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5장 - 주말에는 역시
투툭!-
목검을 대충 내던진 후 클라우스가 대련장 바닥에 쓰러진 세실리를 내려다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눈물에 콧물에 침까지 질질 흘리던 세실리도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클라우스를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죽은 마족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겠군요. 이런 것들을 위해서 전장에서 스러졌으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세실리 생도.”
“끄흑, 끅….”
“부끄러운 줄 아세요. 나와 싸웠던 마족들은 팔다리가 잘리고 몸통에 구멍이 뚫려도 오직 나만을 향해 달려들 뿐이었습니다. 이건 대련이니 그 정도는 필요 없지 않느냐? 여기서 형편없는 이가 실전에 간다고 형편없는 모습이 없어질 것 같습니까? 헛소리 마세요.”
내부에서부터 마력이 진탕이 되어 몸 전체가 격통으로 쑤시고 있을 것이다.
보통 고통이 아니다, 저 정도면 어지간한 마족 전사라고 해도 전투는 고사하고 제대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게 정상이었다.
즉, 세실리가 이런 상태에 빠진 건 솔직히 말해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란 것이었다.
“일어나세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꾸우욱-.
가장 끔찍한 치욕, 쓰러진 자를 발로 꾹꾹 짓밟으며 클라우스가 이죽거린다.
주변에서 대련장을 바라보고 있단 마족들이 웅성거리면서 이쪽으로 적의에 가득 찬 시선을 비치지 시작했다.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 세실리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미 패배해서 더는 싸울 수도 없는 이에게 치욕을 주는 게 무척이나 불편한 모양이었다.
“클라우스 교수님. 그만 하시는 게 어떤가요.”
결국 몇몇 마족 생도들이 대련장 위로 올라와서는 입을 열기까지 했다.
레블랑 가문을 위해 움직였다기보다는 그래도 동족이 인간의 발밑에 깔려서 허우적대는 꼴이 영 보기 싫었던 듯 하다.
“이미 승부는 났습니다. 세실리 레블랑 생도의 패배입니다. 헌데 어찌 하여….”
“나와 싸웠던 마족들은 이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처절하게 싸웠다. 비참하고, 불쌍하며, 가련했지만 그 누구보다 명예로웠고 강인했으며 멋진 자들이었다.”
갑작스레 클라우스의 입에서 마족 쪽을 평하는 말이 나오자 막 입을 열려던 마족 생도들이 그대로 말을 멈추고는 그를 응시한다.
마족들이 남부의 악마, 클라우스를 평하는 거야 많이 듣고 봤지만 반대로 클라우스가 자신과 싸웠던 마족들을 평하는 건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들도 나도 결국 하나를 위해 싸웠어. 내 뒤에 있는 누군가를 위함이었지. 결과적으로 나는 살고 그들은 죽었지만 난 차라리 그들이 더 낫다고 여겼다. 뒤에 있는 것이 내게는 쓰레기였고, 그들에게는 그래도 보석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별 다른 게 없군. 그들이 불쌍해진다. 뭘 위해 싸웠고, 뭘 위해 죽었는지. 이제는 알 수가 없어.”
자신의 적이었던 자들을 인정하는 동시에 제 뒤에 있던 인간 귀족들을 비난한다.
그리고 지금의 마족들을 비판하면서 또 명예로운 마족 전사자들을 치켜세워준다.
때문에 마족 생도들은 차마 입을 열어 반박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못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륙 전쟁의 전사자들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성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더해서, 그토록 강인해보이던 남부의 악마가 왠지 모르게 무겁고 또 슬픈 분위기를 보이니 자신들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도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던 희대의 쓰레기 같은 남자가.
어느 순간부터는 말 못 할 사연으로 인해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그런 비운의 전쟁 영웅으로 보이고 있었다.
“세실리 레블랑 생도.”
발을 치운 클라우스가 몸을 숙여서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댄다.
그리고는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로 천천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강해진다는 게 단순히 마법 좀 날려본다고, 검 좀 휘두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그 약해빠진 마음부터 추스르는 게 좋아요. 그게 안 된다면, 당신은 영원히 지금의 이 형편없는 쓰레기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겁니다. 영원히 말이죠.”
“끄으으….”
“방법을 찾으세요. 당신이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클라우스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족 생도들의 시선들, 누구는 여전히 적의를 품고 있었고 또 누구는 압도적인 강함에 대한 동경심을 보였으며 또 누구는 클라우스가 한 말에서 그가 상당히 좋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눈치 채기도 했다.
