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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4장 - 옛 인연들 (45/341)



〈 45화 〉4장 - 옛 인연들

조사, 라는 단어에 나타샤는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얼마 전 있었던 그 망측한 일에 대해서라면 이미 모든  끝나지 않았던가?
부끄러움이라곤 전혀 모르는 인간 귀족들이 소문만 무성하던 남색을  아카데미에서도 탐하다가 결국 일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있는 증거라곤 그들의 증언이 전부 아니냐는 반박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반박도 거의 모두가 같은 인간 귀족 생도들이 내놓은 것들.
다른 생도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더러운 짓들을 감추려는 자들의  편 감싸기 아니냐면서 반박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좋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조용히 묻어도 모자랄 판국에 조사를 요청했다고? 심지어 인간 놈들이 마음대로 아카데미에 사람을 보냈단 말이야?’

대륙 아카데미는 인간들의 영토에 가장 가깝다고는 하나 이곳에는 인간들의 자금만이 아니라 수인, 요정, 그리고 마족들의 것까지 전부 들어갔다.

외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이곳 생도들은 자신의 출신을 절대 강조하지 않으며 그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 정도로 민감한 곳에 과거 군부 소속도 아니고 현 군부 소속인 이를 보냈다?

“상당히 불쾌하네요.”



엥? 나타샤는 자신이 하려 했던 말을 누군가가 채감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보는 이의 심장이 절로 쪼그라들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앉아있는 율리아가 있었다.



“내가 듣기로 아카데미는 완벽한 중립 지대라고 들었습니다. 그 상대가 설사 한 종족의 중요 인물이라고 해도 어지간한 사항이 아니면 외부 세력이 개입하는 걸 최소화한다는 말까지 붙어있을 정도로요. 그런 아카데미에 인간 측이 그 어떤 사전 통보도 없이 사람을 보내다뇨?”
“…불쾌하시다면 사과라도 드릴까요? 마왕 전하?”



카엘라의 말은 명백한 조롱, 혹은 도발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연하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카엘라는 클라우스의 밑에서 마족들과 혈투를 벌인 여인이다.


인간 측이 무슨 잘못을 했든 그건 그녀에게 있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클라우스의 옆에 다른 이도 아니고 마족 여자가, 그것도 마왕이 있다는 것.

오직 그게 전부였다.

“인간 귀족 생도 넷이 끔찍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나을 수도 없는 상처지요. 증언이 있다고는 하나  생각해보면 상당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파견된 것일 뿐입니다.  의심들을 깨끗하게 거두어야 서로가 편하지 않겠습니까? 마왕 전하.”
“….”

카엘라는 의도적으로 계속 율리아를 생도가 아니라 마왕 전하라고 칭하고 있었다.
설마 수인인 그녀가, 대륙 전쟁에서 수도 없이 많은 전우들을 잃었던 그 카엘라가 마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를 리는 없다.
지금 그녀는 의도적으로 율리아를 그리 칭하면서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 마족 년이 사령관님 옆에 있는 것이야. 어째서! 저 간사하고 더러우며 추악한 것이!’

마족들이 클라우스를 좋게 평가하는 것, 그 정도는 이해한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절대적인 존재시니까, 그만한 동경을 받을 분이시니까.
하지만 그것과 지금처럼 사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경우가 다르다.


온 몸의 털이 삐죽 서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손톱을 뽑아내고 송곳니를 드러내고는 저 마왕의 목을 물어뜯고 잘라내고 싶다.

어디 감히 사령관님 옆에 마족이! 나의 대장, 나의 리더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인지!



“카엘라 티거님.”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속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클라우스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카엘라는 마치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의 명령을 기다리는 일원처럼 자세를 다잡고서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일단 아카데미에 왔다면 총장님부터 보러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총장의 허락도 받았다고 말입니다.”
“서류 상으로 허락을 받았을 뿐 대면하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네 종족이 모두 모이는 이곳 대륙 아카데미에서 다름 아닌 인간 분이 총장을 맡게 되셨습니다. 그 정도로 입지가 탄탄하신 분이니 군부의 실세라 하는 카엘라님도 그 분과 만나는  손해는 아닐 텐데요?”
“….”

