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4장 - 옛 인연들
“정말, 상관과 부하 사이가 끝인 게 맞아요?”
“….”
“아무리 봐도 너무 다정해보이는데, 당신.”
율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각종 책들과 서류들이 올라가 있던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슬쩍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면서 은근히 제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는 모습이, 마치 나를 두고서 다른 여자한테 한 눈을 판 것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설마 내가 카엘라를 여인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시작은 상관과 부하였다고 해도 전장에서 계속 봤을 것이며 서로에게 의지해서 그 긴 시간을 보냈죠. 마음이란 게 그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난 낮다고 봅니다, 율리아 생도.”
“충분히 아름다운 여인이잖아요. 뭐, 보니까 남자 마음 홀리기에 좋은 몸이더군요. 역시 수인이라서 그런가, 홀리기 딱 어울릴 정도로.”
평소의 율리아 답지 않게 종족 비하 발언까지 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눈앞의 여인이 화가 났다는 것이고 또 은근히 초조해 하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나타샤라는 요정이 자꾸만 클라우스 옆에서 틈을 노리고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와중에 눈치 없이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은 맨날 대련하자고 클라우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방심한 남자의 마음을 훔치기 쉬운 미녀들이었기에 율리아가 걱정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둘만으로도 충분한데 갑자기 그 수인은 또 뭐냐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그 감정은 조금 전 클라우스가 자신은 완전히 배제한 채 카엘라에게 다가가서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을 때 절정을 찍고 말았다.
마치 자신만을 위해서 애써 만든 목걸이가 애먼 이에게 홀라당 넘어간 느낌.
오직 자신만이 먹을 수 있는 진수성찬을 다른 이에게 모조리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
“그냥 반가워서 그런 겁니다. 머리를 쓰다듬는 건 수인들이 좋아해서 그런 거고.”
“….”
“율리아 생도 말마따나 나는 그녀의 상관이었고 그녀는 내 부관이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이리 만난 건데 서로 반가워서 웃을 수도 있는 걸 그리 몰아붙이면 상당히 난감한데요.”
“….”
도통 굳은 얼굴이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율리아였다.
그녀는 그 후로도 잠시동안 클라우스를 바라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다시 물을게요, 클라우스. 이번에는 교수와 생도 관계가 아니라 마왕과 그 마왕의 조력자 사이로서 묻는 거니까 제대로 대답해줘요. 정말 그 여자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가요?”
“…아직까지는 그렇다고 해두죠.”
“아직까지? 그건 무슨 말이에요.”
“솔직하게 대답하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그냥 상관과 부하 사이이나 남녀 관계가 다 그렇듯 언제 갑자기 불이 붙어서는 활활 타오를지 모른다는 말이죠. 당장 나와 율리아, 당신처럼.”
클라우스의 대답에 율리아는 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잠깐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인지.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이건 결백해. 아직 카엘라는 건들지 않았거든. 아직까지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클라우스가 잔잔한 표정으로 율리아를 바라본다.
그 후로도 얼마동안 그 강렬한 눈빛을 보내던 마왕은 하아, 한숨을 뱉었다.
“…클라우스.”
“네, 율리아.”
“안아줘요.”
“….”
“안아줘요.”
저 말이 단순히 안아달라는 것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해서 클라우스는 괜찮겠느냐는 뜻으로 책상 위에 앉아있는 마왕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정말 카엘라와 아무 관계도 아니니 그리 초조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다만 당신을 나의 여인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걱정할 건 하나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명령이에요.”
명령이라면 따라야지. 암요,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내저은 클라우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여전히 책상 위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절세미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속이 상한 건 사실이니까. 이번에는 최대한 소중하게 다뤄주는 분위기로 가볼까.’
이전의 관계가 상처 입은 여인을 또한 상처 입은 남자가 서로의 몸을 부대끼는 형식으로 위로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마음이 상한 여인에게 사과를 하듯 다가가는 것이 포인트라 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율리아가 신고 있던 구두를 정중한 손길로 한 짝씩 벗겨낸다.
그 후 무릎까지 올라가 있던 길고 흰 양말을 조심스레 붙잡고는 천천히 밑으로 끌어내렸다.
