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6장 - 마왕 키우기
“서부 연합 쪽도 참으로 혼란한 정국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너희 마족들도 진통을 겪고 있다 들었는데. 예로 들자면 왕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문제로 너희 귀족들이 세 파벌로 갈려서 아주 지지고 볶고 싸우고 있다거나.”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페르디난트의 표정이 순간 매섭게 변한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 같은 마족도 아니고 인간의 귀에 들어갔다니 유쾌할 수가 없다.
그는 클라우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혹 마왕이 이야기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예상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었으나 다음 나온 클라우스의 말에 페르디난트는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단순히 전투만 잘 했던가? 내가 기억하기론 그게 끝이 아닌데.”
“아….”
페르디난트는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장탄식을 내뱉었다.
눈앞의 저 인간은 단순히 전투만 잘 치르는 그런 사령관이 아니다.
무력도 무력이고 전략도 전략이지만 그보다 더욱 클라우스의 명성을 높인 것.
자신과 같은 마족들이 가장 무서워 한 부분은 바로 클라우스의 ‘정보 수집 능력’ 이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비밀리에 움직여도 그는 기어코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해냈다.
그리고 먼저 선두 열을 치고 다음 후미를 잘라낸 후 몸통을 조각내서 집어삼켰다.
첩자를 색출해도, 극비에 부쳐서 행동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클라우스가 원한다면 알아내지 못 하는 극비 사항은 정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그의 정보 수집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실은 정보 수집이 아니라 그냥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지만.’
페르디난트는, 마족들은, 대륙의 모든 이들은 죽기 전까지도 절대 모를 것이다.
사실 클라우스가 말 그대로 치트, 혹은 핵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괜히 내 새로운 주군 의심하지 말지. 상당히 기분이 언짢은데.”
“…정말 마왕 전하를 따르기로 한 것인가.”
“하도 뒤통수만 맞다보니 이제는 내 뒤를 치지 않을 주인이 간절해졌다고 해두지.”
“그런가. 하긴, 그대라면… 그런 마음을 품어도 뭐라 할 인간이 없겠어.”
한창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던 당시 인간 측 지휘부는 갑자기 클라우스를 경질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귀족 지휘관을 앉혔고 그 직후 역사서에 길이 남을 대패를 당하는 데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클라우스가 몇 년을 공들여 만들어둔 남부군이 거의 전멸하기까지 했었다.
‘그래도, 그래도 저 인간이 정말 인간 왕국을 버리다니.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가 없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선을 사수하면서 기어코 남부를 지켜낸 남자다.
충성심이 없다면, 그것도 약간의 흔들림도 없는 아주 절대적인 충성심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해냈다.
그런 클라우스가 몇 년 전까지 그렇게 피 터지게 싸우던 마족들에게로 귀의한다?
마족들의 군주인 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무릎을 꿇었다?
과연 이 말을 듣고도 몇 명이 그걸 제대로 믿어줄 수 있겠는가.
“본론으로 돌아가지, 페르디. 귀족 놈들에게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내게 남아있는 쪽을 최대한 활용해서 소식들을 모았다. 그 결과 네가 동부 마족의 세 파벌 중 하나인 중립파의 일원이라고 하던데.”
“…그렇다.”
“좋아. 그러면 단도입적으로 말하지. 페르디난트.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 전하를 지지해라.”
단도입적이라고 미리 말을 했지만 정말 돌려말하는 구석 하나 없는 직진이었다.
마족 귀족들도, 하다못해 충성파의 일원들도 그리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는데.
지금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언제, 어느 때 어떤 함정으로 쓰일지 몰라 조심을 하는데.
클라우스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쓸 생각도 없다는 모양새였다.
“중립파이니 뭐니 그런 헛짓거리 말고 그냥 결정해라. 마왕을 따르는 충성파가 되던가, 아니면 역성혁명을 도모하는 역적이 되던가.”
“…말이 과하군, 클라우스. 그대는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 아니던가.”
