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4장 - 옛 인연들
“그보다 얼른 돌아가지 그래. 후작이 자리를 비웠으니 난리가 났을 거다.”
“네가 불러놓고 그리 말하니 조금 서운하군.”
“내가 불렀다고 만사 제쳐두고 온 게 더 이상하다.”
아무리 절친한 친우의 부탁이라고 해도 지금 일은 일국의 후작을 오라 가라 한 것이다.
본인의 자존심 문제도 있거니와 다른 귀족들이 이번 일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키엔마이어 후작은 비웃음이 될 것이 뻔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키엔마이어 후작은 클라우스의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에게조차 행선지를 숨긴 채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말이다.
“그 전쟁 영웅 클라우스 사령관님이 부르시는데 대륙 전쟁에서 나름 싸웠다는 이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가 있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대답이었다.
어찌 되었든 클라우스의 말만 잘 따르면 워낙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다보니 이제는 그가 하는 말이 예언 비슷하게 들릴 정도의 키엔마이어 후작이었다.
“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클라우스, 네 부관 말이다. 카엘라 티거라고….”
“이미 만났다. 조금 전 대충 이야기를 나누고 조사단인지 뭔지 하는 치들을 마저 정리하려고 여기로 온 거였지.”
“…내가 알기론 네게 그렇게도 충성스러운 부관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었나?”
“맞지.”
“그런데 왜 얼마 전에 들어서 귀족들과의 만남이 잦아지는 건지 모르겠다.”
“….”
클라우스가 일부러 키엔마이어 후작을 말없이 노려본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진짜냐는 듯, 혹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니냐는 듯이.
그 시퍼런 시선에 키엔마이어 후작은 다급히 손을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정말로 얼마 전부터 그런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어. 대륙 전쟁 최고의 영웅이었던 네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던 수인이 귀화를 추진한 이후 묘하게 귀족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 말을 왜 내게 전해주는 거지?”
“왜 전해주냐니. 당연한 거 아닌가? 네가 걱정되어서 그렇지. 너 스스로는 떳떳하다고 할지 몰라도 저들이 그 카엘라라는 호랑이 수인의 말을 증언 삼아 네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행했다 떠든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질 수도 있다.”
키엔마이어 후작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무런 의미도 없고 증거도 없는 말 몇 마디가 누구에게는 상대방의 심장을 찌르는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당장 평범한 이들조차 자신에게 날아오는 그 말의 창칼과 혀의 화살을 버티지 못 하는 마당에 조그마한 균열에도 쉽게 흔들리는 자들에게 그 소문들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함이 없다 할 수 있다.
“군부에서도 밀려난 너를 여전히 귀족들이 경계하는 건 네가 이룬 모든 업적과 그에 대한 절대적인 명성, 그리고 지지 때문이다. 그걸 갉아먹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흔들 수 있다면 귀족들은 무슨 짓이든 할 거다. 내가 장담한다.”
“…그렇게 말하는 다넬 키엔마이어 후작, 너도 귀족인데.”
“무슨 소리지? 그게 무슨 의미인가?”
“왜 귀족들 편을 안 들고 평민인 내 걱정을 하느냐, 이 소리다.”
그러자 키엔마이어 후작은 잠시 두 눈을 껌뻑이다가 하, 하고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고작 그런 질문을 하기 위해서 자신을 놀라게 했느냐는 반응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대는 나의 벗이다. 그것도 가장 소중한 벗. 클라우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저 귀족 이름조차 아까운 자들과 비슷하게 살고 있었을 거다. 그래, 벗이자 동시에 은인이라고 할 수 있겠군.”
역시 의리! 으으으리이이이!!를 외칠 만한 남자였다.
자신에게 뭔가를 베푼 은인이니, 그리고 뜻을 함께 했던 벗이니 왜 배신하겠냐는 것.
좋게 보면 참 좋은 놈이고, 나쁘게 보면 언제든 호구 잡힐 수도 있는 남자다웠다.
“그렇게 솔직히 말해주니 나도 그에 대한 답으로 하나 말해주지.”
“오, 그게 뭔가?”
“카엘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흐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어찌 되었든 그 여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를 배신할 여인이 절대 아니니까.”