곧 눈이 부시도록 희고 고운 율리아의 종아리가 눈앞에 드러났다.
발목, 발, 발가락 끝까지, 그렇게 두 다리의 모든 무장을 해제한 클라우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
두 손으로 종아리를 받쳐 든 후 마치 최상의 향수를 한가득 느껴보듯 여인의 다리에 코를 박고서는 한껏 숨을 들이 마셔본다.
남자의 이성을 아찔하게 흔드는 율리아의 향이 온몸 구석구석을 돌다가 이내 남자의 물건으로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다.
“으, 으읏….”
사실 율리아도 자신이 괜한 트집을 잡았다는 것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다.
다만 질투가 나서, 자신이 앞에 있음에도 다른 여인을 더 잘 대해줘서.
당신이라는 남자에게 몸까지 내어주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투정을 부린 것이었다.
‘클라우스도 조금은 화가 났을까.’
그래서 애써 토라진 척 하며, 안아달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사과를 한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 것에 부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그런데 이 남자….
“아!”
쪼옥-.
갑작스레 발등에 입술을 맞추는 통에 율리아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리 정중하면서도 소중하게 대해주는 모습에 갑자기 미친 듯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순식간에 피가 사방으로 돌면서 머리고 얼굴이고 온몸이 다 뜨거워졌다.
‘달콤하네.’
더럽다는 생각 따위 전혀 들지 않는다.
이 여인이 똥통에라도 뒹굴지 않는 이상, 세상 그 어떤 남자도 이 여자의 살갗과 온몸 구석구석을 탐하면서 침을 질질 흘리게 될 것이다.
단순히 재능과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최고점을 찍는 세계관 최강의 여인.
그게 바로 율리아 아그네사였다, 물론 지금보다는 더 후의 일이지만.
“저, 저기. 클라우스. 할 말이….”
“미안합니다, 율리아.”
“네?”
“부관 녀석과의 재회가 너무 반가워서 당신이 괜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미안해요. 앞으로는 당신 앞에서 그런 실수 하지 않도록 할 게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넘어가줄래요?”
사과는 자신이 먼저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먼저 치고 나오는 클라우스였다.
이러면 자신만 더욱 나쁜 여인이 되는 것 같아 율리아는 절로 침음이 흘러나왔다.
이 대단한 남자의 주인이라면, 그의 여인이라면 때로는 너그러이 넘어가줘야 하는데.
그를 추종하는 이가 몇 명인데 고작 부관을 의심하는 자신의 꼴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조금은 바보 같고 또 어리석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당신이 사과를 해. 나만 더 바보가 된 느낌이라고.’
분위기에 더 휩쓸리기 전에 얼른 나도 사과하자.
괜한 의심을 해서 미안하다고, 그냥 초조해서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반응이 나왔다고.
율리아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앗!”
갑자기 어깨를 누르는 통에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미처 대비하지 못 했던 터라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였고 덕분에 하려던 말은 그대로 목구멍 너머로 죄다 사라지고 말았다.
투둑, 툭-.
스르륵-.
여인의 몸을 가리고 있던 옷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졌다.
생도복이 먼저 떨어지고, 그 뒤로 셔츠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속옷까지.
마침내 남자 앞에 새하얀 나신으로서 남게 된 율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슬쩍 손을 뻗어서는 가볍게 클라우스의 옷깃을 붙잡았다.
당신이 내 옷을 다 걷어냈으니, 나도 당신의 옷을 다 치워내겠다는 뜻으로.
나 혼자 부끄러운 건 불공평하니 당신도 나와 같은 모습이 되어달라고 말이다.
“율리아.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이번에는 지극히 평범한 셔츠를 입었기에 단추를 뜯어내도 걱정이 없었다.
솔직히 하나씩 풀어내는 것보다 박력 있게 투툭! 하고 뜯어내는 율리아가 더 꼴렸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의 율리아는 한 땀, 한 땀 성실하게 클라우스의 단추를 풀어냈다.
“뭘 묻고 싶은 건데요?”
“혹시, 아까 그거 보고 질투라고 했나요?”
“…뭐라고요?”
