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5장 - 주말에는 역시
“아.”
문득 느껴지는 통증에 세실리는 비로소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몇 시간동안 쉬지 않고 목검을 휘두르다가 손아귀가 찢어진 모양.
순간 화끈한 느낌이 들더니 곧 알싸한 고통이 찾아온다.
세실리는 제 손바닥 사이로 흐르는 붉은 피를 바라보다가 겨우 목검을 놓았다.
“….”
이른 오전 시간, 한 인간 남자에 의해 정말 무참할 정도의 패배를 겪었다.
단순히 대련에서 졌다, 따위의 말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치욕도 그런 치욕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른 마족 생도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레블랑 가문의 직계로서 그런 치욕을 당했음에도 날 선 반응을 한 번 보이지 않았으니 그들이 이제 세실리를 대놓고 무시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상대가 클라우스 교수였기에.
대륙 전쟁의 영웅이자 마족들이 남부의 악마라 부르는 인간이었기에 차가운 시선만 보낼 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분해. 분해 죽을 것 같아.’
클라우스의 말에 그게 아니다, 오해다, 당신이 지레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세실리는 그리 당당하게 말하지 못 했다. 그냥 말만 더듬을 뿐이었다.
마음 한 켠에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었음을, 대련은 그냥 단순히 대련 그 자체라고만 생각하면서 승패뿐만이 아니라 생사가 오고 가는 그런 전장이라고는 생각지 않은 부분이 약간이나마 있음을 거짓말로 가릴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은 클라우스의 질문에 순간 아니라고 확실하게 답하지 못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교수실로 뛰어가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당신이 잘못 안 것이라고, 오해라고, 지레짐작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말대로, 나는 약했고, 패배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찾아가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한들 패자의 비겁한 말장난에 불과할 거야.’
속임수나 암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정정당당한 싸움에서 자신은 패배했다.
그것도 단 한 마디 변명의 여지없이 깔끔하게 말이다.
세실리가 제 가문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싸움에서 패배한 자는 말을 아끼라고, 설사 할 말이 있다고 해도 괜한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입을 놀리지 않는 게 좋다고.
‘클라우스 교수님에게 내 진심을 보여드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단 하나. 더 강해져서 그 분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
자신이 한 단계, 아니 몇 단계를 성장한다면 그도 자신을 달리 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세실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클라우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단 말인가.
혼자 이렇게 무작정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면 대련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상대가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끌어올려줄 그런 상대는 아무리 떠올려 봐도 생도들 사이에서 딱 나타는 이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다른 이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를 하고 있지 않은 게 맞을 지도 모른다.
클라우스 교수. 세실리는 오직 그만이 자신을 더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 제 손아귀가 찢어져서 피가 철철 흐르기 직전까지도 그를 생각하면서 목검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어째 느낌이, 지난 몇 년 동안 수련한 것보다 요 며칠 클라우스 교수님께 맞으면서 배운 게 더 와 닿는 느낌이야. 정말 그 분의 말대로 실전에 가까운 경험이 없어서였을까?’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서 막 두근거리는 감정이 든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른 이들이 칭찬 일색을 할 때보다 험하게 대해줄 때 훨씬 더 가슴이 뜀을 느꼈다.
마치 느릿하게 돌아가던 바퀴에 속도가 붙는 것처럼, 게으름을 부리던 말에게 한 차례 채찍질이 가해진 것처럼 그렇게 맹렬히 달렸던 자신을 떠올렸다.
역시 그 분밖에 없어, 클라우스 교수님만이 지금의 나를 더 위로 끌어올릴 수 있어.
실전과 같은 혹독한 경험을 통해야만 강해질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실전과 같은 경험, 느낌을 주는 이는 오직 클라우스 교수님 밖에 없어! 라는 생각이 세실리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실은 그런 이유가 전혀 아님을.
다른 이유가 있음에도 세실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왜 멀쩡한 이가 다른 이한테 고통을 받는 게 즐겁다고 생각하겠느냐고.
이런 생각을 애써 하면서 그냥 실전 경험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라 여겼다.
제 방으로 돌아간 세실리는 땀으로 흠뻑 젖은 겉옷을 벗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 후 주섬주섬 속옷을 벗던 그녀는 문득 팬티가 아까 전보다도 훨씬 더 축축해져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뭐냐고, 도대체.’
차라리 오줌이라도 지렸다면 자괴감이 덜 했을 지도 모르겠다.
세실리도 이미 성인이 된 만큼 제 팬티에 잔뜩 묻어있는 이 액체가 무엇인지.
어느 상황에서 흘리는 것인지 정도는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쏴아아아-.
제 몸 위에 뜨거운 물을 끼얹고 몸을 씻어낸 세실리는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벽에 기대어 앉아있던 그녀는 이내 턱 바로 밑까지 담그고서는 생각에 잠겼다.
‘결정을 내려야 해.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해야 여기서 강해질 수 있을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다만 세실리는 그 답을 실행할 결정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대로 클라우스를 찾아가면 마음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뭔가를 인정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클라우스에게 쓴 소리를 듣고 그의 공격에 당하면서 끝에는 밑에 깔리는 생각을 하니 또 다시 미친 듯이 심장이 뛰어서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스스로가 이렇게나 이상하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그 끔찍한 패배를 당했는데 뭐가 좋다고 이리 가슴이 뛰고 미소가 피어오는 것인지.
찾아가면 기다리고 있는 건 날이 선 대답과 자비 없는 대련일 텐데.
“도대체 나 왜 이래…!”
