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6장 - 마왕 키우기
“내가 기억하기로 손을 자른 적은 없는데. 그냥 알아서 열고 들어오도록.”
자리에 앉은 채로 그리 말하는 클라우스.
그러자 문 바깥에서 ‘으잉?’ 하는 탄식이 들려오더니 잠시 후에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교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튼 자네는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어! 이거 참 좋은 일이야. 내가 아는 자들은 전쟁 중에는 명예를 지키던 자들이 그 후에는 갑자기 돌변해서는 권력에 취한 모습을 보였거든!”
터벅터벅-.
한 눈에 봐도 우람한 체구를 가진 마족 남자가 클라우스에게로 다가왔다.
이대로 결투라도 한 번 하자고 칼이라도 뽑아드는 건 아닐까, 하는 분위기까지 가는 듯 했으나 마족은 다만 껄껄대면서 클라우스가 자리한 책상 앞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보다 의외군. 설마 자네가 나와 만나기를 청할 줄이야.”
“생각해보니 너만큼 만만한 놈도 없어서 말이지.”
“그렇지, 그렇지. 그럴 수밖에 없지. 미쳤다고 전쟁 도중에 부하 몇 놈 데리고 찾아가서는 차가 좋냐! 아니면 커피가 좋냐! 라고 물었으니 말이야! 푸하하하하!!”
가식이 아니라 정말 시원하게 진짜 웃음을 내뱉는 이 마족 남자가 바로 그 미친 사령관.
한창 전쟁 중인 상황에 갑자기 클라우스에게로 찾아와서는 차가 좋냐, 커피가 좋냐, 그 질문을 했던 바로 그 마족 측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또한 나중에 내가 율리아를 야금야금 먹을 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줬던 놈이기도 하고.’
아마 클라우스가 몇 안 되게 매 회차마다 챙기는 남성일 것이다.
정말 쓸 만 한 놈이 아니면 같은 물건 달고서 덜렁대는 것들 데리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매번 되뇌던 클라우스였다.
“오랜만이군. 페르디난트 엘세.”
마침내 클라우스가 몸을 돌려서 마족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페르디난트라고 불린 그는 씨익, 미소를 짓더니 아주 담백하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오랜만일세, 클라우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변한 것 하나 없는 마족이다.
그 모습에 클라우스는 역시 믿을 수 있는 카드다, 라고 중얼거렸다.
페르디난트 엘세, 동부 마족 사이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 군부 인사로 특히 중립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엘세 가문의 가주이기도 하다.
충성파보다도 훨씬 규모가 크고 율리아의 숙부를 지지하는 파벌과 비교했을 때도 약간 작은 수준일 정도로 거대한 중립파의 한 축이라 함은, 꽤나 명망 있는 가문이라는 소리다.
‘당장 레블랑 정도는 아니어도 바로 그 밑이라고는 할 수 있지. 무엇보다 페르디 놈은 워낙 무장 스타일이라 따르는 병사들도 많고 말이야.’
전쟁이 끝난 지 아직 많은 세월이 지난 게 아니다.
그렇기에 병사들의 지지는 현재도 매우 중요한 권력의 근간이 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엘세 가문은 중견 귀족들에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클라우스는 바로 저 남자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중립파를 끌어들여서 율리아의 적들이 꿈꾸는 행복 회로를 전부 박살내고 그로 인해서 말 그대로 초조해진 상대를 무척이나 급한 상태로 링 위로 끌어낼 것이다.
“그보다 갑자기 왜 나를 아카데미로 부른 거지? 다른 이도 아니고 나를 말이야.”
“일단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갈 게 있는데.”
“그대의 부탁대로 최대한 조용히 찾아온 거야. 걱정하지 말고 얼른 말이나 해봐.”
역시 일 한 번 시원시원하게 진행하는 남자다웠다.
괜히 손익을 계산하면서 뜸을 들이는 게 아니라 바로바로 행동하는 스타일.
클라우스 본인은 되도록 지양하는 부분이기는 했으나 그만큼 그리 행동하는 자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실은 네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줄까 해서 말이야.”
“중요한 사실? 아, 설마 이제 와서 커피보다 차가 좋아졌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차가 더 좋아졌다면 그 때는 어쩌려고.”
