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1화 〉7장 - 붉은 독거미 (91/341)



〈 91화 〉7장 - 붉은 독거미

궁금증을 참지 못 한 프리몬트 백작은 방금 남자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아무리 평민들의 기가 좀 살아났다고 해도 귀족에게 대놓고 무례한 언행을 일삼은 자라니.
갑자기 그가 움직이니 에그마 역시 급하게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혹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연관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병영 한 구석에 몸이 묶이기 직전의 남자를  수 있었다.



“이보게, 경비대장.”
“네, 백작님.”
“저 평민이 받는 처벌이 무엇이기에 저리 묶으려고 하는 건가?”
“아. 채찍질 50대를 명령하였습니다.”
“채찍질 50대? 그러면 사람이 버티지 못 하고 죽을 터인데.”
“원래 평민이 귀족에게 조금이라도 무례한 기색을 보였다가는  자리에서 죽어도 아무런 일이 없던 것이 대륙 전쟁 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슬프게도 에그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평민에게 있어 귀족은 감히 바라봐서도 안 되는 하늘이었다.
뜻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순간 바로 처벌을 할  있었고 심한 경우 죽일 수도 있었다.


물론 목숨을 거두게 되면 조금은 복잡한 상황에 쳐하게 되지만 그 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만….”


쩝, 하고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프리몬트 백작이었다.
그 자신도 귀족이고 귀족의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바로 옆의 영지가 하필이면 키엔마이어 후작이기에.
평민들을 막 대하는 꼴을 보이기도 모호했고 또  없는 진짜 귀족은 그를 바라보면서 은근히 동경하는 부분도 있었던 프리몬트 백작이었다.

해서 눈앞에서 평민 하나가 채찍질에 맞아죽는다는 사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나서야 하나, 중재해야 하나, 그냥 말아야 하나, 방관해야 하나.
그런 고민으로 프리몬트 백작이 이마를 꾹꾹 누르던 순간이었다.


‘…어?’




뭔가 이상했다, 이상해도 아주 많이 이상했다.
경비대원이 안경을 빼앗고 머리를 위로 치워내자 묘하게 익숙한 얼굴이 보인 것이었다.


두 눈을 깜빡이면서 그 남자를 쳐다보던 프리몬트 백작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 에그마라는 놈은 뭐 눈치챈 게 없나 싶은 반응이었는데 모르는 눈치다.




“경비대장?”
“네, 백작님.”
“혹 저 평민과 부딪쳤던 귀족들이 누구인지 아는가?”
“정확히는 모르나 귀족 가문의 젊은 자제들이라고 했습니다.”
“자네와 나이대가 비슷하겠군. 그렇지?”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은 왜….”

갑자기 불길한 뭔가가 쏴악, 하고 몸을 훑고 지나간다.

이 에그마라는 새파랗게 젊은 놈도 그렇고 그 귀족 자제들도 그렇고.
대륙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고작  자릿수 나이의 애송이에 불과했다.
전쟁을 경험한 적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은 적도 없으며 무엇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직 10대에 머무르고 있던 천둥벌거숭이들.


‘…설마.’



문득 제 아들과 딸이 보내준 편지가 떠올랐다.
참으로 놀랍게도 이곳에 아버지가 그리도 말하던 그 남자가 교수로 있다고.
누구는 영웅이라고 하고 누구는 악마라 하며  누구는 평민 나부랭이라고 부르는.
클라우스, 라 불리는 남자가 바로 대륙 아카데미에 있다고 말이다.


그러다가 프리몬트 백작은 기둥에 묶여서 막 고초를 당하기 직전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백작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몸을 날려야만 했다.


“이런 빌어먹을!!”


갑작스레 튀어나가더니 그대로 채찍질을 하려던 경비대원을 붙잡은 프리몬트 백작.
그리곤 기둥 곁으로 다가가서 다시  번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기운을 풍기고 있었지만 그가 분명했다.




“프리몬트 백작님.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처벌에 혹 문제가….”
“미친 새끼! 그 주둥이 닥쳐라!”


퍼어억!-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프리몬트 백작이 주먹을 쥐고서는 그대로 에그마 경비대장의 얼굴을 후려친 것.
어찌나 세게 후려친 것인지 바로 코피까지 쏟고 마는 에그마였다.