참방, 참방!-
결국 참다 못 한 세실리가 제 얼굴에 물을 끼얹으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완전히 물에 젖어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떼어내던 그녀는 문득, 제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무리하게 목검을 휘두르다가 손아귀가 찢어졌다.
마법을 쓰든, 약을 바르든, 포션을 쓰든 뭘 했으면 금방 나았을 상처.
하지만 세실리는 저도 모르게 그 상처를 피가 흐르지 않을 정도만 치료했다.
그리고서 여전히 불그스름한 기운이 남아있는 그대로 온수 안으로 손을 넣었다.
당연히 아프고, 따갑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그 고통이 전해질수록 어디 한 구석이 자꾸만 간질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썩 나쁘지 않다는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뭘 고민해. 저질러보자. 이렇게 축 늘어져 있을 수는 없어.’
고민이 끝난 세실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평소의 그 정갈한 복장을 하고서 손에는 붕대를 감은 채 제 방을 나섰다.
늦은 오후 시간이 되었던 터라, 그리고 당장 내일부터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터라 다른 생도들은 슬슬 제 방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혼자 역주행 중인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이었다.
‘잘 하는 짓일까?’
라는 생각이 수십 번은 더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수 외에는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싫었을 수도 있겠다.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몇몇 생도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평소의 세실리라면 반갑게 인사라도 하면서 지나쳤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 했다.
당장 자신이 왜 이리 다급하게 클라우스에게로 찾아가는지, 그것부터가 가장 큰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으으.”
클라우스의 교수실 근처까지 다가오니 아까 전 자신을 그리도 거칠게 몰아붙이던 남자의 무시무시한 마력이 일부나마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력에 민감한 자들이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 수도 있지만 세실리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들어올 생각이면 일단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그 다음에도 들어오고 싶다면 그리 하라는 듯 예기를 드러낸 그 마력들을 말이다.
똑똑-.
잠깐 망설이던 세실리는 결국 두 눈을 감고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곧 안에서 무시무시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라 생각했는지 마족 여인이 눈을 꼭 감은 채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조용했다.
분명 안에서 마력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걸 보면 안에 확실히 있는 것인데 노크 소리를 못 들은 모양.
혹시 너무 긴장해서 노크를 너무 작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실리는 숨을 고르고서 다시 손을 들어서는 교수실의 문을 두드렸다.
“클라우스 교수님?”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혹시 자신이 뭔가 잘못 파악하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달칵-.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그 누군가가 클라우스라고 생각한 세실리가 다급히 고개를 숙이면서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 그 직후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저기, 세실리 레블랑 생도님. 마, 맞으신가요?”
…여인의 목소리?
분명하다, 지금 자신의 귀에 들려온 이 목소리는 클라우스의 것이 아니다.
완연한 여인의 목소리, 더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든 세실리는 제 앞에 서있는 여인을 바라보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시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입고 있는 옷도 생도복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복장이었기에 더더욱 헛갈렸다.
더해서 클라우스의 교수실 안에 왜 이런 처음 보는 여인이 있는 것인지, 그게 세실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의문이었다.
“세실리 레블랑 생도. 마, 맞으시죠?”
“그런데요.”
“드, 들어오세요. 클라우스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클라우스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 말에 세실리는 자신이 잘못 파악한 게 아님을 알았다.
이 방 안에 자신이 만나고 싶어 했던 남자가 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 한 손님이 그와 같이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뭔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세실리를 뒤로 한 채 그 여인은 몸을 돌렸다.
덕분에 세실리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자신을 안으로 들이는 그 여인이 알고 보니 위에만 옷을 걸치고 있고 아래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흐악?!”
“왜, 왜 그러시죠?”
“다, 당신 뭐에요. 왜, 왜 밑에 아무 것도 안 입고 있는 거예요?!”
세실리의 질문에 그녀를 안내하던 마족 여인, 그림자의 일원이었던 리르는 아, 하고 탄식을 내뱉으면서 슬쩍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세실리는 미처 보지 못 한, 새빨갛게 부어오른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한 게 있어서… 클라우스 님께 벌을 받고 있어서요. 그런 와중에 세실리 생도님이 찾아오신 거고요.”
“벌을 받고 있었다고요? 클라우스 교수님한테?”
아니, 무슨 벌을 받고 있기에 왜 이리 헐벗은 모습이 되었단 말인가.
거기에다가 클라우스가 직접 주는 벌?
“네. 어… 보여드릴까요? 궁금해 하시면 보여드리라고 했는데….”
“에?”
됐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리르가 가리고 있던 몸을 돌린다.
덕분에 그녀의 뒤태가 드러났는데, 꽤나 예쁜 피부를 지녔던 몸이 엉덩이 부근에서 새빨갛게 부어오른 게 세실리의 두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어, 어어….”
“이렇게 혼나고 있었어요. 이렇게 막. 찰싹찰싹….”
얼굴을 붉히면서 제 엉덩이를 가볍게 쳐보는 리르.
그 모습에 세실리는 대답조차 하지 못 한 채 다만 탄식만 흘릴 뿐이었다.
클라우스한테 혼나고 있다고? 막 저렇게 엉덩이를 찰싹 찰싹 맞으면서?
아프다고 앙앙 울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 그럴 때마다 더욱 거칠어지는 남자의 손길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만해달라며 매달리면 거칠게 밀어내고서 발로 자신을 짓밟으면서 기대 이하의 쓰레기는 이런 대접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클라우스의 외침이 들리고, 그리고 또….
“세실리 생도님?”
“지, 지금. 지금 교수님 어디 계시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리르의 대답에 세실리는 그녀를 지나쳐서 교수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마 세실 리가 뭔가를 좀 아는 여인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지도 모르겠다.
군침이 싸악, 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