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6장 - 마왕 키우기
어느 부분으로 봐도 율리아 입장에서는 결코 달가운 손님이 아닐 수밖에 없는 상황.
“들어오세요, 세실리 생도.”
그런 달갑지 않은 손님을 클라우스는 웃으면서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화가 치민 율리아가 막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려는 찰나.
“말했습니다. 숙부에게도 누구를 믿어야 하고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하는지. 그런 즐거운 고민을 안겨주자고 말이죠.”
“….”
“율리아, 당신도 곧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만 지켜보세요.”
클라우스가 저렇게 말하니 율리아로서는 딱히 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쏟아지려는 분노를 억지로 참아낸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율리아는 교수실 안으로 들어선 세실리와 딱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어…?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
“생도에요. 당신과 같은 생도. 세실리 레블랑.”
율리아가 직접 지적을 해주니 세실리는 아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 후 클라우스와 그녀를 번갈아보던 그녀는 들어왔던 그대로 살짝 뒷걸음질을 친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선약이 있으셨을 줄은 몰랐어요. 제가 나중에 다시….”
“아뇨. 그대로 있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율리아 생도와는 이야기다 얼추 끝난 상태니까요. 그렇죠, 율리아 생도?”
“…네.”
여전히 불만이 많다는 것을 단답형으로서 내보이는 율리아.
벌써부터 클라우스 곁에 자신 외에 다른 여자가 꼬이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소유욕, 아니 그걸 넘어선 독점욕이 일렁이는 모양이었다.
“어제는 어땠나요. 세실리 생도. 내가 특별 지도를 해주었는데. 좀 좋아진 것 같습니까?”
“특별 지도라고요?”
“에? 아, 아아! 그, 그거….”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율리아.
그와는 반대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세실리까지.
실로 재미 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 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우스는 너무나도 고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얼마나 좋은 검을 얼마나 훌륭한 검술로 휘두르느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신의 발이 어디로 위치하는지, 상대방의 체중은 어디에 실리는지. 그걸 먼저 파악하세요. 본격적인 검술 훈련은 그 다음입니다.”
“네, 네. 이해했어요. 어제는 정말… 그러니까. 가,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 감사. 오히려 그런 인사는 이쪽이 해야 할 판인데.
클라우스는 계속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아주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굳이 저 변태 마족 여인을 조련해주고 있는 이유?
괴롭히는 맛이 있어서? 재능이 상당히 뛰어나서? 그도 아니면 미녀라서?
전부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부 아니기도 했다.
클라우스가 굳이 세실리를 품으려고 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나중에 가면 세실리가 상당히 골치 아플 수도 있는 남자를 제거해주거든.’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세실리의 아버지이자 현 레블랑 가문의 가주.
눈치도 좋고 실력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뒷심도 있어서 확실하게 제압하지 않으면 반드시 역습이 나오고 마는, 그런 성가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헌데 세실리를 포섭해두게 되면 차후 그녀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그 남자를 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임무를 맡게 되는 건 다름 아닌 세실리가 될 것이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보다 더 잔혹한 일도 없겠지만, 세실리를 이쪽으로 끌어들이겠다고 결정한 이상 그보다 더 좋은 길도 없다.
율리아 입장에서는 레블랑 가문이라고 하면 숙부의 편을 들었던 곳이니 결코 반길 수도 없고 그러고 싶다는 마음도 없을 것이며 몇 안 되는 충성파들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딸인 세실리가 직접 가주를 처단하고 마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한다면 율리아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얻는 것이고, 클라우스는 아무 걱정 없이 계속 세실리를 불러들여서 괴롭힐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타샤와의 경우처럼 저 둘도 나름 괜찮은 관계를 쌓아두어야 한다.’
단순히 율리아를 홀라당 먹어치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장 마왕가의 비선실세로 살아가던 시절에 마왕의 충성파들이 클라우스의 존재에 대해서 껄끄러워하고 반대 의견도 간간이 보이기도 했었다.
