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장 - 옛 인연들
대륙 아카데미는 책만 펼쳐놓고 암기 과목만 배우는 곳이 결코 아니다.
당장 클라우스가 맡고 있는 전투 마법 강의처럼 오히려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여기저기 다치면서 알아가는 것들이 훨씬 많은 곳이다.
때문에 대륙 전쟁 이후 치료 기술들과 마법들이 급성장하였고 그것들의 모든 것이 결합된 최신식 병실이 아카데미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귀족 생도들을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기사들은 우리들을 따라오고 카엘라, 당신은….”
멍청한 귀족 놈들이 대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표시를 하고 지랄한다.
딱 보아하니 클라우스가 따라다니면서 훼방을 놓는다거나 다른 짓 못 하게 네가 알고 있는 약점으로 그를 한 곳에 붙들고서 이쪽이 건수를 잡는 동안 조용히 있게 하라는 뜻이었다.
“다녀오시죠.”
여전히 연기 중인 카엘라의 대답에 귀족들은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사라졌다.
아마 클라우스가 꼼짝도 못 하도록 그녀가 잘 붙잡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클라우스 교수.”
루스칼 총장이 미안하다는 뜻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뱉는다.
적극적으로 귀족 회의의 조사대 파견에 대해서 거부하지 못 한 것에 대한 사과인 듯 했다.
사실 저들을 막을 마땅한 이유도 없는 것이 인간 귀족 생도들이 공격당한 사건이다.
대륙 아카데미가 중립 지대라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사실 그 상황이 매우 복잡했다.
그나마 귀족 측이 괜히 공론화되기 전에 빨리 묻어서 얌전해지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해서 생도들의 신경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리고서 그 직후 들이닥쳤다.
‘다른 종족들에게 싫은 소리 듣기는 싫고, 이걸 이용하고는 싶었겠지.’
루스칼 총장은 입술을 깨물면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저들은 아카데미를 공격하기 위한 건수를 잡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본국의 평민들을 옭아맬 올가미가 필요할 뿐이다.
자국에서는 귀족을 해할 수 없으니 중립 지대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에서 일을 저질렀다.
어떤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사주해서 이번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손해를 본 건 귀족이고 속이 시원해지는 건 평민이니 가장 높은 확률로 범인은 평민이다!
그렇게 억지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이었다.
“클라우스 교수. 혹 시간이 된다면 저들을 따라가서 뭐라고 말을 듣고 가는지 좀 확인을….”
라는 부탁을 하려던 루스칼 총장은 카엘라의 싸늘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클라우스 역시 귀족들에 의해 손발이 다 묶여있는 중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클라우스 교수. 나가시죠. 할 이야기가 조금 있습니다. 딱히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아카데미 총장님의 부탁을 들어주시는 것도 좋겠지만 그리 하면 많이 피곤할 것입니다.”
피곤하다, 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카엘라의 그 말에 루스칼은 급히 고개를 젓고 손을 휘휘 흔들었다.
괜한 짓을 시켜서 클라우스까지 곤란한 상황에 빠트린다면 인간 측 상황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악화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아카데미를 찾아온 저들이 단순히 본국의 평민만 노리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아카데미 안에 있는 평민 생도들에게 압박도 넣고, 무엇보다 이제는 군부에서도 밀려나 공식적으로는 1명의 평민인 클라우스조차 찍어 누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아카데미도 흔들린다.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이게 마지막 희망이야. 이 대륙 아카데미마저 흐지부지되고 화합의 장이 될 수 있는 곳이 정치 싸움의 연장선이 된다면 2차 대륙 전쟁이 발발할 거다. 지금도 이미 곳곳에서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는 마당에!’
전쟁은 단순히 인명을 살상하고 도시와 성을 망가트린 것만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작물은 죄다 망가졌고 식량 가격은 폭등했으며 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중앙 집권은 약해지고 지방의 귀족들 세력이 강성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헐벗고 굶주린 자들의 분노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동부, 서부 할 것 없이 서로를 헐뜯고 비난했으며 정전 협정을 맺은 것이 무색하게 벌써부터 심상치가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루스칼 총장은 이 아카데미가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이들은 아직 젊은 세대들, 동시에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물살이다.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닌,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여 새로운 이들을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평화로 나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 아닐까 생각했다.
