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3장 - 슬기로운 아카데미 생활
따악!-
“아우우우!!”
이것으로 열다섯 번째 꿀밤이었다.
최대한 힘을 빼고서 그냥 가볍게 쥐어박는 수준으로 해서 다행이지, 만약 진심을 다해서 때렸다면 지금쯤 슬슬 뇌진탕이 왔을 지도 모를 정도로 참 많이도 맞은 세실리였다.
“그만. 30분 지났어요, 세실리 생도.”
“하, 한 번만 더요! 조금만 더 하면 어떻게 파훼법이 보일 것 같아요!”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기회에. 쨔잔, 이상 끝.”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는 슬쩍 두 손을 들어보였다.
더는 전투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명백히 밝히는 자세.
인간 귀족들도 보는 눈 때문에 이렇게 항복을 해오면 공격을 멈추는 마당에 명예로운 결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마족들 입장에서 더는 공격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이이익!”
클라우스에게 실컷 꿀밤을 맞고 정작 본인은 아무 것도 하지 못 한 터라 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 하는 세실리였다.
하지만 곧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서는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세실리 입장에서 보면 이번 대련에서 얻은 게 아예 없는 것이 아니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던 클라우스의 움직임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부분은 클라우스가 의도적으로 그녀가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봐준 것이지만 그것까지는 지금의 세실 리가 눈치를 챌 수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신 거예요?”
클라우스를 따라 자세를 바로 한 세실리가 그렇게 물어온다.
그녀의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해주지 않고 다만 어깨만 으쓱이니 세실리는 침음을 내뱉고서는 다시 입을 열고서 혼잣말 비슷한 것을 중얼거렸다.
“어떤 이들은 다만 훌륭한 사령관, 불패의 지휘관 정도로만 알고 있던데 역시 다 틀린 말이었어. 그건 가면일 뿐이다, 훨씬 더 무서운 남자임에도 그걸 숨기고 있는 거다! 그 말이 맞았다고! 멍청이들! 왜 직접 부딪쳤던 이들의 말을 믿지 않는 거야?!”
그거야 그런 식으로 너무 과하게 띄워주면 불편하니까 그렇겠지.
반대로 나와 직접 싸웠었던 자들은 내 능력을 최대한 높여야 자신들의 패배도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이 되니 그런 것이고 말이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클라우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세실리 앞으로 다가가서 다시 한 번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따악-.
“아얏! 왜, 왜 때리세요! 대련 끝났잖아요?!”
“고마워서요.”
“에에? 아니, 왜 고맙다는 인사를 왜 이런 걸로….”
“막상 나와 같은 인간들은 매번 나를 깎아내리느라 바빴는데, 마족들은 정반대구나. 참으로 우습게도 나를 인정해주는 건 나로 인해 구원 받은 놈들이 아니라 나로 인해 좌절했던 이들이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에요.”
왈가닥 기질이 있는 이 마족 여인한테 은근히 잘 통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견줄 자가 없는 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막 남발해서는 안 되고 아주 가끔 한 번 정도 보여주는 식으로.
그런 방식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세실리를 흔들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살해한 적도 있고 역으로 자신 쪽을 끌어들인 적도 있었다.
원체 머리가 좋고 눈치도 빨라 잘 통하지 않는 율리아나 본인의 자존심이 세서 그런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자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타샤와는 다른 부분이라고 할까.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클라우스 교수님.”
“또 대련할 수 있냐는 질문이면 제발 나중에 해주길 부탁하고 싶은데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제가 궁금한 거는….”
“왜 그런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심지어 역적으로 몰려서 지휘권까지 전부 빼앗겼던 상황에서도 전쟁의 끝까지 인간 쪽에 있었냐. 뭐 그런 겁니까?”
그러자 세실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저 세대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거나 참여했다고 해도 막판에 참여해서 딱히 클라우스와 부딪칠 일이 없었던 이들.
그래서 고참병들이나 생환병들에게 클라우스라는 존재에 대해서 아주 귀가 닳도록 들은 자들 말이다.
‘거기까지 해서 서부 쪽에는 동정표와 함께 더는 인간 쪽에 서지 않아도 배신자 소리를 듣지 않을 이유와 율리아가 무조건적으로 나를 잡아야 하는 이유를 마련하려고 했으니까.’
