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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화 〉7장 - 붉은 독거미 (90/341)



〈 90화 〉7장 - 붉은 독거미

세상 어디에도 귀족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평민은 없다.
부유하든, 강하든, 재능이 좋든, 어리든 상관은 없다.
평민은 그냥 평민일 뿐이고 귀족은 그런 평민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으니까.

그래서 리어만은 당연히 울먹거리며 알겠다는 답이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자신의 귀에 들린 것은 상상도 못 한 한 마디였다.




“지랄 염병을 떨고 있네.”




리어만은 자신이 헛것을 들었나 싶었다.

지랄? 염병? 아무리 생각해도 귀족인 자신에게 평민인 이 여자가  말은 아니었다.
입이 찢어져서 죽고 싶지 않거든 절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 방금  목소리, 여자의 것이 아니라 남자의 것이었는데?
소리의 근원지를 찾던 리어만은 한 남자와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

자신의 테이블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남자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 놈이라고 바로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
이쪽과 시선을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 남자는 자신과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 허허.”



어이가 없었다,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대륙 전쟁 이후 많은 평민들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곤 한다.



전쟁 당시 재산과 가족만 챙겨서 도망친 귀족들이 수두룩했다.
수틀리면 피난민들을 공격해서 식량을 빼앗고 생필품까지 약탈하는 자도 있었다.
마족 군대가 쫓아오면 피난민들을 울타리 삼아 가장 안전한 곳에서 도망치기도 했다.
물론 귀족으로서 귀족다운 모습을 보인 자들도 있었으나 원래 세상이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일파만파 퍼지기 좋은 곳이다.

반대로 평민들은 어차피 도망갈 수도 없는 몸, 제 땅, 제 마을, 제 고향을 지키고자 했다.
싸우다가 죽은 이들은 셀 수도 없었고 그 와중에 전공을 세운 이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런 방식으로 평민들의 사회적 지위가 갑자기 껑충 뛰었다.
오직 귀족만이 맡을 수 있는 군단의 사령관 자리까지 평민이 차지하지 않았던가.

“방금,  놈이 지껄인 거냐.”


리어만은 그런 평민들이 무척 싫었다.

해봤자 전쟁에서 무기 좀 휘둘러서 적병  놈 해치웠다고 으스대는 것들.
아무리 공을 세워도 그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개돼지들.
못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 하고 아등바등 쓸데없는 짓을 하는 멍청한 쓰레기들.
그런 놈들을 잘근잘근 밟아주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껄인  아니라 그냥 혼잣말을 한 겁니다만?”

말해놓고 또 찔리는 게 있는지 바로 존대를 하는 남자다.
리어만은 살의를 머금은 눈빛으로 그를 한 번 훑었다.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꽤나 멀끔해 보이는 복장.
그리고 굉장히 정제된 느낌을 주는 자세와 눈빛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리어만은 상대가 다름 아닌 대륙 전쟁의 생환병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몇  본 적이 있다.
귀족을 우습게 여기는 평민들, 그런 자들은 대부분이 대륙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들이었다.

마족들이 쳐들어오자마자 도망친 너희 귀족들은 세상 다시없을 쓰레기다.
그들과 맞서 끝까지 가족과 마을, 그리고 땅을 지킨 우리가 진정한 영웅이며 귀족이다.
딱 그렇게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이는 그런 자들 말이다.




‘주제를 알아야지. 쓰레기들이.’


귀족이란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순수하고 깨끗하며 고귀한 귀족의 피.
오직 그것만으로 귀족과 평민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짐승은 결코 사람이  수 없다.
리어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혼잣말을 했다?”
“그렇습니다만.”
“보아하니 너도 평민 같은데. 뭐냐, 네놈.”
“귀족님과 똑같은 여관의 손님이죠.”
“허어. 내가 너와 똑같다? 네놈 따위와?”

마력을 일으킨 리어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의 목을 잡아챘다.
덕분에 그의 생김새가 조금 더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외알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나 앞으로 깔끔하게 내린 머리를 보니 막일만 하는 그런 놈은 아닌 듯 했다.



“어디서 돈 좀 만지는 놈인가 보구나. 평민 주제에 귀족을 우습게 아는 놈들은 대륙 전쟁의 그 잘난 생환병. 그게 아니면  놀음을 하는 자들이지. 둘 다일 수도 있고.”
“놓으시죠.”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감히 평민으로서 귀족에게 무례를 범하다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네놈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덜컹!-

리어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관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직후 도시의 경비병들이 갑작스레 안으로 들이닥친다.

