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3장 - 슬기로운 아카데미 생활
율리아는 지금 눈앞의 요정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나 무시하던 그 인간의 손에 의해 구원을 받은 종족 주제에.
클라우스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마족들에게 고개를 조아리고서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고 있을 같잖은 년놈들 주제에 그 승리 같지도 않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제 앞에서 으스대는 꼴이라니.
‘심지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클라우스 교수님한테 꼬리를 쳤다? 하, 고귀한 척은 다 하면서 뒤로는 아주 별짓을 다 하고 있었네! 역겨운 것들!’
아마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명백한 적의를 넘어 살기까지 내보였을 것이다.
제 앞의 이 요정이 자신이 먼저 점찍어두었던 생선을 채가려는 고양이 같은 여인이니까!
허나 자신과 클라우스는 이미 몸까지 섞은, 그리고 서로에게 약속까지 한 사이다.
자신은 클라우스에게 충성을 받을 만한 마왕이 되고 클라우스는 그런 자신에게 얼마 전까지 인간 왕국에 그랬던 것처럼 충성을 다한다.
새로운 우군을 만든 이와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은 이로서 그렇게 약조를 했다.
‘저 남자는 내 거야. 어디 감히 눈독을 들이려고.’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하니 율리아의 겉모습에서 절로 여유가 뿜어져 나왔다.
그 여유로운 자태를 나타샤가 눈치 채지 못 할 이가 없다.
요정 여인은 제 앞의 마왕을 바라보며 ‘이 여자가 뭘 믿고 이리 당당해?’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는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
허나 클라우스는 딱히 표정의 변화 없이 그냥 그 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꼬우시면 네가 더 유혹을 해보던가.’ 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할까.
나타샤는 클라우스의 그런 반응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도 화가 나지만, 그보다는 자그마치 ‘왕’ 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존심이나 권위, 체통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대놓고 클라우스에게 들이대는 율리아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러운 마족년! 내가 반드시 다리를 걸고 넘어져주겠어!’
무조건 방해한다, 그래서 무조건 빼앗는다.
저 클라우스라는 남자는를 다른 이들에게 보란 듯이 취해서는 벨라루스로 데려갈 것이다.
나타샤는 그렇게 결심을 하고 또 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서운하네요, 율리아 생도. 그래도 한 번 부딪쳤던 적에 대한 예의 정도는 차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게 마족들의 자랑거리 아니었던가요? 적이라고 해도 영광스럽게 싸운 이는 그만큼의 대우를 받는다. 이런 거 말이에요.”
“물론 있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광스럽고 명예롭게 싸운 자에게만 한해서 에요.”
“무슨 뜻이죠?”
“몰라서 반문하는 걸까요, 아니면 굳이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율리아가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가 상당히 섬뜩했기에 나타샤는 흠칫 놀라서는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서는 다른 곳을 쳐다볼 정도였다.
흑화를 막았음에도 여전히 그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마왕 본능은 남아있었던 것이다.
‘…잠깐만. 지금 내가 겁을 먹은 거야? 이까짓 마왕한테?’
율리아가 본격적으로 연쇄살인마, 피에 굶주린 미친 악귀라고 불리는 건 제 숙부의 목을 산 채로 뜯어내고서 자신에게 반하는 세력들을 산 채로 파묻은 다음 2차 대륙 전쟁을 일으킨 바로 그 시점부터였다.
그 전부터도 대륙의 그 어떤 이보다도 능력 좋고 재능 좋은 여인이었으나 그게 드러나지 않앗을 뿐이고 말이다.
당연히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나타샤에게 율리아는 부모 잘 만나서 마왕 자리에 오른 년.
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
“….”
두 여인 사이에 희미하지만 분명한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우리 둘 모두 딱히 말로 설득하는 것에 있어 딱히 큰 재능이 없는 듯 한데 쉽고 빠르게 몸으로 해결해보지 않겠느냐는 무언의 제안을 서로에게 던지는 중이었다.
‘이런 미친 것들이. 이대로 두다가 정말 강의실에서 싸울 수도 있겠어.’
싸움 구경은 좋다, 재미있다, 항상 새롭고 짜릿하다.
다만 그 싸움 구경 하다가 자신한테까지 불똥이 튀는 건 절대 사양해야 할 일.
교수가 바로 앞에 떡하니 서있는데 생도들이 그 앞에서 혈전을 벌이면 교수의 책임 문제는 둘째 치고 얼마나 만만하면 대놓고 무시하고 서로에게 살기를 드러냈겠느냐 뭐 이런 부분이 문제였다.