‘…안쓰럽군. 괜찮은 사람인데.’
루스칼 총장을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혀를 찼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다 알고 있는 자신이다.
때문에 그 생각이, 그 꿈이 결코 이뤄질 수 없음을 또한 알고 있다.
원래 소설에서는 율리아가 윤간 당하는 것으로 비극이 시작되었고, 클라우스가 개입하여 그 일을 완전히 무로 되돌린 지금도 아카데미는 길어봤자 4년도 가지 못 할 운명이었다.
“총장님. 그러면 저도 일단 나가보겠습니다.”
“그리 하시게. 귀족 회의 측 조사단이 볼일을 다 보고 돌아오면 그 때 알려주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인 클라우스는 총장실을 나섰다.
그 뒤로 얌전히 따라붙은 카엘라는 다시금 귀를 쫑긋거리고 코를 킁킁거리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싸늘하던 표정을 지워버리고는 그 위에 무척이나 분노한 듯 씩씩대는 모습을 보였다.
“언젠가, 언젠가 반드시 죽일 겁니다.”
“카엘라.”
“아까 그 두 놈은 특히 그렇습니다. 목을 뜯어낼 겁니다. 사지를 잘라버릴 겁니다. 감히 클라우스 사령관님을, 나의 대장, 나의 리더를 그딴 식으로 모욕하다니. 죽여버릴 겁니다. 내장을 모조리 파헤쳐서는 산 채로 제 배가 갈라지는 꼴을….”
“얌마. 그만하라고.”
누가 수인 아니랄까봐 가끔 엄청나게 흥분해서는 흉포해지는 카엘라였다.
고양이 수인도 한 번 눈깔이 돌아가면 그야말로 맹수가 되는 수준으로 날뛰는데 태생부터가 호랑이인 카엘라가 분노에 이성을 놓고 날뛴다고 생각을 해보라.
그 순간 아카데미는 배움의 장이 아니라 그 잘난 귀족 잡아먹겠다 사냥을 즐기는 맹수의 놀이터가 될 것이 뻔했다.
가볍게 카엘라의 이마에 딱밤을 갈긴 클라우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회차를 반복하다보니 카엘라의 장점이 빛날 때도 있고 반대로 단점이 부각될 때도 있다.
본인이 잘만 컨트롤을 해준다면 정말 좋은데, 이게 클라우스가 일부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비운의 전쟁 영웅 코스프레를 하다 보니 거기에 못 참고 폭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잘 나가면 율리아에게 스며들어서 그녀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게 더 힘들어지니 그 사이에서 타협안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카엘라라는 여인은 버리기 무척 아까운 이 중 하나였으니까 말이다.
“너랑 같이 온 놈들은 아마 한 시간에 두 시간 정도 걸릴 거다.”
“그렇게나 오래 걸립니까?”
“아마 말 맞추고, 서로 머저리 같은 이야기 좀 하고, 남 욕도 하느라 시간 보내겠지. 너도 알겠지만 귀족들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에는 고상한 분위기로 앉아서 아무런 쓸모도 의미도 없는 이야기 하기가 있잖냐.”
“…더더욱 죽이고 싶어집니다.”
또 다시 끓어오르는 살기를 억누르느라 바들바들 몸을 떠는 카엘라.
그런 호랑이 여인에게 클라우스는 조금만 더 참으라고,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다고 힘이 되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어차피 카엘라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많고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의 부관, 그리고 자신의 여자를 그 발정 난 돼지 새끼들 같은 귀족놈들 사이에 던져두는 것이 상당히 불쾌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호랑이가 돼지들한테 당할 리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좆 같잖아.’
앞으로 조금만 더 그들의 동태를 살피게 하고 카엘라를 불러들일 것이다.
똥통에서 구르기에는 너무 미안한 상대였다.
지금도 자신 옆이라면 지옥이든 마족들이 머무는 동부든 가리지 않고 뛰어들 기세였다.
“저, 그런데 사령관님.”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생각이냐. 사령관직에서 밀려났고 다시는 돌아갈 수도 없는데.”
“…하지만 딱히 다른 호칭으로 불러볼 생각은 못 해봤습니다. 게다가 더는 사령관님이 아니시면 지휘관과 부관 사이였던 관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고요.”
