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장 - 옛 인연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아직도 귀족들이 계속 건드리나?”
“아까도 보셨다시피 그렇습니다. 덜떨어진 짐승년, 이라는 말을 가끔 가다가 계속 하더군요.”
“아무튼 귀족 새끼들. 한 것도 없이 주둥이만 놀리지.”
“혹 사령관님께도 무례를 저질렀습니까? 그 치들을 당장 쳐 죽일까요?”
“됐다. 이제 와서 무슨. 그보다 군부 생활은 어때. 할 만 한가?”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제가 비록 수인이긴 하나 사령관님의 부관이었던 만큼 군부의 여러 인간들도 제게 나름 잘 대해줍니다.”
현재 인간 측 군부에서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한다면 대부분 클라우스와 접점이 있다.
능력도 없이 귀족 혈통으로 올라온 놈들은 클라우스와 엮일 일이 전혀 없다.
카엘라를 그런 군부에 꽂아놓은 것도 클라우스였고, 그녀를 통해서 인간 측 소식을 계속 접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슬슬 군부 인사들이 교체되고 친 귀족파 놈들이 급증하면서 너를 보는 눈도 곱지가 않겠지.”
“…죄송합니다. 사령관님께서 마련해주신 자리인데.”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놈들이 작정하고 널 찍어 누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내가 마련한 자리 아니다. 네가 공을 세우고 직접 쟁취한 자리야. 나에 대한 신뢰는 정말 고맙지만 너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는 마라. 보는 내가 다 불쾌할 정도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주의하겠습니다.”
살짝 장난기를 섞은 말이었음에도 굳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카엘라였다.
항상 이런 식이지, 이 여자는.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클라우스는 총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얌전히 따르던 카엘라는 걸음을 일부러 늦추고는 슬쩍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하나만 여쭙고 싶습니다.”
“듣고 있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귀족 생도들의 사건에 대해서 혹 더 아시는 건 없으십니까?”
“없다. 나도 아침에 일어나보니 생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걸 본 게 다였지.”
“…허면 외부에서의 침입자가 그러했다는 건 아니군요.”
“갑자기 무슨 증거로?”
“외부에서 침입자가 들어와 습격을 했다면 사령관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음.”
“때로는 수인인 저보다도 날카로우신 감각을 자랑하시던 사령관님이니까요.”
그거야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들을 마치 예상했던 것처럼 말해서 그런 거고.
총장실에 다다르기 직전, 클라우스는 확인 차 다시 카엘라에게 물었다.
“귀족 회의에서 직접 요청한 사항이라고 했지? 그것도 너를 콕 짚어서.”
“그렇습니다. 아주 정확히 짚었더군요. 제게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조사를 직접 봐 달라고요.”
“그리고 넌 내 명령대로 한동안 내게 반감을 가진 옛 부하 연기를 했었고.”
“많이 힘들었습니다만, 사령관님의 명령인 만큼 훌륭히 해내었습니다.”
귀족 회의에서 평민을 완전히 까 내리기 위한 목적을 가진 상황에서 아카데미 안의 평민 교수인 자신을 견제하겠다는 목적을 품었는데 막상 보낸 이가 옛 부관인 이유.
바로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옛 상관에게 반감을 품은 부관이라는 모습을 귀족들에게 은근히 보이라고 카엘라에게 명령해둔 것이었다.
카엘라가 전쟁 영웅 클라우스의 부관이었으니 자신들은 알지 못 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해서 카엘라를 어떻게든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여서 이용하려고 했고 말이다.
‘그렇게 믿게 만들어 줘야지. 이 여자면 나를 견제할 수 있다, 뭐 그런 착각이 들도록.’
솔직히 말해서 카엘라의 연기력은 결코 출중하다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귀족들이 그녀 앞에서 클라우스 욕을 할 때면 으르렁거리기 바빴다고 한다.
헌데 행운인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귀족놈들은 그런 카엘라의 모습에 그녀가 클라우스에게 뭔가 강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카엘라는 의도지 않게 귀족들과 나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카엘라를 이용해서 클라우스는 그들의 정보와 소식을 역으로 야금야금 빼냈다.
회차를 지겹도록 반복하고 있는 클라우스였지만 간혹 조금씩 뭔가가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그 부분을 미리 대비하려면 방심하지 않고 정보 수집을 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어차피 마족 측과 선이 닿으려면 율리아와 더 깊은 관계가 되어야 하니 마족 측 정보는 뒤로 물리고. 지금은 병신들 천지인 인간 쪽 내부 상황부터 확실히 알아두는 게 먼저다.’
같은 이유로 나타샤의 벨라루스 가문과도 접점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고 비록 수인 사회에서 완전히 쫓겨났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느 정도 정보 수집이 가능한 수인 카엘라를 부관으로 둔 것이다.