“방금 전 표정이 딱 그러했거든요.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만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 남에게 빼앗긴, 뭐 그런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입가에 진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렇게 말하니, 율리아의 볼에 홍조가 짙어졌다.
마치 숨기고 싶었던 뭔가를 들킨 어린 아이가 당황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어린 아이는, 당연하게도 그 당황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화를 내게 된다.
“무슨 소리죠? 내가 질투를 했다고요? 내가 왜요. 전쟁 영웅, 남부의 악마, 그 대단하다는 남자를 내 사람으로 내 남자로 만들었는데 뭘 질투한다는 거예요.”
확 가라앉은 목소리, 그리고 차갑게 변한 눈동자.
율리아는 꽤나 무서운 얼굴을 한 채 그렇게 답했다.
확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이 당장 자신의 위를 점한 남자를 밀어내고 이대로 옷을 챙겨 입어도 무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클라우스, 율리아라는 마왕에 대해서 그녀 본인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창조주인 존재였다.
“질투심이 뭐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드나요? 때로는 단순한 초조함 때문에 일기도 하죠.”
“그건 또 무슨….”
“확신이 없는 거죠. 정말 내가 이 남자의 여인일까. 저 남자가 나의 남자일까.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모래이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가 막 뭐라고 답을 하려는 찰나.
남자는 몸을 숙이고는 여인의 붉은 입술을 부드럽게 탐해주기 시작했다.
따스한 입술이 부딪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남녀의 혀가 얽히면서 꽤나 갈증이 났었다는 듯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서로를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남자와 여자의 후끈한 열기가 한 차례 키스를 통해 서로의 몸속을 돌다가 곧 사라진다.
이후 입술을 떼어내니 기다란 은빛 실이 잠시 늘어지다가 툭, 하고 끊어졌다.
“…약속한 거 잊지 마요. 클라우스. 마왕이 아니라 한 명의 여인으로서 당신에게 내가 가진 모든 걸 주었어요. 나의 몸, 나의 순결. 그리고 나의 미래. 그러니까 당신은 절대 나를 저버리면 안 돼요.”
“이미 약속했잖아요. 그때는 믿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그 믿음이 약해진 겁니까?”
“나라는 여자에 비해서, 당신이란 남자는 너무 대단하니까.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늘 또 한 번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런 강한 여자를, 그리도 충성스럽고 대단한 이를 부하로 부릴 정도라니.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문득 그런… 앙!”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신음을 내지르는 율리아.
클라우스의 두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서 부드럽게 주무르다가 그 후 엄지와 검지로 젖꼭지를 살살 굴려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젖꼭지가 발기해서는 위로 솟아오르자 남자의 괴롭힘이 본격화되었다.
좀 더 힘을 줘서 꼬집기도 하고, 살짝 잡아당기기도 하면서 여인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흐앗! 자, 잠깐만! 앙! 내, 내 말 좀 다 듣고….”
“내가 대륙 전쟁 당시 어떻게 그 많은 승리를 거두었는지, 그리고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줄까요, 율리아?”
그러자 남자에게 가슴을 농락당하는 와중에도 율리아가 두 눈을 크게 뜬다.
전쟁 영웅, 남부의 악마가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준단다.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성장한 한 명의 마족으로서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율리아는 흥분으로 인해 보기 좋게 달아오른 얼굴에 이어서 그 이유를 말해달라는 듯 눈에 반짝반짝 빛까지 머금은 채 클라우스를 올려다 보았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몇 번을 봐도 너무 귀여워서 절로 미소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그건 말입니다.”
한창 여인의 가슴을 농락하던 남자의 손이 점점 밑으로 향했다.
풍만한 가슴을 뒤로 하고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배를 지나 닫혀있던 허벅지를 열고, 그 안에 숨어있던 예쁜 분홍빛 속살을 찾아냈다.
“바보 같은 생각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랍니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 할 시간에 이렇게 잘난 전쟁 영웅을.
마족들이 그리도 두려워하면서도 또한 경외하는 남부의 악마를 철저히 내 남자로 붙잡아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라고, 이 여자야.
그래야 나도 네 옆에서 너를 차근차근 조교하는 맛이 생기지 않겠냐.
클라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활짝 벌어진 어여쁜 꽃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