이쪽에서 볶은 커피를 좀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양지로 완벽하게 나아갔겠군. 이 커피를 탈 줄 아는 단원은. 그렇지?”
“….”



붉은 독거미는 초창기에는 음지에서 시작된 단체다.
당장 안젤리카 본인도 사창가의 여인 중 하나였던 이다.

음지라는 곳이 비록 더럽고 추한 곳이긴 하나 정보들이 꽤나 쏠쏠하게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 음지에서 활동하는 여인들을 시작으로 지금의 붉은 독거미를 만들었다.
사창, 마약, 노예와 같이 음지의 일부터 시작하여서 착실하게 자금을 모았다.
  서서히 준비를 하여 담배나 차, 커피 같은 부분을 시작으로 양지로 나아갔다.



‘아마 지금쯤이면 상단을 운용하는 단원도 있을 테지. 양지로 나아갈 준비가 다 되었어.’


오로지 여인만으로 구성되는 집단, 짓밟힌 자들의 복수라는 명분이 단원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고 이탈자나 밀고자를 단 한 명도 없게 만들었다.
연대감과 소속감이 강해지니 여인들만 모였음에도 뒷골목 세계를, 암흑가를 장악하게 되었다.

나중에 생기는 밀고자는 상황이 급해지니 어중이떠중이나 받은 것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거사를 치러야 하는데 자꾸 희생자가 생기니 그 빈자리를 빠르게 채우려하다가 변을 당한 것.
 전까지 붉은 독거미는 인간 측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집단임이 확실했다.

“여기까지 이리 찾아온 건, 사실 그쪽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야.”
“부탁이요.”
“그래. 돈이 조금 필요해서.”


돈이 필요하다, 그 말에 안젤리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과거의 전쟁 영웅이 갑자기 돈이 필요하다는 부분에서 의문을 품었다가.
그가 딱히 재물에 욕심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정보가 떠올랐다가.
귀족들이 그를 거의 강제로 내려앉혔기에 뭐 제대로 준비조차 하지  했을 것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소식이 머릿속에 머물기도 했고.
 직후 대륙 아카데미의 교수로 머물고 있다는 소식까지 접했었다.

그 부분들을 전부 종합해보면, 지금의 클라우스는 결코 부유하다고 할 수 없다.
당장 사령관이던 시절에는 모든 자금을 남부군 쪽으로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하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어떻게든 남부를 재건하기 위해 그나마 가지고 있던 돈도 전부 털어서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며.
아카데미의 교수라고 하여 많은 돈을 받는 것도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

“…얼마나 필요하시기에 굳이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평민들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남자가 돈을 꿔야 한다니.
안젤리카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헌데 돌아온 대답은 놀랍다 못  거의 가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규병 3천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자금, 거기에 그들을 한동안 먹일 식량 값까지.”
“….”



지금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은 안젤리카였다.
정규병들을 무장시킬 자금, 그것도 3 백도 아니고 3천이란다. 3천.
어지간한 대귀족 가문의 사병들보다도 배는 더 많은 숫자다.
그런 자들을 무장시킬  있는 자금이라면 가히 엄청나다고  수밖에 없다.


아니, 금액을 떠나서 3천여명을 무장시킨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어디 전쟁이라도 난다는 것인가? 끝난 줄 알았던 대륙 전쟁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인가?
하지만 여태 자신들이 끌어 모은 그 어떤 부분에도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소식은 없었는데.
서부 연합 측은 물론이고 동부에까지 뿌려놓은 소식통들이 보낸 소식이 없었는데 말이다!



“어때.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나?”


클라우스의 말에 안젤리카는 저도 모르게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건 전쟁 영웅이라던가 클라우스고 뭐고 간에 그냥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음지에서의 일로 돈을 벌었다고 한들 이건 차원이 다른 거다.


사창, 마약, 그리고 노예까지. 이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귀족들이 더럽고 추하다고 욕하면서 정작 가장 많이 돈을 쓰는 곳이란 점이다.
붉은 독거미는 바로  귀족들의 역한 이중성을 먹고 자라난 집단이다.
그렇기에 귀족들에게 천한 대접을 받을지언정 적으로 몰리지는 않았다.

언젠가 그들의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 넣을 생각을 하고 있지만.
지금은 숨을 죽이고서 그들의 경계 어린 시선을 최대한 줄여두어야  때다.


“물론, 부탁이라곤 했지만 아무 대가 없이 공짜로 받아먹겠다는  아냐.”
“….”



역시 이럴  알았다.
설마  클라우스가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귀족이나 할 법한 짓을 할까.
안젤리카는 속으로는 바짝 긴장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보를 주지. 그것도 아주  만한, 아니 아주 값비싼 정보를. 아마 이쪽에서 꽤나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을 거야.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도대체 어떤 정보이기에 그런 막대한 자금을 두고서 그것으로 부탁을 하고자 하시는 건지 심히 궁금해지는군요.”
“들어보면 아마 이해가  거다.”



그 말에 안젤리카는 다시금 담뱃대를 물고는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어디 그 값비싼 정보라는 것   들어보자는 뜻이었다.



“무장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다.”
“…네?”
“그리고 그들의 창칼이 향하는 곳은 서부가 아니라, 동부가 될 거다.”