틈을 보이면 무조건 물어뜯는 미친 귀족들이 현재 이곳으로 오고 있다.
그 사이에는 상당히 반가운 얼굴도 껴있으나 안타깝게도 애써 모른 척 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괜한 책잡힐 일은 사전에 방지하는 편이 가장 좋았다.
탕탕탕-.
클라우스가 가볍게 교탁을 내리쳤다.
거기에서 발생한 소음에 율리아와 나타샤가 거의 동시에 흠침, 몸을 떨고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흘리던 살기를 재빠르게 거두었다.
“아카데미의 교칙을 잊은 건 아니겠죠? 생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대륙의 평화를 방해하는 그 어떤 언행도 삼간다. 이것을 어기는 자는 불명예스러운 퇴학 처리까지 논의될 수 있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율리아 생도, 그리고 나타샤 생도?”
“네. 교수님.”
“기억하고 있어요.”
“좋습니다. 그러면 정리해보죠. 율리아 생도는 나한테 할 말이 있다. 그리고 나타샤 생도도 할 말이 있다. 그게 전부 저번 대련에서 있었던 부분에 관한 것이다. 맞습니까?”
“….”
당연하지만 율리아에게 있어서, 그리고 나타샤에게 있어서도 그 부분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클라우스와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게 전부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침대에 누워서도 할 수 있다고. 지금은 서로 조금이라도 친해지자.’
원래라면 만날 이유조차 없는 이들이다.
세실리는 그래도 마족이고 클라우스가 그녀를 끌어들이면 자연스레 마왕인 율리아의 밑으로 들어가기에 평생 얼굴 보고 산다지만 나타샤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2차 대륙 전쟁은 무조건 터진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제공하는 원흉은 결국 인간 귀족.
율리아를 범해서 그녀를 피에 굶주린 미친 악귀로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었고 바꿀 수 없는 미래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전쟁에서 서부 연합은 무조건 패배한다.
클라우스가 어떤 지랄 개고생을 해도 결국 온갖 곳에서 벌어지는 삽질로 인해 패배를 막을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 그 클라우스가 없는 서부 연합의 미래는?
‘씨부럴 당연히 뻔하지. 마족에게 아주 깔끔하게 박살이 나는 거야. 대가리가 쪼개진다는 게 무엇인지 아주 확실하게 알고 가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 쪽에 클라우스가 나름 괜찮게 보는 이들이 있다.
그건 요정들이나 수인들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장 나타샤만 해도 마족이 아니라 요정이다, 2차 대륙 전쟁에서 동부를 상대로 싸워야만 하는 서부 연합의 일원이란 말이다.
그들을 어떻게든 살리려면 자신만 노력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율리아야 자신이 제어할 수 있다지만 동부의 모든 마족들을 다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서부 연합 출신의 이들이 율리아와 그나마 가까운 사이임을 그들에게 보여야 한다.
마왕과 나름 안면식이 있는 사이라면 서부 연합 출신이라고 해서 막 죽이기도 모호할 테니까.
‘그러니까 나타샤. 살고 싶으면 친해져. 자꾸 부딪치다가 율리아가 너 아니꼽게 보기 시작하면 나중에 가서 무슨 후회를 할지 몰라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족의 승리는 예견된 것, 율리아는 말 그대로 약속된 승리의 캐릭터다.
그 뒤에 붙어서 단물 좀 쪽쪽 빨아먹으려는데 비록 율리아가 완벽하게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는 해도 호감도 깎이는 짓은 하지 않는 게 현명했다.
율리아가 나타샤를 정말, 엄청나게, 존나 싫어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클라우스도 ‘그냥 죽이자.’ 라고 말할 수밖에.
어차피 그에게 있어 필수는 율리아고 나머지는 선택 사항일 뿐이다.
말을 안 들어주고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면 쿨하게 버리고 제 갈 길 가야 한다.
“마침 바깥 햇살도 좋은데 야외에서 커피나 한 잔 하죠. 어떻습니까? 두 생도는?”
“…저는 당연히 좋아요.”
“저도요.”
대답을 할 거면 이쪽 보고 대답 좀 하지.
여전히 서로를 신경 쓰고 견제하는 두 여인을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 두 여자를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서 율리아 한 입, 나타샤 한 입, 이렇게 먹어보는 상상도 참 여러 번 했지만 그게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여자의 캣파이트도 문제고 한쪽은 동부의 마왕에 다른 한쪽은 서부 연합에서도 나름 열심히 싸우던 가문의 여인인지라 그 부분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딱 한 번 그게 가능했던 적이 있지. 2차 대륙 전쟁의 패배 이후 노예가 된 나타샤가 끌려와서는 보지는 나한테 털리고 뒤는 율리아의 손가락에 뚫렸던가? 확실히 나쁘지는 않았지만….’