‘의견이 하나로 뭉치면 자연스레 나중에 그 하나 된 의견에 내쫓기기도 쉬워. 나에 대한 마족들의 평가는 항상 최악의 적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자, 이 둘로 나뉘어 있어야만 한다.’
과한 찬양은 율리아의 입장에서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평가가 나뉘어져있고 파벌이 갈리게 되면 오히려 그를 이용해 율리아는 더욱 효과적으로 자신 밑으로 들어올 이와 그리 하지 않을 인물들을 골라낼 수 있었다.
“…너무 심했던 거 아닌가요?”
방으로 돌아가던 클라우스를 붙잡은 건 역시나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율리아.
레블랑 가문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제 숙부의 가장 든든한 후원 세력임을 이미 다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세실리는 그런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임을 잘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뭔가 개운치 못 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그녀도 세실리 레블랑에 대해서 단순히 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증거였다.
“다 보고 있었군요.”
“대련장에서 세실리 레블랑을 시종일관 몰아붙일 때부터요. 이전처럼 적당히 하실 줄 알았는데 설마 그렇게나 맹렬히 공격할 줄은 미처 몰랐네요.”
“자꾸 오냐오냐 해주면 세상이 쉬운 줄 압니다. 애도 아니고 다 큰 여인이, 심지어 나름 마법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실력자가 그런 철없는 애송이라니 조금 화가 나서요.”
“…뭐에 화가 났다는 건가요?”
“전부 다.”
모호하게 뭉뚱그려 말하는 클라우스의 대답에 율리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족들과 가장 처참히 싸웠던 남자이기에 마족들에 대해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과 싸웠던 그 마족들을 진정한 적수였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인간 귀족들이 싫어할 만도 하네요.’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남자가 평민에 귀족들과 딱히 친하게 지내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도 모자라 적을 치켜세워주기까지 하니 그들 입장에서는 클라우스만큼 눈엣가시인 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인해 귀족들의 기득권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마당에 평민 출신의 클라우스가 군부 최고 인물로 되어 있는 건 불안함을 넘어서서 불길함을 안겨주었으리라.
‘역시 다른 뜻을 품고 내게 다가온 게 아니군요. 다행이에요. 나만 당신에게 빠진 게 아니라 당신도 내게 빠졌음을 이리 알게 되어서.’
클라우스와 함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부끄럽기도 했었고, 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제 자신은 그를 전적으로 믿는데, 그는 과연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다가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상처 입고 쉴 곳을 찾아 헤매던 이였는지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런 부분이 이제는 정말 말끔히 해소되었다.
하는 말이나 보이는 행동으로 봤을 때, 그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신에게 바치겠다는 그 충성의 맹세가 진실임이 확실했다.
“그보다, 율리아 생도. 걱정해야 할 텐데요.”
“네?”
“나타샤 생도가 당신을 반드시 이기겠다면서 눈에 불을 켜고 수련 중이던데.”
“…그 요정 여자가 저를 이기겠다고 했다고요?”
“어제 잠깐 만났는데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정확히는 어제부터 해서 하루 종일 섹스 삼매경에 빠져 있었지만.
일단 두 여인의 적당한 경쟁 구도는 서로에게 이득이 될 터이니 어느 정도는 불꽃이 튀도록 숨을 불어주는 편이 좋았다.
“하, 그 여자가 진짜. 자꾸 기어오르려고 하네요.”
같은 마족이라면 또 모를까.
할 줄 아는 거라곤 도도한 척, 고귀한 척 하는 게 전부인 요정들.
그 잘난 마법 실력에 화살 좀 날리는 게 자랑인 줄 아는 존재들.
그 요정의 여인이 자신을 이겨보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단다.
심지어 다른 이들 앞이라고 해도 못 참을 텐데.
자그마치 ‘내 남자’ 인 클라우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단다.
‘좋아. 진심을 다 해서 상대해주도록 하죠. 나타샤 벨라루스.’
근접 전부 부분에 있어서는 호각을 다툰다고 하지만 마법 부분에서는 압도적 차이가 있었다.
그 부분을 생각하여 잠시 안심하고 있었던 자신을 속으로 호되게 질책하는 율리아였다.
왕이라면 마땅히 모든 부분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짓뭉갤 수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다시는 눈을 위로 올릴 수 없게 해야 한다고 마왕은 생각했다.