유들유들하게 웃는 클라우스의 모습에 카엘라는 아, 하고 가볍게 탄식을 흘렸다.
클라우스가 총장을 만나러 가자는 말에 다른 뜻이 숨어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를테면 가는 길에 개인적으로 좀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런 거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하죠. 마침 총장님을 만나서 직접 전해야 할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카엘라가 이동하자면서 클라우스를 재촉한다.
잠시 다녀오겠다는 듯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율리아가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인간 측의  무례함, 반드시 기억해두겠어요.”
“왜 그리 흥분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마왕 전하. 커피나 마저 드세요. 다 식어 보이는데 옆의 요정에게 청해서 다시 데우던가 해서요.”


부들부들-.

흘끗 눈을 내려 율리아를 살펴보니 테이블 밑으로 숨긴 채 주먹을 쥐고 떨고 있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인간 귀족 생도들이 왜 죄다 고환이 잘렸는지, 그런 잔혹한 짓을 누가 벌였고  그리 했는지 율리아는 다 알고 있어서였다.



‘그 빌어먹을 벌레 새끼들!’

자신을 강제로 범하려고 했던 더럽기 짝이 없는 놈들이다.
하마터면 마음도 품지 않은 자들에게 순결을 내어줄 뻔 했다.
상상만 해도 절로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고 분노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자신의 옆에 서있는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치욕과 분노로 미쳐버렸을 것이다.
한 종족의 군주가 되어서, 동부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서 비참하게도 인간들에게 몸이 더럽혀졌으니 결코 제정신으로는   없었을 것이었다.



툭-.

갑자기 자신의 손에 와 닿는 다른 손의 감촉에 율리아가 시선을 내린다.
클라우스가 가볍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서는 아주 살짝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잠잠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율리아에게 마치 조용히 있으라고, 알아서 다 처리하고 올 테니 저번에도 말했던 것처럼 착실하게 힘을 기르라고, 그렇게 말하는 중이었다.



“….”


한 때는 마족들의 숙적이었으며 특히나 결정적인 패배를 끼쳐 전대 마왕의 완벽한 추락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남자다.


지금은 인간들 손을 놓고 자신의 손을 잡았다고는 하나 완벽하게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인간 측의 영웅이었던 자가 마족 쪽으로 들어왔다는데 당연히 의심이 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뭘까. 도대체 이 이유 모를 감정… 믿어도 될  같다는. 아니,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는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대체….’

마족이 아닌 인간 남자,  때는 그 손으로 수도 없이 많은 마족들의 목숨을 끊은 숙적.
당연히 경계심이 들어야 하건만 그와 몸을 섞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하늘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이 남자를 내려주었다는 그런 생각.

알게 모르게 자신을 챙겨주는 것부터 심지어 남녀 간의 정사 때 거친  하면서도 딱 과하지 않을 정도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다는, 심지어 여인으로서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감정을 품기도 했다.
믿을 이가 없어서 인간을 믿어야 하는 주제에,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율리아는 그녀도 미처 느끼지 못 한 사이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면 잠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두 생도는 다시  번 대련을 해보면서 내가 말한 부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하세요.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와 나타샤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는 클라우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타샤는 클라우스가 자신의 유혹에 점점 빠져들어서 ( 사실은 본인이 조교를 당하면서 ) 마력 제어를 도와준 부분을 한  사용해보고 싶어서. 그런 이유로 슬그머니 서로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아, 물론….



“일단 율리아 생도가 커피 다 마시면요. 그리고서 대련을 하는  좋겠죠?”
“읏….”



아무래도 한동안은 나타샤가 커피로 율리아를 괴롭힐 듯 했다.
무슨 애들도 아니고 저런 것으로 견제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클라우스가 발걸음을 옮기니  뒤를 카엘라가 얌전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두 남녀가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오자 다른 인간 몇이 슬쩍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 카엘라 혼자만 보냈을 리가 있나.’

거들먹거리는 행동하며 딱 봐도 싸가지 없게 생긴 겉모습 하며 누가 봐도 ‘나 귀족이오.’ 라고 아주 대놓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 뒤에서  있는 지랄 없는 지랄 다 하면서 유세를 떠는 놈들은 그런 귀족들을 호위하는 자칭 기사들이라는 놈들일 테고 말이다.