“뭐, 뭐야!”



귀족들의 행패에 이어서 이번에는 도시 경비병들의 등장까지.
잠시 허둥해던 손님들은 아주 조금은 기대를 품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보잘  없는 도시의 경비병이긴 하지만 치안 유지가 주목적인 자들이다.
때문에 과한 소란을 피우는 귀족들을 그곳에서 내보낼 수 있는 권한 정도는 있었다.



아늑하던 여관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저들을 제발 데리고 나가주기를.
어떤 이가 여관 안의 소란을 감지하고 저들을 불러온 것이기를.
안의 사람들은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다.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피오 공자님.”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도시의 경비병들은 오히려 자리에 서있던 귀족의 뒤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멍청한 개돼지들.’



피오는 리어만의 손에 잡혀있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평민들을 비웃었다.


병사들은 무슨 일반 사람들의 편을 들어줄 것 같은가? 아니,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도 결국 자신들에게 이득을 주는 자들에게 붙어먹고 빌어먹기 마련이다.
당장 이곳으로 오기 전 은밀하게 뒷돈을 찔러주면서 여관 안에서 소란을 감지하면 바로 들어와서는 감히 귀족과 맞먹으려는 놈을 잡아가라 부탁을 했었다.


대륙 전쟁 이후 자신들의 공적에 취한 평민들이 간혹 귀족들에게 대드는 일이 있었다.
전쟁 직후에야 그들의 눈치를 봤다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상황이 다시 역전되었다.
그런 놈들이 발견되는 즉시 귀족들은 그 자를 완전히 매장시켜버렸다.
다시는 평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서 귀족에게 대들지  하도록 말이다.




물론 귀족 자신들만의 힘으로 그 평민을 조져놓으면 손해가 막심하다.
해서 그들은 지금과 같이 다른 것을 이용해서 대드는 것들을 손봐주었다.
귀족에게 평민이 대드는 것은 왕국의 법을 어기는 것.
해서 병사들을 이용하면 합법적으로, 아주 편안하게, 손해 보는 것 하나 없이 일을 마무리할  있었다.




“저기 있다. 감히 평민 주제에 귀족에게 망언을 내뱉은 놈.”
“…정말인가? 모두 그 말을 들었는가?”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이가 손님들을 향해 묻는다.
어차피 귀족들이 몰아붙이면 ‘네네, 알겠습니다.’ 하고 잡아갈 테지만.
그래도 명색이 도시의 치안을 책임지는 병사들인데 사실 여부를 따져야만 했다.
그걸 알기에 리어만과 피오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관 안을  번 훑어주었다.
너희들도 다 보지 않았느냐. 이 종업원이 자신들을 업신여긴 것을.
해서 자신들은 그냥 경고 차원에서 어느 정도 위협만 해주었던 것을.
소란을 일으킨 점에 돈으로서 사과까지 하는 와중에 웬 미친놈이 망발을  것을.
너희들이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지 않았냐고 위협을 하고 있었다.



“예, 예. 제가 봤습니다. 귀족 분들은 그냥 경고를 하고 넘어가려 했습니다.”
“저도,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저 남자가 감히 해서는 안  말을….”



크흡, 푸흡-.

리어만과 피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아주 고생을 해야만 했다.
역시 평민들, 개돼지들, 어쩔 수 없는 하등한 종자들다운 반응이었다.

조금 위협하고 그 사이에 잘 좀 대해주고 돈이나 먹을 것만 주면 금방 서로를 배신한다.
저게 바로 평민들의 본모습이다, 더럽고 천한 피를 가진 자들의 한계다.

“자네, 정말 그리 말했나?”


마지막 확인 차 그리 되묻는 병사들 측 리더.
그에 남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혼잣말을 하긴 했는데 그걸 들었다니 어쩌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시죠.”


라면서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에 병사들  리더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남자가 정말 미쳤나?’


원래는 대부분이 절대 아니라고 하거나, 아니면 오해라고 하거나.
그도 아니면 바로 무릎 꿇고 빌면서 용서해달라고 외치는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대륙 전쟁의 생환병이라고 해도, 돈을 만지는 이라고 해도.
평민은 평민이고 귀족은 귀족인 법이다. 아무도 그걸 넘을 수 없다.

왕국의 법이 그렇다. 왕명이 아닌 이상은.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왕명조차도 귀족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체포해라.”



무엇보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경비대장이 젊은 귀족 자제였다.
비록 방계 중의 방계인지라 귀족이라고 부르기도 모호하다지만.
자신과 같은 평민 핏줄이 아니라 분명한 귀족 가문의 피를 이어 받은 젊은이였다.