“뭐…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클라우스에 대한 신용이라면 이미 차고 넘치는 키엔마이어 후작이었다.
네 말대로 더는 걱정하지 않겠다고 대답한 그는 왔을 때처럼 바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괜히 늦장을 부리다가 귀족 놈들이 또 허튼 소리를 할 시간을 주게 된다면 기껏 여기까지 와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행한 부분이 소용없는 짓이 될 수도 있음이었다.
“언제 한 번 만나서 커피나 한 잔 하지.”
“방학이 되면 그 때. 그 때라면 시간이 빌 거다.”
“넌 방학을 맞이해서 시간이 널널한 교수가 될지 몰라도 난 아니니까.”
그 말에 클라우스는 그건 그렇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카데미가 방학을 맞이하면 바쁜 건 항상 본국에 있는 권력층들이었다.
자신들의 후계자나 자식들, 또는 지인들이 돌아와서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얻은 정보를 풀고 마주쳤던 이들에 대해 평가를 내리면서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논의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카엘라에게도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라고 일러두어야겠군.’
강의실에 두고 나오긴 했지만 지금쯤이면 그 둘은 거기에 없다.
아마 이 시간대면 율리아와 카엘라는 교수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일 것이다.
율리아는 카엘라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카엘라는 클라우스의 방을 한 번 확인해보고 싶어 했다.
그 두 생각이 만나 ‘일단 이야기는 교수실에 가서 나누자.’ 가 된 것이었다.
‘벌써부터 율리아 성격 조금씩 튀어나오는군.’
원래는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에 있는 클라우스의 개인적인 공간이었던 곳.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율리아가 틈만 나면 남들의 눈을 피해서 들어오는 곳이 되었다.
당신이 내 남자, 내 것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
더해서 클라우스의 부관이라는 카엘라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욕망도 같이 작용한 것이었다.
내가 더 위에 있다는, 클라우스라는 남자와 더 가깝다는 그런 우월감을 보이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교수실 앞에 다다른 클라우스가 슬쩍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율리아와 카엘라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말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령관님.”
“클라우스 교수님.”
클라우스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카엘라였다.
그에 반해 율리아는 일부러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카엘라의 상관인 클라우스가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기로 했고 그 사실을 이제 카엘라도 알고 있으니 이 날 선 호랑이 여인에게 확실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네 주인은 내 사람이라고, 내 남자라고. 그러니까 너도 처신 잘 하라고 말이다.
해서 자신이 클라우스보다 더 위라는 걸 애써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난 내가 매달려야 하는 여자보다는 나한테 매달리는 여자가 더 좋거든.’
클라우스는 율리아는 본 체 만 체 바로 카엘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바로 율리아의 질투심에 슬쩍 불을 붙여주기로 했다.
“사, 사령관님?”
평소에는 잘 해주지 않는 머리 쓰다듬기.
카엘라는 애써 아닌 척 하지만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바로 해준 것이었다.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그래서 내려주는 상이다, 카엘라.”
“아, 그렇습니까?”
“어때. 수인들은 이런 거 좋아하다고 하던데. 혹시 호랑이는 다른가?”
“으음…. 적당한 포상 같네요.”
적당한 포상은 무슨, 지금도 좋아 죽으려고 하면서.
속으로 킥킥 웃음을 내뱉으면서 클라우스는 나름 정성을 다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인들의 머리칼은 요정들보다도 더 부드럽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아마 짐승의 보드라운 털을 머리칼이 대신한다는 설정이 붙은 게 그 이유인 모양이다.
덕분에 클라우스는 마치 구름을 녹여 만든 부드러움을 음미할 수 있었다.
그르릉, 그르릉-.
호랑이 여인이 기분이 좋다는 듯 눈을 감은 채 또 다시 골골송을 부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정말 영락없는 개냥이다.
옆에 서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율리아를 한 번 확인해볼까,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클라우스는 애써 그걸 참아냈다.
눈치가 꽤 빠른 마왕님이니 혹 눈길을 돌리다가 몇 회차 전의 상황마냥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이쪽의 본심을 깨닫고서는 꽤나 건방지게 나올 확률이 있었다.
저 여왕님이 자존심이고 뭐고 다 접고 대신 질투심 폭발로 나아가려면 지금 순간에서는 아주 철저하게 무시해야만 했다.