“당연히 그러면 안 되는 거지! 내가 전쟁에서 돌아온 후 얼마나 자랑을 했는데! 클라우스는 차가 아니라 커피를 좋아한다고! 내가 직접 가서 물어봤다고! 그에 남부의 악마가 직접 커피라고 대답을 해주었다고 말이야!!”
“…취향은 언제든 바뀌는 거니 딱히 상관은 없을 듯 싶은데.”
“아니지, 아니야! 그러면 내가 꼭 거짓말을 한 것 같지 않나! 정말 차가 좋아진 것이야? 아니지? 좋아졌다고 해도 커피가 좋다고 해! 내 명예를 위해서 말이야!!”
저게 엘세 가문의 가주라는 놈이 보이는 짓들이다.
심지어 저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알기에 더더욱 웃겼다.
결국 참지 못 하고 클라우스가 낄낄대니 페르디난트는 ‘난 진지하단 말이다, 클라우스!’ 라고 외치면서 그의 웃음을 더욱 증폭시키고 말았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한참을 웃은 클라우스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이대로 시간을 더 끌면 저 마족이 자신을 정말 취향 바뀐 걸 전해주겠다고 부른 것으로 착가할 수도 있기에 슬슬 본론을 꺼낼 시간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페르디. 실은 네게 해줄 말이 있어서.”
“커피말고 또 다른 게 있다고?”
“그래. 아무래도 머지않은 때에 동부로 갈 듯 싶다.”
순간 페르디난트의 얼굴에서 유쾌한 기운이 싹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머무는 것은 경계,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었다.
“…무슨 소리지? 그대가 왜 동부에 온다는 것인가.”
“들은 대로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아마도 근래에 동부로 향할 거다.”
“혹시, 혹시 말이다. 서부 연합이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 건가?”
“….”
“정말인가? 정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야? 그리고 그대가 침략군의 총사령관이고? 동부로 온다는 건 그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클라우스는 일부러 답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요 몇 년 동안 쓰레기 인간 귀족들 때문에 조용히 지내느라 자신이 이뤄낸 것들이 조금은 바래지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지켜봤던 상대가 있다.
이제부터 그가 보이는 반응이 곧 자신의 몇 년 고생을 말해주는 것이 될 터였다.
“…환장하겠군.”
페르디난트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면서 진심으로 환장하겠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더니 끝에는 제 머리칼까지 한 움큼을 쥐고서는 쥐어뜯기 시작했다.
뼈 속까지 무인인 남자가, 심지어 인간도 아닌 마족이 저리 말할 정도다.
덤벼봐라, 올 테면 와보아라, 다 죽여주마, 뭐 이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
페르디난트의 반응을 보면서 클라우스는 내심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자신의 7년 개고생이 헛된 건 아니었기에, 몇 번을 접하는 반응이어도 참으로 기분이 좋은 것이었기에 그 여운을 즐기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페르디.”
“그동안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인가. 큰일이다, 큰일이야. 남부의 악마가 이제는 인간의 영토를 벗어나서 동쪽으로 밀고 들어오겠다니, 이거야 원….”
“페르디난트.”
클라우스의 부름에 페르디난트가 그를 쳐다본다.
그런 마족 남자의 얼굴에, 표정에, 눈동자에 심각한 기운이 가득함을 눈치 챈 클라우스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 반응에 페르디난트가 또 왜 웃냐고 묻듯 묘한 눈길을 보내는 순간.
클라우스는 팔짱을 끼고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넣은 채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인데, 나 이제 인간 쪽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무슨 소리지?”
“군부에서 완전히 내쫓겼다고. 사령관 자리는 다른 귀족 놈에게 반 강제로 내주었고 나란 놈은 이제는 그냥 일개 평민 남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뭐?”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페르디난트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해보였다.
“아니, 그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대륙 전쟁의 영웅을, 남부의 불패 신화를 쓴 그대가 군부에서 내쫓겼다니? 인간들이 단체로 실성이라도 한 것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정말 네 말대로 단체로 미친 것일 수도 있겠지.”
“허, 허허. 이런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다른 이도 아니고 클라우스, 그대를 쳐낸다고? 인간들이 정녕 제정신인 것이야? 온갖 대우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말이다.”
“뭐, 자기들 마음이지. 그래서 말인데, 나도 실성한 척 하고 일 하나 벌였다.”