현재 마왕의 곁에는 믿을 수 있는 가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당장 마왕가의 수호자라 할 수 있는 근위대장도 그녀의 숙부가 포섭한지 오래.
마왕가보다 아카데미가 더 안전할 수 있다는 몇 안 되는 수하들의 판단에 아카데미가 시작되기 직전에 아카데미의 생도로 들어온 게 바로 율리아였다.
아직 그녀의 숙부가 동부를 완전히 석권한 것은 절대 아니다.
중립을 지키고 있는 이들도 많고 율리아에게 충성하는 이들도 소수 나마 남아있다.
무엇보다 그는 명분이 부족했다, 현재 마왕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을 그 명분이 말이다.
결국 아카데미에서 일을 저지르기로 하고 그림자들을 동원해서 율리아를 인간 귀족들에게 던져주려고 했다.
마왕은 마왕대로 망가트리고, 휴전 이후 점점 가라앉은 분위기에 다시금 불을 지피기 위해서.
‘지금이야 율리아가 그놈들에게 당하지는 않았으니 인간보다는 숙부에게 더 이를 갈고 있지만…. 어차피 2차 대륙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율리아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다른 서부의 종족들이, 그도 아니라면 율리아의 말을 듣지 않는 몇몇 마족들이 선공을 가해서. 어떤 방향으로든 결국 벌어질 일.’
어떤 부분은 분기점이 아예 존재하지 않고, 어떤 부분은 충분히 바꿀 수도 있다.
율리아가 완전히 눈깔이 돌아버리는 건 막을 수 있어도 2차 대륙 전쟁은 결국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클라우스는 곧 세실리가 대답을 바라는 눈치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음을 자각했다.
다른 이들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질문이기에 딱히 어렵게 생각할 건 없었다.
“최소한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 끝은 보고 싶었다고 할까요.”
“그게 전부인가요? 공명심에 그리 했다던가 아니면 충성심에 그런 게 아니고요?”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하기도 했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게 아예 없던 건 아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냥 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른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이 정도라고 해두죠.”
이만하면 답이 되었냐며 잔잔하게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돌변해서는 얼른 돌아가서 씻고 강의나 지각하지 말라고 짐짓 화를 내는 클라우스였다.
그에 세실리는 왠지 모르게 악마라기보다는 그냥 지극히 평범한 사람 같은 남자를 바라보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동경이나 존경심에 더해서 호기심도 같이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 * * * * * *
“정말 이번 일을 그냥 묻을 생각입니까?”
“….”
“딱히 권세 높은 가문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조용히 지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도 수인들이나 요정들이 우리들을 비웃고 있다고 하는게 다시금 일을 키우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소리! 한 번 간을 볼 때 필요 이상으로 반응을 해야 다시는 허튼 짓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게 허술한 태도만 취하다가 또 평민놈들이 들고 일어나는 일을, 대규모 민란을 겪고 싶은 겁니까?”
중년 귀족의 말에 모여 있던 다른 귀족들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몇몇은 생각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었고 또 몇몇은 민란 당시 꽤나 크게 데였던 모양인지 두려움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절대 안 됩니다. 아무리 그저 그런 가문이라고 해도 어찌 되었든 한 지방을 다스리는 귀족! 그자들의 권위가 떨어지면 필시 아랫것들은 그 위마저 함부로 대하기 마련입니다! 전쟁 때를 생각해보세요. 그 저열한 평민들이 공 좀 세웠다고 감히 우리에게 ‘요구’를 하던 꼴을 말입니다!!”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듯 열정적인 연설이었다.
그 언변에 넘어간 것인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아있는 귀족들의 반응이 상당히 긍정적이자 중년 귀족은 기세를 유지한 채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는 그 천한 자들이 위를 쳐다보지 못 하게 해야 합니다. 저들이 누구 덕에 살고 있는 건데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시선을 마주하면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우리와 같은 곳에 서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말도 안 되는 꼴을 계속 보고 계실 참입니까?”
“절대 아니오!”
“천한 것들에게는 지금도 과분해! 전쟁을 이용해서 감히 우리 귀족들과 맞먹으려는 그것들!”
갑자기 활활 타오르는 회의장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의장을 맡고 있는 요제프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람을 잡아주고, 그로 인해 귀족들도 다시금 일어섰다.