그냥 속살 맛만 좋아서 이 여자 저 여자 찔러주는 게 아니다.
이 여자는 여기에 이용할 수 있고, 저 여자는 다른 곳에 써먹을 곳이 있어서 옆에 둔 거다.
리르도 맨 처음에는 바로 죽여 없앴는데 한 번 살려둬서 먹다보니 나름 쓸 만 한 곳이 생겨서 이번 회차에서도 유용하게 써먹고자 바로 조교를 해둔 것이었다.
“이번 귀족 회의를 소집한 놈이 누구였지?”
“겉으로는 홈부르크 자작이 소집을 요청했다고 하나 사령관님도 아시다시피 귀족 회의가 보통 자리도 아니고 분명 뒷배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홈부르크 자작 놈이라면 주둥이는 잘 놀려도 그것 외에는 딱히 대단한 게 없는 놈이니까 말이다. 뒷배가 없으면, 그래서 미리 말을 맞춰둔 게 아니라면 사건 터지고 나서 얼마 되지도 않아 귀족들을 소집하고 거기에서 바로 결론이 나오지도 않았겠지.”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는….”
“요제프 대공. 그놈밖에 없다. 국왕의 충실한 개 노릇을 하면서 물어뜯을 놈 생기면 망설이지 않고 물어뜯는 진정한 개자식이니까. 그런 개새끼가 대공이라니 왕국 상황 참 알만 하군.”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그럼에도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귀족들 중 거의 97퍼센트는 개새끼라고 할 수 있고 그 중에서도 반 정도는 개새끼인 동시에 재활용조차 불가능한 쓰레기 중의 쓰레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요제프 대공은 쓸데없이 잔머리 좀 돌아가면서 그 잔머리를 철저하게 제 이득에만 쓰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심지어 왕국과 제국을 오고 가면서 일종의 연합체를 만들자고 오래전부터 주장했는데 그것도 그렇게 함으로서 귀족들의 권위를 더더욱 높이 세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실 말이 제국이고 왕국이지 실권은 죄다 귀족들한테 가있다.
대륙 전쟁의 여파로 왕이고 황제고 완전히 쪼그라들어서는 귀족 회의의 결과만 기다려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치달아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사건을 빌미로 내부의 평민들을 완전히 눌러두려는 것 같습니다.”
“간단한 말장난이지. 이번에 당한 놈들이 지방의 유력한 가문 자제들이고 그놈들이 제 지방에서 얼마나 패악을 저질렀는지는 이미 다 알려져 있으니까. 그런 놈들에게 원한을 품고 누군가가 사주를 했다. 그걸 누가 사주했겠느냐! 당연히 귀족들에게 앙심을 품은 평민들이 아니겠는가! 감히 중립령에서 귀족을 공격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귀족들을 연합하려는 작정일 거다.”
“가능하겠습니까? 아무리 평민들이 계속 귀족들에게 눌려있던 입장이라고 해도 얼마 전까지 민란도 벌어졌었고 귀족들이 전쟁 도중에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도망만 다녔다는 것을 왕국의 개 한 마리조차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떨어진 저들 권위를 이번 기회에 다시 세우겠다는 소리다. 잘 생각해봐라, 카엘라. 현 상황에서 가장 많은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클라우스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카엘라는 침음을 내뱉고는 대답했다.
귀족들, 우습게도 전쟁에서 도망만 치던 그들이 이제는 가장 많은 무력을 보유했다고.
“그래. 남부군조차 내가 잠깐 자리에서 물러났던 사이 전력의 반 이상이 증발했었지. 그만큼 징집병들의 피해가 너무 컸어. 반대로 귀족들의 기사들과 사병들은 꽤나 온전한 상태지. 평민들 중에 아무리 고참병들이 있어도 전쟁이 끝난 지 시간이 흐른지라 기본적인 무장 상태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
“그리고 귀족 놈들이 그리 미련만 한 것도 아니야. 평민들 잡아먹을 때는 아주 영리하지. 딱 덜덜 떨면서 있는 거 다 토해낼 정도로 몰아붙이고 그들이 단합하려 할 때 불씨를 던져서 스스로 타오르게 만든다. 그로 인해 원래는 귀족들을 향해 타올라야 했던 거친 불길을 미리 일으켰다가 필요한 순간에 완전히 잠재워버리는 거지.”
왜 설정을 그딴 식으로 잡아둔 것일까, 이 등신 머저리야.
스스로를 타박하면서 괜히 답답해진 클라우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귀족들이 답도 없는 병신 새끼들이 아니라 그래도 갱생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는 나름 쓸 만 한 자들이라고 설정을 잡았을 텐데 말이다.
“루스칼 총장님. 클라우스 교수입니다.”
“들어오게.”
총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클라우스는 카엘라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그 전에 카엘라와 입을 맞춰서 다시금 연기 모드로 돌아갔고 말이다.
