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7장 - 붉은 독거미
클라우스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니 제니가 뒷걸음질을 친다.
또 한 발자국 다가가니 이번에는 그 배나 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부딪친다.
그녀는 도대체 자신에게 왜 그러냐는 듯 아주 처량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귀족들에게 험한 꼴을 당할 뻔 했는데 구해줘 놓고 또 왜 이러냐고 되묻듯이.
아마 상대방이 아무 것도 모르는 자였다면 이쯤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당장 저 여성은 귀족들에게 겁탈 당할 뻔 했기에 옷조차 제대로 여미지 못 했다.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맨살을 다 드러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데.
이상한 질문까지 하면서 몰아붙이니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으니까.
‘역시 붉은 독거미답네. 사람 속이는 게 아주 뛰어나.’
아마 이 세상에 연기상이 있었다면 최소한 신인상은 노려볼 만한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보아라, 어떤 남자가 저기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 옷까지 다 풀어지고 직전에 귀족들에게 험한 꼴을 당할 뻔도 했다.
말 그대로 상황과 그림마저 아주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라우스에게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짓이었다.
이미 저 여자가 어떤 자인지, 어느 곳에 소속되어 있는 이인지 전부 알고 있다.
아무리 잡아뗀다고 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있으니 떨쳐낼 수도 없다.
“이름이 뭐죠?”
“제, 제니요.”
“네, 제니. 만나서 반가워요. 내 소개를 하지 않겠어요. 제니는 이미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죠?”
“저, 저를 구해주신 분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요.”
“그거 말고요. 알고 있는 게 더 있을 텐데요.”
클라우스가 압박해오자 제니는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자꾸 왜 그러시는 것이냐고, 혹시 보상이라도 원하는 것이냐고 반문도 해본다.
하지만 제 앞의 남자는 다만 미소를 지은 채 계속 같은 질문을 할 뿐이었다.
자신을 알고 있지 않냐고.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제니. 내가 누구죠?”
“모, 몰라요! 왜 그러시는 건데요! 도대체 왜….”
쉬이익!-
순간 클라우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고 그 안에서 뭔가가 예기를 번뜩이며 날아갔다.
터억!-
여관 벽에 정확히 꽂힌 단검 한 자루.
제니의 볼을 닿을 듯 스치면서 지나간 그 단검이 부르르, 진동을 한다.
아마 저 단검이 적중한 곳이 벽이 아니라 사람 머리통이었다면 꽤나 볼만 했을 것이다.
“….”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제니는 제 뒤에 꽂힌 단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그 가련하던 기운은 어느 새인가 전부 사라지고, 그 안에 머물고 있는 건 제 앞에 서있는 남자에 대한 경계심뿐이었다.
“피했네요.”
“….”
“일개 여성 종업원이 그런 몸놀림이라. 어지간한 병사들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데.”
“….”
“이 이상 잡아뗄 생각은 말지. 다음에는 단검이 아니라 마력이 날아갈 거다.”
클라우스의 말에 제니는 잠시 더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갑자기 이제 무슨 일이야,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여인은, 방으로 들어오는 문이 잘 닫혀있는지를 확인하고서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찌 아신 건가요, 클라우스님.”
“뭘. 붉은 독거미에 대해서? 아니면 네 정체에 대해서.”
“둘 다입니다. 답을 해주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야 제가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안내라도 해드릴 수 있거든요.”
“답을 하지 않는다면?”
“저야 그냥 이 자리에서 자결하면 그만이죠. 저는 정보를 발설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클라우스님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칫 여인을 겁탈하려 했다는 의심까지 받을 수도 있을 거랍니다.”
그러자 클라우스가 푸핫, 하고 웃음을 흘린다.
역시 붉은 독거미의 일원다운 반응이었다.
해봤자 일개 단원에 불과할 터인데 저렇게 당당한 모습이라니.
이러니 자신이 더더욱 그 붉은 독거미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역시 대단해. 붉은 독거미다워. 안젤리카가 참 잘 키워두었어.”