율리아는 당장 자신이 완벽하게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밑으로 두고 있고.
세실리는 애당초 더 괴롭혀달라고 앙앙대는 극강의 변태 여인이며.
그 외에 다른 여인들도 자신 앞에서만큼은 상당히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
나타샤처럼 툴툴대는 맛이 없어서 가끔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나타샤의 매력은 아닌 척 하면서, 자존심 강한 척 하면서, 그러면서 귀엽게 앙앙대는 것.
그 부분에 완전히 빠진 클라우스는 일부러 그녀의 기를 세워주면서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을 선호했다.
헌데 나타샤를 노예로 삼아버리면 그 외강내유가 완전히 붕괴되어버린다.
지금의 리르보다도 더 심각하게 망가져서는 완전히 정신 나간 노예 1호가 되어 박는 것 외에 그 어떤 재미도 없는 여체가 된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더더욱 율리아와 나타샤의 관계가 동맹은 아니어도 중립 정도는 되어야 해.’
나중에 정식으로 나타샤가 율리아에게 항복할 때 영광스러운 항복이라면서 멋지게 받아주는 모습을 위해서.
또 나타샤가 있는 벨라루스가 요정들이 머무는 일종의 거주 구역을 관장하게 되었을 때 다른 마족들이 율리아에게 반감을 표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강의실을 나선 클라우스와 두 여인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율리아가 슬쩍 클라우스의 왼쪽을 점하니 나타샤가 질세라 그 반대쪽에 선다.
“…그러다가 복도 다 차지하겠습니다. 내 옆에 서지 말고 뒤로 가세요.”
클라우스의 경고에 칫, 하고 침음을 내뱉는 율리아.
그러다가 두 눈을 번쩍이고는 미처 나타샤가 반응하기도 전에 클라우스의 바로 뒤에 서고는 승자의 미소를 짓는다.
‘하?’
지극히 유치한 싸움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유치해야 승자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당장 클라우스가 율리아를 바라보는 눈이 꽤나 부드럽다는 걸 알아차린 나타샤 입장에서는 무조건 경계해야 할 대상 1순위가 바로 제 앞의 마왕이었다.
‘이 마족년이 진짜….’
어제 대련에서 그냥 진심으로 대할 걸 그랬나보다.
그랬다면 마법에서는 많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동안 갈고 닦은 제 실력으로 어떻게든 율리아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었을 텐데 말이다.
후우우, 하고 한숨을 내뱉은 나타샤는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이렇게 선공을 맞았다면 이후 상황에서는 역으로 자신이 선수를 치면 되니까 말이다.
“여기면 딱 적당하겠군요.”
풀밭 위 마련되어 있는 원탁 앞에 앉은 클라우스는 두 여인에게도 자리를 권하고는 근처에서 생도들을 위해서 간단히 마실 것들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가서 커피를 주문하려고 했다.
“잠시 만요, 클라우스 교수님. 제가 할게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걸음을 옮기는 나타샤.
그리고는 원래 마실 것들을 준비해주는 아카데미 측 인원들이 사용하는 기구들을 다 가져와서는 직접 커피를 정성스레 갈아내고 밑에 우려내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그 자존심 강한 요정이 직접 커피를 타준다니.
그것도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종족인 인간 남자에게 말이다!
‘확실히 경계해야 할 여자네.’
율리아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타샤는 그렇게 정성껏 만든 커피 한 잔을 클라우스 앞으로 내밀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설탕은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한 스푼 하고 반만 주면 됩니다, 나타샤 생도.”
“네. 여기 있습니다. 율리아 생도도 똑같이 해주면 되죠?”
“네? 아니, 저는….”
참고로 율리아는 쓴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래서 커피도 그리 선호하지 않고, 마신다고 해도 우유도 넣고 설탕도 많이 넣은 커피를 선호하는데 나타샤는 그딴 거 없이 그냥 클라우스의 취향이 통일시켜버린 것이었다.
지금 나타샤의 행동은 찍먹인 사람에게 소스 다 부어주고 먹으라고 하는 것.
설렁탕 나오자마자 다 함께 깍두기 국물 넣어서 먹으라고 듬뿍 들이부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잔혹한 요정을 보았나.’
엉망이 된 표정을 짓고 있는 율리아를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커피를 한 입 머금었다.
…이 집 커피 잘 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