말 그대로 붕 떠서는 바닥에 처박히는 제 상관을 바라보며 경비대원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도대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끄윽….”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뭐라 말도 안 나오는 건 에그마도 마찬가지였다.

도시의 경비대장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건 당장 전투를 벌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지간한 귀족도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이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보잘 것 없는 방계 출신의 에그마가 기를 쓰고 이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헌데 그 불문율을 프리몬트 백작이 일거에 깨부쉈다.
심지어 귀족과 평민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1초의 고민 후 귀족이라고 말할 법한.
귀족들의 특권에 대해 별 다른 생각이 없는 그런 위인이 말이다!


“프, 프리몬트 백작님. 도대체  이러시는….”
“닥치라고 했다! 미친놈, 천지분간이 안 되는 것이냐!!”




어찌나 괴성을 질러대는지 에그마는 움찔 놀라서는 그대로 찌그러졌다.
기세가 무척 흉흉한 것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밟아죽일 것 같았다.
직후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또 들어야만 했다.


“이보게.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몸 상한 곳 없겠지?”
“괜찮습니다, 프리몬트 백작. 감사합니다.”



귀족이, 그것도 백작 위에 있는 대귀족 중 하나인 프리몬트 백작이.
일개 평민을 손수 풀어주고 이리저리 몸까지 살피면서 걱정스러운 듯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나 손짓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마치 그보다 더 윗줄을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받아들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모습에 에그마가 뭔가 말하려던 찰나.
입술을 깨문 프리몬트 백작이  다시 흉흉한 기새를 드러냈다.

“…이 빌어먹을 새끼!”

퍼억!-


“꺼억!”




미처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프리몬트 백작에게 맞고 만 에그마 경비대장.
심지어 이번에는 발로 배를 맞은 것이었기에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배는 더 심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프리몬트 백작이 갑자기 자신을 구타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를 맞이하는 것에 있어서 조금의 섭섭한 부분도 없었는데.
자신과 그가 원수를 진 일도 없고 제 가문이 그의 가문과 적대적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넌 뭐하고 있어!!”
“에, 에?”
“뭐하고 있냐고! 당장 이 남자를 밖으로 안내하지 않고!”




제 상관인 에그마가, 자신은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왕국의 대귀족에게  그대로 폭행을 당하고 있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경비대원.
그는 갑자기 그 프리몬트 백작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몰아붙이자 또 다시 넋이 나가버렸다.


“밖으로 안내하라니까! 내 마차까지 정중하게 모셔라. 알겠나?!”




고상하다는 귀족이 이리도 흥분해서 소리치는  정말 처음 보는 일이었다.
경비대원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서는 프리몬트 백작의 닦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데려왔을 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정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남자를 안내해서는 바깥으로 데리고 사라졌다.

“프, 프리몬트 백작님.”



 때 간신히 몸을 일으킨 에그마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저 평민이 도대체 누구기에….”
“이래서 대가리에 피도  마른 새끼들이란! 이 빌어 처먹을 놈들!!”



당장이라도 눈앞의 새파란 애송이를 찢어먹을 듯 달려드는 프리몬트 백작.
그는 두 눈을 부라리면서 에그마의 가슴을 주먹으로 연신 쳐댔다.

“넌 이제 인생 종쳤어, 이 새끼야. 일개 평민? 네놈 눈깔에는 저 남자가 일개 평민으로밖에 안 보였던 것이냐?! 귀는 장식으로 들고 다녔어?! 아무리 본 적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최소한 가능성 정도는 생각해 놓아야 했을 거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그, 그런데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도통  수가….”


에그마의 말에 프리몬트 백작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말았다.
아무리 애송이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것 아닌가.
왜 평민들이 갑자기 그리도 기고만장해졌단 말인가.
그들이 대륙 전쟁에서 싸워 공을 세워서? 정말 그게 다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평민들이 갑자기 들고 일어난 이유는 단 하나, 한 남자가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잘 들어라, 이 개자식아! 네놈이 붙잡아 온, 채찍질로 죽이려고 했던! 철없는 귀족 나부랭이들이 고발한 저 남자가! 전(前) 남부 사령관 클라우스란 말이다. 요제프 대공과 함께 왕국 귀족 첫손에 든다는 키엔마이어 후작이 평생의 벗으로 삼은 남자! 전쟁이 끝난 지 5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여전히 추종하는 자들이 천지인 남자란 말이다! 이 버러지 새끼야!”

