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6장 - 마왕 키우기
대륙 아카데미는 생도들의 생활에 있어서 꽤나 여유로운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었다.
생도 한 명, 한 명이 자신들 사회에서 꽤나 대접을 받던 이들이다.
그들은 성적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으며 그것으로 경쟁할 생각도 없었다.
더해서, 애당초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도 ‘교육’ 보다는 ‘교류’ 에 중점을 두고 있다.
때문에 한 강의가 끝나면 생도들은 바로 다음 강의를 위해서 달릴 필요가 없었다.
여유를 즐기면서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모여서 티타임을 가지거나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대련을 하기도 하면서 적과 아군을 분별하곤 했다.
“하앗! 핫!”
그런 이유로 클라우스는 한가로이 앉아서 율리아와 세실리의 대련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나타샤도 옆에 앉아서는 율리아의 움직임에 잔뜩 집중한 상태였고 말이다.
한 곳에 모인 클라우스, 그리고 율리아, 나타샤, 세실리까지.
언뜻 보면 이해가 안 가는 조합이었지만 세실리가 클라우스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건 이제 생도들도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세실 리가 클라우스 말고도 율리아를 대련 상태로 지목해서 싸우고, 덕분에 원래 율리아의 상대였던 나타샤가 바로 옆에 있어도 그 어떤 의심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자꾸 늦잖아요!”
“하악!!”
율리아의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그녀의 목검이 그대로 세실리의 손등을 가격한다.
덕분에 세실리는 비명인지 아니면 신음인지 모를 묘한 소리를 내면서 목검을 놓치고 말았다.
“집중해요. 이래가지고 클라우스 교수님의 옷깃 하나라도 스칠 수 있겠나요?!”
“미, 미안해요. 너무 빨라서….”
“핑계 대지 말고 일어나세요. 얼른요!”
각오하라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율리아는 세실리를 정말 잡아먹을 듯이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차가운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나타샤가 ‘갑자기 왜 저래?’ 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보세요. 검을 잡아도 어느 순간에 고쳐쥐고는 다른 움직임을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에요. 그렇게 잡아서는 이렇게 근접한 순간에 어쩌려고 하는 거죠?”
“저는 마법으로 해볼 생각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마법도 안 통했잖아요!”
율리아의 고함 소리에 세실리가 또 한 번 몸을 움츠린다.
마법 천재라고 불리던 세실리도 결국 율리아의 사기적인 부분 앞에서 빛이 바란 것이다.
근접전에서 시종일관 율리아에게 밀리던 세실리는 그녀가 간격 안으로 들어온 순간 회심의 마법 공격을 날렸으나 율리아는 그걸 간발의 차이긴 하나 분명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세실리로서는 노림수가 전부 사라진 것이었고 반대로 율리아는 자신의 능력을 또 한 번 입증한 것이 되었다.
따악, 딱! 따다다닥!!-
“옆구리! 다리! 손! 등! 몇 번을 비는 거냐고요!”
“아, 아파요! 율리아! 아앗! 아프다고요!”
이제는 대련을 넘어서서 숫제 구타로 넘어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율리아 본인도 모르게 역성 혁명파의 일원인 레블랑, 그 가문의 딸에게 적의를 불태우는 모양이었는데 클라우스는 그걸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면, 말릴 필요가 없었다.
마왕은 마왕대로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실력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변태 마족은 변태답게 저렇게 맞으면서 약간의 즐거움과 함께 클라우스의 매운 맛을 그리게 되는 중이었으니까.
“진짜 왜 저러는 건지, 저러다가 무슨 사고라도 치는 건 아닐까요?”
클라우스 옆에 가만히 앉아서는 그 장면을 구경하던 나타샤.
그녀는 율리아와 세실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나타샤가 보기에 세실리는 아직 율리아와 싸울 단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마법은 잘 몰라도 최소한 검술을 포함한 근접 전투 부분에서는 아이와 어른의 싸움이었다.
가르쳐줄 생각이라면 조금 널널하게 잡아두거나 하다못해 마음에 여유라도 들게 해줘야 하는데 시작부터 저리 몰아붙이면 도대체 어느 누가 뭐를 얻어갈 수 있단 말인가.