“그래, 인간이지.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나? 마족인 너희들도 마왕을 따르기를 주저하는 마당에 나는 그녀의 가능성을 한 눈에 알아보고 바로 내 주군으로 인정했다. 이런 식이면 차라리 내가 너희 마족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데.”
클라우스의 조롱에 페르디난트는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저 남자는 동부의 정세가 어찌나 복잡한지 알고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
중립파의 규모가 꽤나 큰 것임을 충성파가, 그리고 역성 혁명파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함부로 중립파에 접근해서 그들을 끌어들이지 않는 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상대 진영에 중립파가 흡수될 수도 있다는 우려로 인해 조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해서 중립파 쪽도 겉보기에만 중립을 주장하는 귀족들의 모임이다.
실상은 언제든 배를 갈아타려고 준비 중인, 눈치만 잔뜩 보는 세력들이 모인 곳이었다.
물론 자신처럼 정쟁에는 관심이 없어서 일부러 거리를 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중립파는 자신들의 상종가를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괜히 자신들의 쪽으로 저울을 기울이려다가 반대로 균형이 완전히 망가져서는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기 싫으니까.
역성 혁명파는 중립파를 자극했다가 충성파로 돌아서면 곤란하고.
충성파는 그들 전부가 역성 혁명파로 들어가면 무조건 필패이니 침묵하고.
심지어 중립파마저 자신들이 사분오열될까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클라우스. 뭐 하나 물어보지. 혹시 마왕이 부탁이라도 했던가? 중립파를 설득해달라고?”
“아니. 전혀. 애당초 그런 부탁을 신하에게 할 정도로 유약한 왕이었다면, 그리도 생각머리가 없는 여자였다면 내가 따르겠다고 나섰을까.”
그렇다, 저 말. 바로 저 부분이 가장 큰 것이었다.
클라우스가 마왕을 따른다, 그 이름 하나로 서부와 동부를 흔들었던 바로 그 클라우스가 아무 것도 없다는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을 따른다고 한다!
그가 대륙 전쟁에서 보여준 것이 얼마나 찬란했는데, 어찌나 영예로웠는데 어리석은 뭔가로 인해 마왕을 따르겠다고 섣부르다 싶을 정도로 빠른 결정을 내렸을 리 없잖은가!
‘젠장, 도대체 뭐야. 저 인간이, 저 남자가 괜히 율리아 마왕을 따르겠다고 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분명 뭔가가 있어. 그저 유약하기만 한 줄 알았던 마왕이 실은 뭔가를 숨기고 있었던 거다. 그걸 클라우스는 한 눈에 알아차린 것이고!’
대륙 전쟁에서 완벽하게 검증된 백지 수표, 그게 바로 클라우스다.
그 남자가 여태껏 제 숙부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마왕을, 가진 것이라곤 그 잘난 마왕가의 혈통이 전부하던 그 마왕을 마주하더니 갑자기 지지하겠다고 나선다는 건 합리적으로 뭔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클라우스가 대륙 전쟁에서 그리도 뼈 빠지게 고생을 한 것이다.
자신의 주변 이들은 물론이고 과거의 명백한 적마저 자신이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면 그곳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뭔가가 있다고 굳게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을 이끌기 위해서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아쉬워서 제안하는 거다.”
“아쉬워서 제안을 한다?”
“마왕이 뭐가 좋다고 너희들을 일일이 끌어들여서 요직에 배치하고 싶겠어. 당장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온 순간에도 저울질이나 하고 있는, 역적이나 다름없는 놈들인데 모조리 목을 쳐서 매달아버리고 싶어도 모자를 거다.”
“….”
“다만 역성 혁명파고 중립파고 다 죽여 없애면 일할 놈들이 없다. 동부라는 거대한 땅 위에 주인 없는 빈 곳만 생겨나는 법이야. 그건 좀 아쉬운 모양이더군.”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페르디난트가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면서 인상을 일그러트린다.
현재 클라우스가 하는 말은 분명 명백한 위협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마왕의 편에 서라는 투로 말하고 있는 중이다.