“그냥 이름에 ‘님’ 자 붙이면 되잖아. 해봐.”
“…클라우스님.”
“그래. 잘 하네.”
“전 싫습니다.”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그리 말하는 카엘라.
그리고는 군례를 몇 번 해보더니 역시 이게 제일 낫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사령관님께서 사령관 자리에 더는 계시지 않는다고 해도 사령관님은 사령관님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계속 클라우스 사령관님이라고 부를 겁니다.”
“그거 남들이 들으면 오해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곤란해지면 어쩌려고?”
“다른 자들이 들을 때에는 주의하겠습니다.”
“불안한데.”
“불안하지 않도록 철저히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카엘라의 단호한 어조에 작은 한숨을 내뱉은 클라우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어차피 어떤 방법으로도 이 여자를 설득할 수는 없으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편했다.
거기에 계속해서 사령관님, 이라는 호칭을 듣다 보니 이제 카엘라가 다른 호칭을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보다 조금 전에 보니까 뭐 물어보려던 것 같은데. 뭐였지?”
“아…. 실은 아까 전에 말입니다.”
“율리아 아그네사. 동부 마왕에 대해서 묻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그래. 왜 그 여자에 대한 질문이 안 나오나 했다.”
발걸음을 멈춘 클라우스는 잠시 창가에 기대어 서서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엘라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곳 대륙 아카데미가 원래 이런 곳임은 알고 있습니다. 전쟁의 참화는 잊어두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함께 걷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곳. 그래서 수인들도 많은 유력한 가문의 이들을 이곳으로 보냈고 말입니다.”
“….”
“마족들이 사령관님을 싫어하면서도 존경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또한 경외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장 마족들이 사령관님께 관심을 보이는 거야 전쟁 중에도 여러 번 봤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그 여자, 마왕은 다릅니다. 어찌 되었든 동부 마족들의 군주입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실권도 없는 왕, 그냥 부모 잘 만나서 왕이 된 여자라고 하지만 그 이름이, 그 자리가 주는 영향력은 실로 거대하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카엘라.”
“너무 가까워지시면 좋을 게 없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 말에 클라우스가 몸을 살짝 돌려서는 카엘라를 쳐다본다.
어째서 그런 말을, 무슨 이유로서 하느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클라우스의 그 표정에 카엘라는 일단 죄송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인간 귀족들은 어떻게든 사령관님의 명성에 흠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저에 대해서 별다른 조사도 하지 않고 그냥 불만 좀 있어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믿는 것마저 그들이 꽤나 초조하다는 증거겠죠.”
“그럴 거다. 전쟁 영웅이 죽지 않고 살아버렸고, 그 살아남은 영웅이 평민이니까. 구심점이 될까봐 지금도 초조해 죽을 테지.”
“바로 그렇습니다. 헌데 그 구심점이, 전쟁 영웅이 마족과 거리가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면. 아니, 그들의 군주라는 마왕과 무척이나 친밀한 사이로 보인다면 과연 어떤 말이 나돌지 지금부터 생각만 해도 속이 턱 막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잠시 탄식을 내뱉은 클라우스는 카엘라에게 손짓을 했다.
그에 공손한 자세로 호랑이 여인이 제 사령관 앞으로 다가왔다.
“더 가까이. 귀 바짝 붙여봐라, 카엘라.”
클라우스의 명령에 카엘라는 얌전히 머리를 살짝 숙이고는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녀에게 뭔가를 속삭여주었고 잠시 후.
“…예?”
“뭐가 ‘예?’ 냐. ‘예?’ 가 맞아?”
“아, 아니…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방금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그만…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클라우스 사령관님?”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 내가 뭘 잘못 들었겠지 싶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꽤나 우스웠기에 클라우스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다시금 말해주었다.
“율리아 아그네사. 동부의 마왕. 그녀와 함께 해볼까 하는데.”
“….”
이제는 말도 하지 못 한 채, 카엘라는 다만 두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여기서 다시 설명을 해봤자 똑같은 상황만 반복일 테니 클라우스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마침 조금 있다가 강의 시간이다. 네 녀석은 나와 붙어있어야 할 터이니 강의 참관해. 겸사겸사 앞으로 함께 할 마왕과도 좀 친해지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