“일을 벌이다니.”
“말했잖아. 동부로, 마족들의 땅으로 간다고.”
또 다시 나온 클라우스의 말, 동부로 향한다는 이야기.
이번에는 페르디난트도 그 뜻을 곡해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곧 ‘아?’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정말인가?”
“그래.”
“설마 아무 것도 없이 혼자 무작정 우리들의 땅으로 올리는 없겠지. 허면 누구인가. 갈 곳 잃은 그대를 설득해서 우리들에게로 인도한 마족이. 도대체 어떤 이가 그 기나긴 전쟁의 악연을 끝내고 클라우스, 너를 마족들의 땅으로 불러들인 거냔 말이다.”
원래는 저 질문에 대답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쪽도 아쉬운 게 좀 있으니 순순히 대답해주는 편이 좋았다.
“자, 문제 하나 내지. 지금 여기 대륙 아카데미에 누가 있지? 너희 마족들 중에서 이곳에 생도로서 누가 있냐고. 딱 떠오르는 여인 한 명만 대봐.”
이미 힌트는 다 던져둔 셈이었다. 마족, 생도, 그리고 여인이라는 부분까지.
이러고도 눈치를 못 채면 병신 소리를 들어도 뭐라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클라우스, 자네 설마… 마왕 전하와 접촉한 건가?”
“그래. 이미 이야기는 끝냈고, 난 이제부터 인간 왕국이 아니라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무, 무슨….”
“원래는 비밀로 하려고 했다만, 그래도 넌 내가 괜찮게 본 몇 안 되는 마족이기에 미리 말을 해주는 거다. 일종의 특별대우라고 생각해두면 될 거다.”
특별대우라는 말에도 페르디난트는 멍한 기색을 거두지 못 했다.
그 클라우스가, 인간으로서 마족들과 혈전을 벌였던 그 남자가 마왕을 따르겠다니?
이건 충격적인 일이다 못 해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이가 다름 아닌 클라우스 본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클라우스라면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을 할 위인이 아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모든 말들은 오로지 사실일 뿐이다.
“도대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마왕 전하가 아카데미에 생도로 간 것도 충분히 난감했었는데 갑자기 그대가 마왕 전하를 따르는 신하가 되겠다니.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던 페르디난트의 머릿속에 순간 율리아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실권 하나 없는 마왕이라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동부 마족 전체를 다스리는 군주다.
그런 존귀한 여인이기에 자신도 해봤자 비교적 먼발치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페르디난트는 율리아의 그 고귀하면서 빛나는 자태를 잊을 수가 없었다.
여인에 대해서 딱히 관심이 없는 자신조차 그리 흔들 지경인데 그 마왕이 혹시….
‘혹 율리아 마왕이 자신을 미끼삼아서 클라우스를….’
라고 비교적 실현 가능성이 높은 부분에 대해 생각하던 찰나.
“딱 보아하니 제법 재미있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지?”
“페르디, 넌 내가 뭐라고 생각하나. 7년 동안 마족들을 상대로 싸운 놈이 고작 마족 여인 하나의 치마폭에 쌓여서는 헤벌쭉 해서 그대로 넘어간 놈이라고?”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페르디난트가 그대로 입술을 깨문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속으로 강하게 타박을 하기도 했다.
“미안하군. 네가 어떤 인간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인정이 빨라서 좋아. 인간 귀족들 같았으면 역으로 역정을 냈을 텐데.”
“…그보다 정말인가. 네가 마왕 전하를 따르기로 했다는 것 말이다.”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면 그리 하도록 해. 안 말린다.”
“젠장. 그렇게 말하니 더더욱 신뢰만 늘어나잖아.”
다시 한 번 얼굴을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뱉는 페르디난트였다.
클라우스가 서부 연합군을 통솔해서 동부로 진격하는 것 그 이상으로 충격적이다.
그가 인간 왕국을 벗어나서는 마왕을 따른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 한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고 그 감정의 골은 지금도 깊게 패여서는 그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을 텐데.
페르디난트는 잠시 그렇게 끙끙대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보다, 내게 왜 그 소식을 알려주는 거지? 단순히 나를 괜찮은 자라고 평가했다는 이유만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입 꼬리를 올렸다.
이 마족 놈이 너무 뻔한 것을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