거기에 그녀가 클라우스를 바라보는 눈길이 묘했던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분명 그를 끌어들여서는 또 한 번 이용해 먹으려는 게 분명하다.
인간 귀족들에 의해서 실컷 이용당하고 버림 받은 남자를 다시 한 번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또 한 번 이용만 하고 나중에 가서는 비참하게 버리려는 게 뻔하다.
율리아는 그리 생각하며 적의를 불태웠다.
“…그러면 저도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겠네요.”
“상대방의 약점을 공략하던가, 아니면 본인의 약점을 채우도록 하세요. 율리아 생도. 강점만 키워나가는 건 언젠가 한계가 보일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번 대련에서 느낀 게 있어요. 그 나타샤라는 요정, 생각보다 검을 아주 잘 다루더군요. 요정이라 하면 그냥 활이나 잘 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정하면 무조건 활과 화살이라는 인식은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의 영향을 받아서다.
때문에 그 인식이 쉽사리 바뀌는 일은 없었고, 그런 이유로 나타샤는 이후로도 꽤나 신기하거나 특이한 취급을 받게 된다.
“아, 그리고.”
율리아를 손짓으로 부르는 클라우스.
주변을 살피며 누가 없음을 확인한 마왕이 다가오니 그는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중에 한 번 이후 일에 대해서 의논토록 해야겠습니다. 내가 여태까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율리아 생도, 아니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의 앞길을 사사건건 가로막는 남자가 있다고 하던데. 그를 치워낼 계획을 세워야 할 겁니다.”
“…!”
제 숙부의 이야기가 나오니 바로 눈동자에 살기가 감도는 율리아다.
어찌나 살기가 줄기줄기 솟구치는지 클라우스마저 순간이나마 움찔할 정도였다.
“뭔가 좋은 수가 있나요?”
“나를 끌어들인 게 당신의 든든한 우군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습니까? 무력도 무력이지만 싸움터를 내려다보면서 한 번에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 자 말입니다.”
“…맞아요. 그런 목적으로 당신을 원했어요. 분명 내게 도움이 될 만한 남자이니까.”
“역시 그러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전부는 아니다, 그 말에 클라우스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이냐는 듯 율리아를 쳐다본다.
이미 그녀가 내놓을 대답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체 하면서 눈앞의 이 매혹적인 여인이 해줄 말을 기다려본다.
“…나도 당신도, 이제는 좀 믿을 수 있는 곳에서 쉬었으면 해서요.”
“믿을 수 있는 곳에서 쉬었으면 한다, 라고요.”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래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했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믿고서 깊은 이야기도 좀 하고… 또….”
뭔가를 웅얼거리던 율리아는 천천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여기까지 말하는 건 조금 무리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런 마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확실히 당신 같은 왕을 모시는 게 생각보다 더 재미있을 듯 하네요.”
“놀리지 말고요. 난 지금 진지해요. 생도가 아니라 마왕으로서.”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수가 아니라 마왕의 신하로서.”
두 남녀는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근처에서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를 지나쳐서 헤어졌다.
율리아가 천천히 이쪽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클라우스는 제 방에 다다르기 전 슬쩍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 쪽을 향해서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저 멀리서 누군가의 마력이 움찔, 흔들리다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또 두 번 말하게 하려고 하네. 아직 교육이 덜 된 건가?”
클라우스의 위협에 움찔 몸을 떤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성 생도복을 입고 있었기에 상황을 전혀 모르는 이가 본다면 남성 생도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얼굴에 칠해져있던 것들이 슬쩍 지워지니 바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크, 클라우스님.”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내가 부르지 않는 이상 눈에 띄지 말라고.”
“죄, 죄송해요. 분명,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연신 다리를 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리르였다.
슬쩍 눈을 내려 밑을 살피니 이미 가랑이 부근의 색이 물기로 변해있었다.
“더, 더는 못 참겠어요. 제발, 제발….”
그러고 보니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게 리르는 정기적으로 쑤셔주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도록 완전히 조교가 끝난 상태였다.
죽을 때까지 써먹을 생각이었기에 최면도 계속 유지되고 있고 미약도 가장 강력했던 것을 썼었으니 저리 안달이 난 게 당연했다.
“좋아. 리르. 들어와.”
세실리가 오면 하려고 했던 일들이 있었는데, 예행연습 대상이 찾아온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