총장실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이동했던 귀족들과 기사들이 서있었다.
원래 이 아카데미의 총장인 루스칼 역시 귀족이니 저들과는 같은 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총장은 귀족임에도 그 특권에 취해서 평민들을 수탈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정말 몇 안 되는 참 귀족 중 하나였다.
‘덕분에 다른 귀족들한테 미운 털 단단히 박힌 상태지. 배신자라느니 덜떨어진 몽상가라느니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클라우스는 슬쩍 총장 앞에 서있던 귀족 나부랭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루스칼 총장에게 몇 마디 나불거렸는지 서로 낄낄대고 웃는 모습이 상당히 꼴사나웠다.
“클라우스 교수는 갑자기 무슨 일이지?”
“우연히 옛 부관과 마주쳐서 말입니다.”
“이제는 부관이 아니죠, 클라우스 교수. 말했지만 주의해주기 바랍니다.”
진심 하나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톤의 카엘라.
카엘라가 원래부터 저런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연기하고 있다는 걸 단박에 들켰을 것이다.
매사에 항상 무표정, 그게 아니면 으르렁이 전부인 호랑이 수인.
그래서 귀족들은 더더욱 그녀를 덜떨어진 짐승년이라고 깔보았다.
“듣자하니 이미 조사가 다 끝난 일에 대해서 다시 파겠다고 하던데요.”
“인간 측 귀족들이 전부 뜻을 모아서 서한을 전달했네. 증언이 일치하고 그것이 유일한 증거라고는 하나 이해할 수 없다고.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중요 부위를 이빨로 끊어내는 동안 한 놈도 말리거나 할 생각을 하지 않았냐고 말이야.”
“귀족들이 약에 취하는 거야 뭐 하루 이틀도 아니지 않습니까.”
“닥치시오! 어디 날조를 하고 있는 건가!”
“무엄하다!! 평민 주제에 귀족 면전에서 우리들을 욕보이는 것이냐!”
대륙 전쟁 때만 해도, 아니 불과 1년 전만 해도 클라우스 앞에서 눈도 못 뜨던 잡것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귀족 놈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윽박을 지르고 있다.
전쟁 끝나고 몇 년 지났다고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쓰레기들이 오히려 기가 더 살아서는 죽자 살자 고생한 자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이제 권력 잡았고 나는 역으로 거기에서 밀려난 떨거지다 이거지.’
갑자기 확 열불이 치솟는 게 그냥 이 자리에서 싹 다 죽여 버릴까 고민도 된다.
대륙 전쟁 당시 처참하게 패배했든 뭐든 일단 싸워봤던 놈들이 저렇게 굴면 조금이나마 참으면서 넘어가겠는데 아무 것도 안 하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귀족 놀음 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심사가 다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분명 회차를 반복하면서 참 많이도 본 장면인데, 많이도 겪은 대접인데 여전히 열 받는다.
클라우스가 이 정도인데 그걸 뒤에서 전부 지켜보고 있을 카엘라의 분노는 아마 활화산이 터지는 것보다도 더욱 대단할 것이었다.
스르릉-.
귀족들은 침까지 튀기면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강함을 어필하는 중이다.
해서 그들은 거의 칼을 뽑는 것 마냥 섬뜩한 소리를 내며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카엘라의 손톱을 미처 확인할 수 없었다.
이대로 저들이 조금만 더 입을 놀린다면 그대로 입이 찢어져 죽거나 아니면 목에 긴 혈선을 그리고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죽을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느 회차에서 분명 저놈들이 그렇게 죽었으니까.
탁.
카엘라의 손등을 가볍게 내려치는 클라우스.
마치 말썽을 피우는 고양이를 붙잡고는 그러면 안 된다는 듯 훈계를 하는 것 같다.
그런 남자의 손짓에 호랑이 여인은 바로 손톱을 거두고는 여전히 그 싸늘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만, 그만들 하시오! 아카데미 안에서는 그 어떤 이도 제 자리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거늘! 닥치란 말이오!”
어차피 저 귀족들을 향해 화를 낼 인물은 카엘라 말고 또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는 잉크병까지 쥔 채로 두 눈을 부라리는 루스칼 총장.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서 얼어붙은 귀족들이 입을 다물자 그는 불편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로 거칠게 자리에 앉았다.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한 건 어디까지나 그 생도들이 불쌍해서이지 귀족들 눈치 보려고 한 게 아니오. 한 번만 더 아카데미 안에서 귀족임을 떠들었다가는 요정과 수인, 그리고 마족 측에 인간들의 도발 행위를 알릴 것이오. 알아들었소?”
“….”
명분을 얻으려고 온 곳에서 괜히 명분을 잃기는 싫겠지.
클라우스는 속으로 한 마디도 못 하고 입만 다물고 있는 귀족들. 아니, 인간 조무사들을 바라보면서 낄낄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