눈앞의  두 청년도 그렇고 제 상관도 그렇고.
이제야 겨우 20대에 들어섰음에도 벌써 권력의 맛에 찌든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뱉으면서 순순히 체포 명령에 따르는 남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어디서  것 같기도 한데.’


눈에 쓰고 있는 외알 안경이나 앞으로 단정히 내린 머리카락.
 부분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그는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 역시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기에.
그냥 많고 많은 귀족에게 걸린 불쌍한 생환병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고생하시게, 잘난 평민 양반.”



낄낄거리면서 남자를 배웅하는 리어만과 피오였다.
경비대는 한숨을 내뱉으면서 그를 본부까지 데리고 갔다.
다른 죄도 아니고 귀족을 모욕했으니 그 죄는 꽤나 크다.
아무리 생환병이라고 해도 귀족 앞에서는 일개 평민에 불과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쯤에서 놓아주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 두 귀족이 나중에 찾아와서 잘 처벌되었느냐고  상관에게 묻는다면.
결국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모가지가 날아갈 이가 한둘이 아니게 될 것이었다.


‘미안하오.’



남자는 그리 생각하며 경비대 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제 상관 앞으로, 아직 새파랗게 어린 청년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


“이 남자는 뭐지?”



한창 책을 들여다보며 고상하게 차를 즐기던 남자가 의자 너머로 말한다.


업무는 경비대장인데 하는 짓은 어디 소풍 온 귀족 자제다.
직계가 아닌 방계, 따라서 딱히 가문의 힘도 휘두르지 못 함에도.
그 잘난 귀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저 새파랗게 어린놈이 상관이 되었다.
속으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으며 남자는 입술을 떼었다.

“조금 전 한 귀족 자제분께 무례를 범한 자입니다.”
“뭐라고?”




귀족에게 무례를 범했다, 그 말에 꽤나 거칠게 반응하는 청년.
이번에 새로이 경비대장으로 취임한 에그마는 기가 막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런 놈들이야 참 많이 보아왔다. 평민 주제에 대륙 전쟁에서 좀 싸웠다고 으스대는 놈들.
영웅 대접을 좀 해주니 기고만장해진 모양인데 전쟁은 이미 몇  전에  끝났다.

과거의 영광은 곧 바래질 뿐이며 죽지 않은 전쟁 영웅은 과거의 악몽에 불과하다.
이용 가치가 떨어졌으니 그냥 버려도 될, 다시는 써먹지도 못 할 불량품.
에그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채찍질 50회에 처한다.”
“…예?”



그 말에 남자를 여기까지 데려온 리더는 놀라서 그리 반문한다.
귀족에게 무례한 짓을 범하면 크게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 정도에 따라 목숨을 거둘 수도 있으나 신체에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면 적당한 처벌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헌데 채찍질 50회는 그냥 죽이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으랴.

“조금 후에 프리몬트 백작님께서 당도하신단 말이다. 이런 것에 일일이 신경  여력 없다.”
“아, 아니. 그래도 이건 조금 과한 처사가 아니신지….”
“귀족이 무례함을 느꼈고, 그걸  증인들도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뭐가 문제란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이행할 자신이 없는 건가?”
“아닙, 아닙니다. 바로 처벌토록 하겠습니다.”

반쪽짜리 귀족이어서 그런지 더 포악하고 더 지랄 맞은 놈이다.
남자를 데리고  리더는 한숨을 내뱉으면서 다시금 그를 끌고서 자리를 이탈했다.


 직후, 한 남자가 여럿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쇼, 프리몬트 백작님.”
“이곳에 새로 부임한 경비대장인가? 아아, 정신 사납게 대접할 필요는 없어. 그냥 아카데미에서 지내고 있을 내 아들딸 좀 보러  것이니까.”


왕국의 몇 없는 백작인 제임스 프리몬트.
대륙 아카데미에 아들과 딸을 입학시킨 왕국의 실세  하나.
그가 이 도시에 왔다는 소식에 에그마는 바짝 긴장했고  은근히 기대하는 중이었다.
혹 자신이 붙잡을  있는 밧줄이 되지는 않을까 하면서.


“그런데 조금 전 끌려가던 남자는 누군가?”
“신경 쓰실  없습니다. 감히 평민 주제에 귀족에게 무례를 범했다기에 처벌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가서 차나 한 잔 하시죠.”



에그마의 말에 걸음을 옮기려던 프리몬트 백작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감히 귀족에게 무례한 언행을 저질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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