다른 평범한 이였다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을 돌리던가 사과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이런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한 베테랑, 고이다 못 해 썩은 물이었다.
“맞아. 정확해. 협박하고 있는 거야.”
“…뭐라고?”
“그러면 내가 널 불러서 부탁을 할까, 아니면 거래를 할까. 이건 명백한 협박이다, 페르디난트. 마왕을, 내 여왕을 따르면 살고 반기를 들면 죽는다. 내가 반드시 그리 만들 거다.”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페르디난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리 하라고 답했을 것이다.
덤으로, 애들도 안 쓸 것 같은 협박을 한다고 조금은 비웃는 기운도 머금었을 테고.
하지만 상대가 클라우스다보니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내 여왕을 따르지 않는다면 죽는다, 내가 반드시 죽일 것이다.
단어 하나, 하나가 비수가 되어서는 심장으로 날아드는 듯 했다.
그 스산하다 못 해 싸늘한 어조에 페르디난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울질 하는 놈들을 건질 생각은 없다. 너와 같이 그나마 믿을만한 자들에게나 손을 내미는 것이지, 그런 쓰레기들과 같이 걸음을 뗄 생각은 추호도 없어.”
“기뻐해야 하는 것인가? 그대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거니까 말이야.”
“아니지. 내가 아니라 네 왕에게 인정받은 거다.”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주는 클라우스였다.
덕분에 페르디난트는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이 상황에 답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율리아 아그네사, 그저 부모를 잘 만나서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여인.
그녀가 사실은 자신을 은밀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소리지 않은가.
제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주변에서 배신자들이 속출하는 와중에도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면서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모든 판을 뒤집어 엎을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클라우스 하나 만으로도 충격인데, 저 남자가 따르는 왕이 바로 우리들의 마왕이라.’
어렵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실 페르디난트 자신부터 당장 전쟁 중간부터 계속되던 왕실 내부의 정쟁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제 조카 밀어내고 왕이 되겠다는 숙부나, 왕의 자리에 앉아서 큰 목소리 한 번 내지도 못 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는 마왕이나 모두가 한심했다.
해서 다른 이들이 왕을 바꾸든 아니면 유지를 하든.
그 살아남은 자에게 다만 충성을 다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그리 해서는 안 됐는데 어리석은 결론을 내서는 그게 옳다고 믿었었다.
“클라우스. 지금 내게 이리 제안을 하는 건 그대가 아니라, 마왕 전하의 뜻이라 했지.”
“그래. 나는 다만 내 여왕의 뜻을 대신 전달하고 있는 것뿐이다.”
“좋아. 그러면 대답을 하기 전 그대에게 하나만 묻고 싶군. 그대의 여왕은, 우리들의 마왕은 어떤 분이시던가?”
당연한 말이지만 페르디난트는 율리아의 진짜 모습을 아직 모른다.
그냥 운이 좋아서 마왕의 자리에 있는 것이고 아름다워서 충성하는 자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 안에 어떤 마족보다도 더 사납고 드센 기질이 숨겨져 있음을 전혀 모른 채로 말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굳이 말해주자면 이리 말할 수 있겠지. 나를 손에 쥘 자격이 있는 여왕이다, 라는 정도로.”
클라우스의 대답에 페르디난트는 그런가, 라고 중얼거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그 대답으로 결심을 내린 것이다.
이것으로 마왕을 키우는 가장 기초적인 부분 중 하나가 바닥을 다졌다.
여태까지 중립을 지키던 꽤나 이름 있는 마족이 설득 같지도 않은 설득에 그대로 넘어갔다.
클라우스가 왕으로 인정한 여인이라면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향후 마족들의 땅으로 돌아갔을 때 필요해질 충성 세력들의 결집에 불꽃을 붙여두었다.
이제 한동안은 갑자기 격동하는 중립파로 인해 충성파고 역성 혁명파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시선이 분산된 동안 자신과 율리아는 아주 간단한 일에 매진해야만 한다.
마왕의 수준을 몇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진짜 의미의 마왕 키우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