저 상태로 못 하겠다면서 도망만 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미소만 지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어차피 세실리가 고통 앞에서 도망칠 리는 없고 율리아보다는 뒤떨어진다고 해도 세실리 역시 천재라는 호칭이 아쉽지 않은 여인임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저렇게 맞다가도 어느 순간 성장하면서 율리아의 공격을 하나씩 하나씩 막아낸다.
나중에 가면 역으로 반격을 하기도 하는 등 세실리도 분명 쓸 만 한 패가 된다.
물론 그 변태 성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막을 수 있는 거 일부러 안 막고 맞아준다거나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내심 클라우스에게 혼나기를 원했지만.
“누구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나타샤. 율리아를 보고 있자면 괜히 긴장되지 않나요? 지금 봐도 당장 당신과의 대련에서 근소하게나마 우위를 점할 것 같은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자신만만하네요. 정말인가요?”
“창으로 싸운다면 한 번 정도는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을 거예요. 아직까지는요.”
허풍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나타샤는 적어도 창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마족들조차 창을 든 나타샤를 상대로 승부를 내지 못 할 정도였었다.
한 번 정도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라는 저 말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나타샤는 절대 그리 할 생각은 없었다.
눈치가 없는 멍청이도 아니고, 자신은 율리아와 같은 여인이다.
그녀가 클라우스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이미 몇 번이고 본적이 있다.
그건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인을 대하는 눈동자, 여인으로서 한 남자를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이 번들거리는 눈빛이 분명했다.
그리고 클라우스도 은근히 율리아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면 그냥 생도를 챙기는 모습 같기도 하지만 나타샤는 이전에 자신을 꼬옥 안아주던 그 남자의 모습을, 율리아를 대하는 클라우스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나 혼자 차지하고 싶어. 하지만 괜한 짓으로 미움 받고 싶지 않아.’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율리아는 클라우스와 결코 가볍지 않은 관계임이 분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샤 본인이 율리아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면?
설사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녀와 상당히 껄끄러운 사이가 된다면?
그리 했다가는 당장 클라우스와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틀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클라우스와 멀어진다, 의지할 곳이 사라진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돋는다.
벨라루스의 주인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건 다만 부가적인 것이니까.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클라우스의 옆에 기대어있는 것.
그래서 그 부분을 스스로가 망치는 것이 나타샤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이었다.
조금 더 확실히 알고 싶다, 저 마족 여인과 무슨 관계인 것인지.
혹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어디까지 간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다는 유혹이 일었다.
“교수님, 혹시….”
나타샤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갑자기 그 사이로 누군가가 휙 끼어들었다.
어느 틈에 바로 이곳까지 다가온 것인지 율리아가 시리도록 차가운 얼굴로 나타샤를 노려보고 있던 것이었다.
“떨어져.”
“네, 네?”
“떨어지라고.”
그래도 바로 직전까지 서로에게 존대를 썼던 두 여인이다.
마족과 요정, 절대 섞일 수 없는 두 종족이나 그래도 한 남자의 눈치를 보느라 애써 그 적의를 숨기면서 최대한 선을 지키고 있었다.
헌데 그 선을, 율리아가 갑자기 넘었다.
심지어 그냥 넘은 수준도 아니라 거의 도발을 하듯 나타샤를 죽일 듯이 쳐다본다.
“너, 왜 자꾸 교수님한테 들러붙는 거야.”
“무슨 소리죠, 율리아? 그리고 말하는 거 신경 써주세요. 무례하게 대뜸 뭐하는 건가요.”
“떨어지라고 했어.”
줄기줄기 솟구치는 살기가 나타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나타샤는 저도 모르게 그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마족한테 잠깐이나마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아 아그네사. 마지막 경고에요. 예의를 지켜요. 나라고 당신이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요? 그리고 클라우스님은 저와 당신 같은 생도를 가르치는 교수 자리에 계세요. 제가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응당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법이죠. 지금 그걸 막겠다는 건가요? 내 생도로서의 권리를 당신이 박탈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나타샤 치고는 상당히 논리적인 반문이었다.
반대로 율리아는 그녀 치고는 상당히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말이다.
“….”
“….”
두 여인 사이에 또 한 번 차가운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어서는 주먹을 날리는 치열한 난타전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몇 분이 지났을까.
“저기….”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 여인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다.