“카엘라.”
“그르릉, 그르릉….”
“카엘라 티거.”
“아, 아아! 네. 사령관님. 부르셨습니까?”
“왕국으로 돌아가면 즉시 이런 소문을 퍼트려. 당연히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된 줄 알았던 귀족들이 평민들이 이번 일을 사주했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나아갔더라고. 다행히도 그 뒤를 따라 온 키엔마이어 후작이 그 사태를 막았다고 말이야.”
“키엔마이어 후작이라 하시면… 사령관님의 친우 분이시군요.”
“그래. 그가 왜 아카데미에 왔는지는 본인이 대충 이유를 만들어서 소문에 한 다리 얹을 거다. 그러니까 너는 딱 적당한 선에서 적당한 정보만 흘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카엘라의 대답이 돌아오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제 상관의 손길이 떨어지자 호랑이 여인의 얼굴에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임무를 끝냈으니 자신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꽤 오랜만에 클라우스의 얼굴을, 자신의 대장을 본 것인데 몇 시간 만에 다시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 속이 타들어가는 거야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아직은 카엘라가 왕국에서 해줄 일이 좀 남아있다.
더구나 방학 전까지는 그녀가 자신 곁에 붙어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카엘라는 귀족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편이 훨씬 좋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되면, 그 때 너를 부를 거다.”
“정말이십니까?”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냐?”
“절대,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부관 카엘라 티거, 사령관님의 명령에 따라 당신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아마 지금쯤이면 그 귀족 놈들이 아카데미를 빠져나갈 채비를 거의 갖추었을 거다. 너도 늦지 않게 그들이랑 합류해. 그 후 나를 붙잡고 있지 못 했던 거에 대해서는 네가 대충 이유를 만들어서 설명토록 하고.”
“문제없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사령관님께서는 다만 저를 꼭 당신 곁으로 불러주시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알겠다니까 그러네. 클라우스가 그렇게 장난 식으로 쏘아 붙이니 또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죄송하다고 급히 사죄까지 하는 카엘라였다.
언젠가 한 번 저 딱딱하기만 한 모습도 한 번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면서 클라우스는 카엘라를 배웅했다.
물론 배웅이라고 해봤자 교수실을 나서는 걸 방문까지만 같이 가주는 게 전부였으나 카엘라의 입장에서는 그보다도 더 기분 좋은 일도 없었다.
“그러면 다시 뵙게 되는 날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자존심 강하다는 호랑이 수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공손한 어조로 말하는 카엘라.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재빠르게 교수실을 나서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튼 호랑이라서 그런지 몸놀림 하나는 정말 빠르다니까.’
장담하는데 조금만 어두워져도 저 여자의 접근을 알아차리는 이는 드물 것이다.
마력도 곧잘 다루는데 잠행이나 암습도 가능하니 부관으로는 정말 최고의 여인.
여전히 저 과한 충성심이 마음에 조금 걸리기는 했으나 그 정도야 웃으면서 봐줄 수 있으니 되었고….
‘자, 이제 진짜 문제가 남았군.’
속으로 후우, 심호흡을 한 클라우스는 몸을 돌렸다.
아까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으나 클라우스의 관심을 단 1도 받지 못 해서 뭔가 상당히 화가 난 여인의 모습을 한 채로, 율리아가 그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
일단 한 번 더 무시하고, 이대로 가서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내일 있을 강의에 대한 자료들을 슬쩍 살피다가 지나가는 말투로 한 번 입을 연다.
“율리아 생도도 슬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잠시 후면 저녁 시간인데요.”
“…솔직히 말해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지. 제대로 말을 하세요.”
“솔직히 말해보라고요.”
“그러니까 무엇을 솔직히 말하는 건지 그걸 제대로 말해야 할 거 아닙니까.”
“방금 전 나간 그 호랑이 수인. 당신의 부관이었다는 여자, 카엘라 티거.”
스윽-.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클라우스의 곁으로 다가오는 율리아.
그리고는 뭔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 매혹적인 눈매를 살짝 찌푸리고는 붉은 입술을 열어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상관과 부하 사이가 끝인 게 맞아요?”
“….”
“아무리 봐도 너무 다정해보이는데,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