안젤리카, 라는 말에 또 한 번 제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간다.
외부인들에게는 물론이고 붉은 독거니 내부에서도 몇몇만 알고 있는 단장의 이름을.
저 남자가 도대체, 어떤 수로 알고 있다는 것인가!
“내가 어떻게 붉은 독거미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었지. 왕국 사정 돌아가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있겠나? 심지어 귀족들 마냥 잘난 것들만 살피는 것도 아니고 나를 따르던 이들도 대부분이 평민인 마당에 소식이 들어올 수밖에 없지.”
“….”
“네가 붉은 독거미의 일원인 건 또 어떻게 알았냐고? 단순히 주점에서 일 좀 한다고 손에 굳은살이 그리 생기지는 않아. 그건 ‘병기’를 다루는 이들의 손이다. 특히 역수로 단검을 쥐는 이들이 꼭 그런 손 모양을 하곤 하더군.”
제니는 침음을 흘리면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굳은살의 정도나 손을 쥐는 형태로 예측을 할 수 있다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조금은 과한 예측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상대가 클라우스라는 남자다.
왕국의 인간으로서 어찌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 남자가 저리 말을 하니 제니는 저도 모르게 조금은 위축이 되는 것을 느꼈다.
물론 클라우스 입장에서는 애당초 답을 알고 있기에 대충 가져다붙인 이유에 불과하다.
제 이름과 명성이 든든히 받쳐줄 테고 정체를 전부 알고 있으니 대충 말 좀 꾸며주면 상대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더 자세하게 말하고 싶지만 이 이상은 좀 곤란해서. 이쯤 되었으면 너희들 아지트로 나를 안내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왜 저희를 찾아오신 거죠?”
“거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만?”
웃고 있었지만 결코 진심으로 웃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 정도 답을 해주었으면 만족하고 그만 하라는 뜻.
까불지 말고 이쯤에서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
제니는 여전히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정체가 다 드러난 상황에서, 심지어 단장의 이름까지 밝혀진 상황에서.
모른 척을 한다거나 그럴 수는 없다고 뒤로 물러서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렇게 된 거 그가 원하는 대로 아지트로 안내한 후 자신들의 단장과 만나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다고 제니는 생각했다.
덜컹-.
생각을 마친, 그리고 결론을 내린 제니는 벽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그 단검을 한 번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굉장히 좋은 단검이네요.”
“마족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 중 하나다. 무기를 만드는 건 마족이 최고지.”
“그렇죠. 허면 이 단검, 제가 가져도 될까요? 이렇게 막 날리시는 걸 보면 이런 좋은 단검이 최소한 몇 자루는 더 있으신 것 같은데.”
“마음대로 해. 대신 엄한 곳에 쓰지 않겠다는 약속만 지켜준다면 말이야.”
괜히 자신에게 휘두르지 말라는, 살짝 비틀어저 전하는 경고였다.
눈치 빠른 제니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여부가 있겠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제니와 함께 방을 나선다.
여관 내부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난 후였는데, 조금 전은 두 새파랗게 젊은 귀족들이 깽판을 부렸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그 두 귀족이 아주 처참하게 당하는 장면이었다.
“백작 각하! 프리몬트 백작 각하!”
“제발, 제발!”
“입 닥치라고 했다. 너희 같은 것들이 대륙 아카데미를 꿈꾸다니 어림도 없다!”
아무래도 프리몬트 백작은 진심으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자신이 여기까지 와서 클라우스와 엮이게 된 것도, 키엔마이어 후작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또 생긴 것도, 그리고 수행원들 앞에서 평민 하나한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도 전부 이 둘 때문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이대로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서 네 아비들에게 일러두어라. 프리몬트 백작가와의 영지전을 준비하라고. 원래라면 너희들을 붙잡았으니 몸값을 요구해도 될 터이지만 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서 되돌려 보내주었다는 말과 함께!”
프리몬트 백작의 서슬 퍼런 외침에 두 귀족은 사색이 되었다.