순간 안젤리카의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
인간이 아니라 마족을 무장시킨다, 그런데  병사들이 서부가 아니라 동쪽을 공격한다.
다른 이들이라면 무슨 말도  되는 수수께끼냐고 불평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젤리카는, 붉은 독거미의 단장은 수도 없이 많은 정보들을 접한다.
때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정보가 있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정말 엄청나게 중요하고  귀중한 정보를 얻기도 하는 법이다.


‘최근 들어서 동부가 소란스럽다고 하긴 했어.’




정확한 부분은  수 없다.
안타깝게도 자신들의 정보통은 대부분 서부에, 그것도 인간 영토 측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소수이나마 마족들이 사는 동부에 자리를 잡은 이들도 있고, 그들을 통해서 몇 가지 정보를 빠르게 넘겨받기도 했다.

“…내전인 건가요?”

안젤리카는 빠르게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모여드는 조각  정보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동부에 대한 것.
그런 부분들이 합쳐져서 자신의 예측을 클라우스 앞에 내놓는다.

“눈치가 빠른데. 동부의 정보가 많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저도 나름 마족이니까요. 동부에서 살 때 그곳 상황을 대충 알긴 했어요.”



정확히는 요정과 마족의 혼혈아라고 해야  것이다.
참으로 웃기게도, 서로를 가장 싫어하는 두 종족 사이에서 사랑의 결실이 나온 것이다.


안젤리카를 공략한 적은 많지 않아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확실하게 알고 있는  요정 남자와 마족 여자 사이에서 나온 혼혈아라는 것.
요정 사회에서는 죽어도 살아갈  없기에 일단 동부의 끝자락에서 살다가 전쟁이 일어난 직후 부모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대륙 전쟁이 끝나고 1년 후 서부로 넘어와 사창가에서 일하다가 붉은 독거미를 만들고 그 집단의 수장이 되었다는 것, 이 정도였다.


‘마족들 사이에 마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다른 세력에 비해 약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마왕을 몰아내기 위한 움직임이거나, 그게 아니면 반대로 마왕 측의 회심의 일격일 수도 있겠어. 뭐가 되었든 동부에 새로운 다리를 놓을  있는 기회야.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부분을  하필 이 남자가 가지고 왔느냐 바로 이 부분이다.
차라리 마족이 찾아왔다면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헌데 클라우스는 그 마족과 정말 처절한 싸움을 벌이던 이가 아닌가.
어지간한 귀족들조차 그의 전공만큼은 건드릴 수가 없어서 입만 다물고 있을 정도다.
그나마 시간이 흘러서 공적을  깎아내리고 있고 있다지만 여전히 영웅은 영웅이다.


그 클라우스가 가지고 온 부탁이 마족 측 병사들을 무장시킬 자금이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 정보로는 값으로 부족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3천이라는 숫자가 적은 것도 아니고 거기에 군량 부분까지 보면 우리 붉은 독거미의 거의 모든 걸 투자해야 할 정도에요.”
“거의 모든 것? 글쎄.  정도는 아닌  같은데.”


대륙 전쟁이 끝나고 가장 골치 아픈 건 역시나 대량으로 만들어졌다가 쓸모없어진 병장기다.
녹여서 농기구로 만들면 된다고 하지만 어느 누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런 짓을 벌일까.
당장 언제 또 전쟁이 날지 모르니 더 많이, 더 날카로운 병기를 만들어두려고 하지.
그나마 시간이 흘러 대륙 전쟁이 끝난 지 5년 째 되는 순간에서야 그게 덜해졌을 뿐이다.

붉은 독거미는 바로 그 처치 곤란한 병장기를 은밀하게 사들였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대륙이 전쟁에 빠져들 것이라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분명 싸움이 날 터이니 미리 준비를 해두자고.
무기 관리가 조금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즉, 붉은 독거미는 충분한 능력이 된다.
반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쓴다고는 해도 거의 전부는 틀린 말이라는 것이다.


‘슬슬 이쯤에서 하나 던져줘야 하나.’



클라우스를 그리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짐짓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후 ‘이것까지는 조금 그런데.’ 라고 중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허면 이것까지 알려줄 수밖에 없겠군. 대신 이걸 들으면 자네는 반 강제적으로 나와  배를 타야만  거야. 그렇지 않는다면 나도 이곳을 적대시 여길 수밖에 없어서.”
“…무슨 정보이기에 그런 말씀을….”
“난 동부를 택했다.”



순간 안젤리카와 클라우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요정과 마족의 혼혈아, 그래서 요정의 금발에 마족의 불그스름한 눈동자를 지닌 여인.
그녀가 두 눈만 껌뻑이면서 클라우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방금 제 귀가 들은 게 정말인가 싶어서 말이다.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문고리를 잡는다.
이제 결론을 짓고 결정을 내리는  오롯이 안젤리카의 일이었다.


“난 내일 오전까지 조랑말 여관에서 머물 거다. 그 전까지 대답을 전해주길 바란다.”




그리 말한 클라우스가 막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찰나.



“저기.”

안젤리카가 그를 붙잡았다.
조금은 흔들리는 목소리로.

“혹시, 혹시 말입니다. 대륙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혹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피난민 무리들을 구해주신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그런 적이 있는 것 같군. 정찰을 나갔다가 피난민들을 호위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진짜 죽다 살아남았지.”



바로 오늘  순간을 위해서.
자그마치 12년 전 뿌려두었던 씨앗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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