덕분에 마왕가 내부가 시끌시끌하기도 했는데 그런 소란은 인간인 클라우스 입장에서는 결코 달가운 게 아니었다.
아무 탈 없이 이번 회차를 완벽한 그림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런 부분을 없애야 했다.
율리아의 주변에 자신을 위해 움직일 만한 이들을 최대한 많이 배치해두는 것.
단순히 마왕가 내부뿐만이 아니라 외부까지 모두 다 말이다.
“도대체 뭐죠? 클라우스 교수님이 주말 사이에 세실리 생도와 대련을 했다는 건 아는데, 이렇게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건….”
“맞습니다, 율리아 생도. 확실히 처음에는 정말 최악이라고 불려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심각했었죠. 그렇지 않습니까, 세실리 생도?”
“네, 네. 맞아요. 클라우스 교수님한테 엄청 혼났었어요. 네, 엄청 많이 혼났죠….”
그렇게 말하는 세실리의 두 눈동자가 슬그머니 풀리기 시작한다.
어제까지 실컷 맞던 엉덩이가, 그리고 줄에 쓸리던 보지가 화끈해지면서 당장이라도 얼른 괴롭혀달라고, 때려달라고 말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내는 듯 한 모양새다.
“하지만 역시 천재라 불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더군요. 그렇게 몰아붙였음에도 이후 다시 찾아오더니 꽤나 괜찮은 검을 보게 된 것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그 정도라고요?”
클라우스가 감탄했다는 말에 율리아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 자신의 적이 될 확률이 매우 높은 여자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남자에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상당히 거북하면서도 제대로 한 번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 생도. 가능하다면 당신이 세실리 생도와 시간이 될 때마다 같이 어울리면서 검을 가르쳐주고 마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데요. 두 생도 모두 무척 우수한 인재들이니 서로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 하셨죠? 저보고 세실리 생도의 상대가 되어달라고요?”
“나타샤 생도와의 대련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바쁘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강대한 적과 계속 싸우면서 뭔가를 채우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과연 애게 부족한 게 뭘까 고민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율리아의 얼굴에 상당히 불쾌하다는 감정이 실린다.
왜 하필 자신이 세실리의 상대를 해줘야 하냐는 질문이 담겨있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실리는 레블랑 가문의 직계이고 그 레블랑 가문은 마왕인 자신이 아니라 제 정적인 숙부를 지지하는 세력 중 하나이다.
즉 세실리는 아무리 좋게 보고 싶어도 명백한 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태였다.
헌데 그런 세실리를 상대해주라는 말은 결국 도와주라는 소리다.
자신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는 클라우스가, 레블랑 가문은 결코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 남자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내게 그런 일을….’
막 불만을 제기하려던 순간, 율리아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그의 부드러운 미소, 걱정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보라는 남자의 속내를 말이다.
“….”
클라우스와 알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묘하게 그를 믿고 싶다는 마음이, 믿어야만 한다는 본능이 가슴 한 구석에서 계속 요동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머리는 왜 레블랑 가문의 딸을 돕느냐고 소리를 치고 있는데.
정작 그녀의 가슴은, 심장은 거세게 요동치면서 뭔가 이유가 있을 터이니 따르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율리아를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실리.”
“네, 네.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 전… 아니, 율리아.”
“확실히 말해둘게요. 난 클라우스 교수님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도 더 날카롭게 굴 거예요. 당신의 검술이 아직 기초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그걸 봐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말이죠. 어제 내가 봤던 그 장면을 또 한 번 되풀이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일부러 클라우스에게 당했던 일들을 끄집어내는 율리아였다.
자신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당사자인 너는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음에도 클라우스의 말에 따라서 자신과 붙을 수 있냐, 그녀는 그렇게 묻고 있는 중이었다.
보통의 마족이라면 그 말이 나온 순간 얼굴이라도 찌푸렸을 것이다.