이것으로 요즘 들어서 상당히 기고만장해져 있던 건방진 평민들을 사뿐히 밟아줄 명분이 생기게 되었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조용한 목소리, 그러나 후작의 자리에 앉아있기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남자.
키엔마이어 후작이 입을 열자 귀족들이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대륙 전쟁 당시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몇 안 되는 고위 귀족 지휘관.
뿐만 아니라 위대한 전쟁 영웅과 친분도 있기에 평민들도 나름 좋게 평하는 극소수의 귀족인 이가 바로 키엔마이어 후작이었다.
“정말 대륙 아카데미를 들쑤실 생각입니까? 거기는 우리 인간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같은 서부 연합의 동맹인 수인들, 그리고 요정들이 있는데요.”
“걱정 마시길, 키엔마이어 후작. 우리가 노리는 건 어디까지나 내부 정리를 위한 명분입니다. 아카데미에 인간 생도가 귀족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평민 생도들에게 의심의 화살을 돌릴 생각입니까? 마족이 아니라?”
“마족들을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듣자하니 마왕이라는 여자까지 와있다는데 과한 자극은 득이 될 게 없지요. 모양도 좋지 않고 말입니다.”
그 말에 키엔마이어 후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말들은 저렇게 하지만 결국 마족들과 부딪치는 게 무섭다는 게 아닌가.
7년이라는 세월동안 그렇게 시달렸으니 이해는 한다만 그걸 또 죽어도 이해하지 않는 부분에서 참으로 우습고 또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증언 외에는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그들을 해치려고 했다고 주장해도 딱히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 그들의 증언이 누군가의 협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라고 하고 밀어붙인다면 안 될 것도 없지요.”
“홈부르크 자작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먼저 제압할 명분이니까요.”
이들이 원하는 바는 간단하다.
아카데미에서 화를 당한 귀족 생도들을 그들에게 원한을 가진 평민 생도들이 공격한 거 아니냐, 워낙 배워먹은 게 없고 막 나가는 놈들이니 잔혹한 짓을 했고 그로 인해 충격을 받은 고귀한 귀족들은 증언마저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아카데미 안에서조차 함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평민이라는 천한 자들이다.
그들이 귀족을 공격했다! 건드려도 딱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저지른 것이다!
세상이 그 말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차피 인간 세상에서는 귀족들의 힘이 월등히 강하다, 다만 명분이 없었을 뿐.
이것으로 전쟁 이후 주제도 모르고 까불던 평민들을 모조리 잘라낼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귀족들이 가장 우월하며 영광스러운 존재였던 때로 돌아가는 거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아, 키엔마이어 후작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럴 때만큼은 자신을 귀족으로 태어나게 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여기 모인 자들 중 절반 이상은 대륙 전쟁 때 도망치기 바빴던 놈들이다.
심지어 도망갈 때조차 재산을 아주 싹싹 챙겨서 가기까지 했다.
나라가 망하든 사람들이 죽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던 자들이 바로 눈앞의 귀족들.
평민은 닿는 것조차 망측하다고 여기면서 그들에게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우스운 장면인지, 그는 정말로 배를 잡고 웃고 싶을 정도였다.
“평민 생도들에게 의심의 화살을 돌리고 그 소문을 이용해서 왕국 내부의 모든 귀족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평민들에게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준다. 뭐,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 잊고 있는 게 있는 듯 한데요.”
“그게 무엇입니까? 키엔마이어 후작?”
“그 아카데미에 누가 있는지 잊은 겁니까? 그 남자가 있는데 아카데미 안에서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그저 ‘평민’ 이라는 이유만으로 명분을 만들고자 하는 겁니까?”
순간 회의장에 침묵이 돌았다.
평민들을 그리도 무시하는 귀족들임에도, 그 귀족 중에서도 권세 높은 자들이 모인 곳이라고 해도 그 남자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 부담 그 자체였다.
“걱정 말게, 키엔마이어 후작.”
그 때, 조용히 귀족들의 말만 듣고 있던 요제프 대공이 입을 열었다.
“그를 걱정하는 것이라면 아무 문제없어. 바로 그 남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적절한 인원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얌전히 요제프 대공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후, 대륙 아카데미로 한 무리의 인간들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