영지전을 막기 위해서 리어만와 피오는 정말 필사적이었다.
말 그대로 어디 지방에서 약간의 유세를 지닌 자신의 가문들과는 달리 프리몬트 백작가는 키엔마이어 후작가와 바로 인접해있는 강력한 귀족 가문이다.
영지전을 한다면 여태까지 우호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던 타 귀족들은 물론이고 영지를 찾던 상단이나 여행자들도 전부 사라질 것이며 자칫 사병들도 전부 이탈할 수도 있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리몬트 백작가를 말릴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세 곳.
왕실과 요제프 대공, 그리고 키엔마이어 후작가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도 말릴 수 있는 것이지 강제적으로 멈추게 할 수 있는 정도는 결코 아니다.
그냥 ‘적당히 해주었으면 한다.’ 라는 말이나 좀 전하는 정도랄까.
‘큰일이다! 큰일이야!’
‘망했다! 망했어!’
졸지에 제 가문을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게 된 두 청년이었다.
어떻게든 프리몬트 백작의 분노를 잠재워야만 했지만 도통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기대하라면서, 아주 재미있는 영지전이 될 것 같다면서 압박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심장이 다 쪼들리는 상황에서, 피오는 막 1층으로 내려오는 남녀를 확인했다.
여인은 당연히 자신들이 겁탈하려고 했던 여성 종업원.
그리고 그 옆에서 따라 나오는 남자는 자신들이 뭣도 모르고 까불었던.
알고 보니 대륙 전쟁의 영웅이자 키엔마이어 후작의 벗이라 하는 클라우스였다.
순간 그의 머리가 아주 재빠르게 회전했다.
프리몬트 백작에게 아무리 잘못을 빌어도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공략하는 상대를 다시 한 번 골라보는 것은 어떨까.
사과의 대상을 바로하고 용서를 받아내면 살 길이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저, 저기!”
해서 피오는 클라우스가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는 연신 잘못했다고 빌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엄청난 무례를 저질렀다고, 부디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따르지 못 하던 리어만이었다.
허나 그도 눈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곧 피오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는 같이 입을 열고서 용서를 구했다.
“이것들이….”
프리몬트 백작은 기가 막히다는 반응이었으나 나서지는 못 했다.
클라우스가 꽤나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그 둘을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두 분.”
마침내 클라우스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상당히 호의적이었기에, 리어만과 피오는 저도 모르게 희망을 품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 말이다!
“지랄만이 아니라 사과도 할 줄 아는군요.”
또 그놈의 지랄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원래라면 바로 발광을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둘 모두 그리하지 못 했다.
자신들의, 그리고 제 가문의 명줄을 바로 이 남자가 쥐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그 사과, 받아들이고 싶군요.”
클라우스의 대답에 두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어린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가 전쟁 영웅이라고 해도 과거의 영광 아닌가.
아무리 자신들이 보잘 것 없는 귀족이라고 해도 결국 ‘귀족’ 아닌가!
클라우스 입장에서 더는 귀족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게 피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라고 리어만과 피오가 막 행복회로를 돌리는 찰나.
다음 이어진 클라우스의 말은 그들의 기대를 아주 산산조각 내어버렸다.
“그런데, 왜 나한테 사과를 하는 겁니까? 사과는 내가 아니라 여기 있는 종업원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참 이상하군요.”
순간 두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클라우스는 전쟁 영웅이라는 타이틀이라도 있지, 저 여자는 그냥 일개 평민이지 않은가.
보잘 것 없는 여성 종업원에게까지 사과를 하라고? 자신들이? 귀족들이??
저들이 망설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기들이 왜 고민을 한단 말인가. 어차피 사과를 해도 여기가 받아주지 않을 터인데.
“제니. 혹 저 두 남자가 사과를 한다면 받아줄 의향이 있습니까?”
“아뇨. 전혀요.”
“그렇다는 군요. 프리몬트 백작님. 하던 일 마저 하시죠.”
클라우스의 말에 백작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리고 두 버러지들의 입가에는 절망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