단순히 패배만 한 게 아니라 아예 클라우스의 발 아래에 깔려서는 온갖 모욕까지 들었던 순간을 상기시키고 있으니까.
허나 유감스럽게도 상대방은 세실리였다.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요 조롱과 멸시, 각종 부정적인 공격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마저도 쾌락으로 승화시키는, 클라우스가 인정한 최고 수준의 변태 마족!
“네! 괜찮아요!!”
“…잠깐만. 지금 뭐라고요?”
“괜찮아요! 율리아! 그렇게 해줘도 저는 상관없어요!”
“진짜요? 정말로 괜찮다고요?”
“네!!”
“….”
전혀 예상치 못 한 대답이 나와서일까.
율리아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스는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이 마족 여자가 왜 이러냐고, 내가 알던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이 맞느냐고.
그에 클라우스는 대답 대신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맨날 내가 괴롭히면 그거대로 재미가 없잖아. 나한테도, 세실리에게도.’
다른 이한테 괴롭힘도 받고, 그러면서 감칠맛도 느끼고 아쉬운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실리는 더더욱 클라우스에게 매달려서 더 아프게, 더 괴롭게 해달라고 보채면서 스스로 몸을 대줄 것이었다.
더해서 매일 같이 대련을 하자고 여전히 찾아올 세실리의 방문 횟수도 좀 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은 따로 있지.’
그 후로 약간의 이야기를 더 한 후 세실리가 먼저 교수실을 나섰다.
클라우스의 말대로 율리아와 시간이 될 때마다 대련을 하겠다는 말을 남겨두고서 말이다.
“….”
“….”
교수실에 남게 된 클라우스와 율리아.
잠시 말이 없던 남녀 사이에 막 침묵이 감돌려는 찰나, 먼저 입을 연 건 클라우스였다.
“혹시 아직도 이유를 찾지 못 했습니까?”
“….”
“지금쯤이면 대강 눈치를 챘을 법도 싶은데요.”
클라우스의 말에 고개를 든 율리아는 잠시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이게 맞냐는 듯 조금씩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입술을 열었다.
“세실리 레블랑을 이용할 생각인가요? 이곳 대륙 아카데미는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닌, 대륙 곳곳의 눈과 귀가 집중된 곳. 그런 상황에서 이름뿐인 마왕과 그 마왕을 지지하지 않는 가문의 딸이 굉장히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이것 말이에요.”
“충분히 가능한 부분 아닙니까? 보통의 권력자라면 제 부하 놈의 딸이 자신이 가장 견제하고 있는 여인과 굉장히 가까운 사이임을 전해 듣게 된다면 분명 경계를 하든 의심을 하든, 하다못해 한 소리라도 할 것 같은데요.”
“내 숙부는 그리 만만한 남자가 아니에요. 그리 단순했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를 빈털터리로 만들고 진정한 권력자가 될 수도 없었겠죠.”
“그런가요.”
“또 있어요. 세실리 레블랑은 레블랑 가주와 사이가 돈독하다고 했어요. 지금이야 저와 가깝게 지낸다고 해도 가문에서 더는 그러지 말라는 뜻을 내비치면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둘 걸요?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레 소문도 사라지겠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
“….”
율리아는 말을 멈추고는 클라우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답을 하는 남자의 표정 어디에도 뭔가를 걱정하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말했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진작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군요.”
“혹시 또 모르니까요. 세실리가 가문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당신 곁에 남을지도요.”
“…레블랑의 가주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겠어요? 나는 내 숙부가 반드시 치워내야 할 상대이고, 그 상대와 자꾸만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굉장히 타당한 반문이다.
하지만, 율리아는 모르고 클라우스는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현 레블랑의 가주는 막내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마족이라는 것.
그래서 율리아의 숙부가 압박을 함에도 딸에게 율리아와 거리를 두라 강력하게 말을 하지 못 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