정작 대륙 전쟁에서 죽도록 싸운 건 징집병들이었다.
기사들 중에서 물론 열심히 싸운 이도 있긴 하다.


허나 그런 놈들은 정말 소수, 나머지는 ‘명예로운 전투에서 명예롭게 죽기 위해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라고 지껄이면서 대충 싸우거나 아예 전장에 나서지도 않았다.




‘율리아님. 부디 이 개새끼들 모가지를 싹둑싹둑 쳐주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이 새끼들, 클라우스를 보고서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어떤 이인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평민들  좀 꺾겠다고 아주 착실하게 지랄을 하네. 이 정도면 정성이 갸륵하긴 하다.’



이놈들이 뒤늦게 조사단을 파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차피 진실을 가려낼 생각 따위는 없다, 놈들이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이것을 빌미로 아카데미 안의 평민 생도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나아가 여전히 뒤숭숭한 인간 사회 내부를 다시금 예전의 것으로, 귀족 우월주의로 되돌릴 생각일 뿐이었다.


명분, 명분 노래를 부르면서 건수만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켠 놈들.
나라가 망하든 사람이 죽어 나가든 제 배만 불리면 되는 것들이 바로 이 세상의 귀족이다.

다른 종족들 상황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인간은 확실히 그랬다.
차라리 평민들이 서로 힘을 합쳐 대규모 민란을 일으키면  좋겠는데 확실히 나쁜 짓  때는 없던 머리도 잘 돌아간다고, 귀족들은 그런 부분에서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계속해서 평민들의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그들이 화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어떤 때는 징집병과 후방 보조병들 사이를 멀게 해서 그들끼리 싸우게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나이가 차서 더는 현역으로 뛸 수 없는 자와 현역들을 부딪치게도 했으며.
한 번은 남성과 여성 사이를 이간질해서 아주 난리가 나도록 하기도 했었다.


‘이러니 인간 손절 안 하고 버틸 수가 있겠냐고. 시발.’

스킬, 죽음 끝의 깨달음이 마족도 가능했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마족을 택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율리아의 옆에 있어도, 이후 그녀를 날름 먹어치워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안 되었기에 그나마 율리아의 옆을 가장 점하기 쉬운, 그러면서 다른 모든 종족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수 있는 인간을 택한 거다.



아무튼  돌대가리들과  한  부딪쳐야 할 생각에 클라우스는 절로 앞이 캄캄했다.
회차를 반복하면서 참 많이도 마주하는 광경인데,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병신들은 매번이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순간이라고 할 만 했다.



“후우.”
“….”

순간 카엘라의 두 귀가 쫑긋거렸다.
클라우스 딴에는 작게 낸다고 낸 한숨 소리를 정확히 들은 모양.

“…?”
“이봐, 카엘라. 지금 뭐하는 거지?”

갑자기 카엘라가 발걸음을 멈추자 그녀의 뒤에서 수인이 어쩌고, 꼬리가 어쩌고, 엉덩이가 참 탐스럽다 따위의 발언을 하던 귀족이 짐짓 엄한 어조를 보인다.
그에 카엘라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총장실로 먼저 가시죠. 나는 잠시 이 남자와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가하다. 그냥 여기서 말하지.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
“내게 이번 임무를 내린 분께서 분명 말씀하셨을 텐데요.  의견에 여러분들은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먼저들 가세요.  뒤따를 테니.”


그렇게 말해도 귀족들은 눈치만 볼뿐 딱히 갈 생각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 카엘라는 짐승의 소리를 내면서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남자와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카엘라의 협박에 귀족들과 기사들은 바로 굴복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알겠다고 떠든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장실로 향했다.

냄새 나는 짐승년 주제에 감히 목소리를 높인다고, 마치 카엘라에게 들으라는  말하는 건 덤이었고 말이다.


“….”
“….”



강의 시간이었기에 아카데미 내부는 조용했다.
총장실로 향하는 복도 한 곳에 남게  클라우스와 카엘라.


“….”

잠시 침묵하던 호랑이 수인, 카엘라 티거.
그녀는 연신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면서 슬쩍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자신과 눈앞의 남자를 방해할 어느 누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부관 카엘라 티거.”


완전히 무릎을 꿇고서 이마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클라우스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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