* * * * * * * * *  *

마차 안에 들어가 앉은 클라우스는 낄낄대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손으로 조지는 것도 물론 재미있지만 이렇게 남의 손을 빌리는 것도 은근히 꿀잼이다.
무엇보다 프리몬트 백작이라 하면 키엔마이어 후작보다야 끗발은  떨어지나 그래도 대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 권력이 꽤나 강한 곳이다.

아까 전 마주친 그 이름도 모를 애송이 둘이나, 반쪽짜리 귀족인 경비대장 따위와는 감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그런 인물이란 말이다.

‘항상 철없으면서 나대는 것만 좋아하는 놈들이 일찍 뒤지기 마련이지.’



대륙 전쟁이 끝난  5년이 넘게 흘렀다.
그리고 대륙 전쟁이 발발한 건 그보다도 7년 전이었으니 길게는 12년, 짧아도 6년 이상의 기간이 존재했고 이제 겨우 성년이 된 그 버러지들은 당시 열 살 근처의 꼬꼬마들이었다.

원래부터 특권 의식에 찌든 놈들이니 클라우스의 명성에 별 관심이 없었을 테고.
전쟁을 경험할 이유가 없는 애새끼들이었으니 클라우스의 모습을  적도 없었다.



바로 그걸 노리고 클라우스는 일부러 그곳으로 찾아간 것이었다.
애당초 자신의 모습을  알 수가 없는 신세대들이다.
그리고 안경을 쓰고 머리 스타일도 바꾸고 분위기까지 뒤집어서 자세히 살피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정체를 유추해낼 수 없었다.

그나마 프리몬트 백작 같은 경우에는 키엔마이어 후작과 안면을 튼 사이고 덤으로 클라우스와도 아주 가까이서  번  적이 있으니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런 버러지들 처리하는 데에 키엔마이어 녀석을 또 부려먹기는 미안하지.’




바로 오늘 두 버러지가 사고를 치는 것도, 신임 경비대장이 특권 의식에 찌든 반쪽짜리 귀족이라는 것도, 그리고 프리몬트 백작이 딱 그를 만나러 올 것이라는 것도.
클라우스는 몇 십 번의 경험을 거쳐서 머리로, 몸으로 외우고 있었다.


이제 곧 에그마인지 뭔지 하는 놈을 아주 깔끔하게 조져둔 프리몬트 백작이  것이다.
그 후 조랑말 여관에서 여성 종업원을 데리고 온갖 희롱을 하고 있을 철없는  애새끼들도 찾아 깔끔하게 조져둘 것이다.


‘왜 프리몬트 백작이란 남자가 그리도 열정적이느냐. 내 팬이라서? 아니다. 그는 오히려 평민보다는 귀족들 편을  만한 남자다. 써먹기는 좋지만 믿을 수는 없는 부류.’

그렇다면 왜 그런 프리몬트 백작이 발광을 하면서 에그마를 갈궜냐고?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의 영지가 키엔마이어 후작 바로 옆에 있기에 그런 것이다.
자신도 대귀족이라곤 하지만 키엔마이어 후작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는 전쟁에서 직접 활약한 인물이요 승리를 거둔 공훈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자신과 친우 사이를 맺었기에 평민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다.
그런 남자와 이웃사촌 관계에 있는데 괜히 불쾌한 일이 생기면 손해를 보는 건 과연 어느 쪽이 되겠는가.




클라우스는 연신 웃음을 터트리면서 프리몬트 백작을 기다렸다.
사실 여기까지는 소설의 프롤로그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건 고작 귀족들   조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가 여기에 와서 이 짓까지 하고 있는 건 한 세력과 접점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붉은 독거미.’

겉보기에는 그냥 예쁘고 일 잘할 것 같은 여성 종업원, 제니라 불린 여자.
바로 그녀가 클라우스에게는 비밀의 문으로 들어갈  있는 열쇠와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