거기에는 율리아와 나타샤가 방심한 틈을 타 쭈뼛거리면서도 확실하게 클라우스에게 접근하는 세실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율리아가 말했어요. 저, 영 꽝이라고.”
“…?”
“꽝이라고 하니까… 클라우스 교수님께 호, 혼나야 하는 게 아닐까요?”
와, 이 마족 보소. 이 혼전 양상 속에서 기어코 빈틈을 찾아 들어오네.
클라우스가 저도 모르게 푸핫, 하고 웃음을 내뱉자 세실리는 그게 또 ‘그래, 너 좀 혼나야겠구나.’ 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듯 쭈뼛거리면서도 헤실헤실 미소를 짓는다.
덕분에 한창 으르렁대던 율리아와 나타샤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거의 동시에 넌 또 뭐냐고 소리를 치면서 세실리를 붙잡았고 말이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아직 부족하다고는 했지만 클라우스 교수님께 혼나야 한다는 소리는 맹세코 한 적이 없다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이가 없네요. 지금 뭐하는 건가요?! 당신, 레블랑 가문의 자랑스러운 혈통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무슨 그리도 당당하게 혼나야 한다고 말을 하는 거예요!”
“끄아아앙…! 더, 더 혼내주세요…!”
벌써부터 환장의 콜라보를 하고 있는 세 여자였다.
자신은 딱히 뭐 한 것도 없는데 너무 잘 놀고 있는 중이라 방해하기도 좀 그렇다.
해서 옆에 앉아서는 가만히 세 여자의 귀여운 투닥거림을 더 관찰하기로 한 클라우스였다.
“아무튼, 나타샤 당신. 일정 거리 이상 클라우스 교수님한테 붙지 마요.”
“무슨 권리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거는 거죠? 그리고 조금 억울하네요. 내가 뭐 서로의 몸이 닿을 정도로 달라붙었나요? 그냥 개인적인 이야기만 좀 하는 수준에서 거리를 좁힌 건데?”
“그것도 하지 말라고요!”
율리아가 저리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에는, 이번만큼은 제 것을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여태 제 숙부에게 다 빼앗기기만 하던 율리아에게 마지막 희망으로서 찾아온 남자다.
헌데 그걸 또 이상한 요정년이 채간다고 생각하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나마 클라우스가 율리아에게 ‘나타샤가 우리를 돕고 있다.’ 라는 언질을 해서 정말 무력을 휘두르지 않고 말로만 위협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목검을 휘두르면서 머리통을 깨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며칠 사이에 갑자기 애가 되었군요. 좋아요, 그리 떼를 쓰겠다면 혼 좀 나야겠죠. 나와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타샤가 세실리의 목검을 잡아채서는 율리아를 정확히 겨냥한다.
그에 우리의 마왕님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좋다는 듯 나타샤를 노려본다.
“호, 혼나?!”
이상하게 또 그 단어에만 반응하는 세실리다.
클라우스가 그거 아니야, 가만히 있어. 라고 경고를 한 덕분에 바로 입을 다물긴 했지만.
“율리아 생도, 나타샤 생도.”
두 여인의 목검이 막 공중에서 얽히려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그 둘의 움직임을 그 자리에서 멈춰세웠다.
“거기까지. 그만하세요.”
그러자 나타샤는 바로 검을 내리고서 전투 자세를 풀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멈칫하던 율리아는 칫, 하고 그녀를 따라서 바로 검을 내렸다.
“율리아 생도.”
“….”
“율리아 생도.”
“네.”
“따라오세요. 그리고 나타샤 생도는 세실리 생도한테 제대로 검 좀 가르쳐주고요.”
“알겠습니다, 클라우스 교수님.”
나타샤야 남들한테는 날카롭게 반응한다고 해도 클라우스 앞에서는 순하디 순한 여인.
세실리는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어떻게든 혼이 나고 싶어 안달이 난 변태.
하지만 율리아는 독점 당하고 싶으면서 또 동시에 독점하고 싶어 하는 마왕이다.
밑에 깔리고 싶어 하다가도 위에 올라타고 싶어 하는, 그런 여인이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케어를 받아야 하는 쪽이니 당연히 신경을 더 쓸 수밖에 없다.
대련장 한가운데로 들어선 클라우스는 목검을 들어보였다.
“마법 없이, 검으로만 합니다.”
율리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한 번 제대로 알아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