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장 - 슬기로운 아카데미 생활
“클라우스 사령관님!”
“교수님이라고 부르세요, 세실리 생도. 호칭 주의하라고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클라우스 교수님!”
“왜 부른 겁니까. 혹 궁금한 거라도 있습니까?”
“당연하죠. 너무 많아요! 묻고 싶은 게 한 두 개가 아닌데….”
“일단 앉으세요.”
세실리를 교수실까지 안내해서 자리를 권한 클라우스.
다른 생도였다면 교수가 개인적으로 데리고 가서 만나는 것이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세실리는 현재 두 번이나 클라우스에게 두들겨 맞은 상태다.
이쯤 되면 미안해서라도, 그리고 걱정이 되어서라도 그만 하라는 말을 전하려는 게 아니냐.
아카데미의 다른 이들은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역시 너무 강하세요. 그때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더욱요. 역시 남부의 악마… 아, 죄송해요. 이 호칭 싫어하신다고 들었는데.”
“잘 알고 있으니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주었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 ‘네에!’ 라고 힘차게 대답하는 세실리였다.
나타샤가 앙칼진 길고양이, 율리아가 도도하면서도 나름 손길을 허락하는 집고양이라면.
세실리는 그냥 만사가 다 행복한 강아지라고 보는 편이 좋을 정도였다.
“저, 그래서 클라우스 교수님. 저는 왜 보자고 하신 건가요?”
“내가 왜 세실리 생도를 개인적으로 보자고 했을 것 같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고민을 해보고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으음… 잘 모르겠어요!”
그래, 역시 저런 식으로 대답을 하는구나.
막내딸이라고 해서 너무 곱게 키웠더니 저런 거 아니야, 빌어먹을 레블랑 가주 자식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답이 없을 정도로 버릇없이 큰 게 아니라는 것 정도.
훌륭하게 이끌어주는 이가 곁에 있다면 충분히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여인이었다.
이미 다 겪었던 일들이었으나 볼 때마다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오는 상황.
클라우스는 이마를 긁적이며 깍지를 끼고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자꾸 내게 덤비는 겁니까? 세실리 생도가 바보라던가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모를까, 그 날의 부딪침 한 번으로 이미 실력 차가 많이 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네. 당연히 알고 있죠. 설마 제가 클라우스 사령관… 아니, 교수님을 이겨먹으려고 이런 행동을 벌일까요? 당연히 아니죠. 다만 저는 더 많이 경험하고 싶었어요. 우리 마족들이 한 인간을 그렇게나 높게 평하던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흐음.”
“거기에 그렇게나 많은 견제에 배신까지 당해놓고도 결국 메라 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마족들의 마지막 노림수까지 좌절시킨 분이잖아요. 거기 참전하셨던 분들께는 죄송한 말이나 전 그런 교수님을 무척 존경하고 있어요.”
역시나 많이도 들었던 말, 그러나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해지는 말이었다.
분명 자신은 마족들과 그 엄청난 혈전을 벌이며 수도 없이 많은 마족 병사들과 지휘관들을 참살한 인물, 말 그대로 악마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 이다.
그런데 그 마족들이 오히려 자신을 동경하고 있다던가 존경하고 있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부분이었다.
자신이었다면 이를 갈면서 그 목을 따서 종족의 복수를 했다! 뭐 이런 식으로 나설 텐데.
가끔 가다 보면 정말 인간만큼이나 또 이해가 가지 않는 종족이기도 했다.
‘…내가 만들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세실리의 말에 침음을 내뱉은 클라우스는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다고 해서 무모한 싸움을 더 벌일 필요는 없어요. 이제 부족한 부분을 알았으니 빠르게 채우면 될 겁니다. 보아하니 세실리 생도는 다른 강의도 듣고 있는 것 같은데요.”
“네. 일단 검술 강의를 듣고 있어요. 클라우스 교수님이 검을 무척 잘 쓰신다고 해서요. 저도 교수님만큼 검을 잘 쓰는 그런 마족이 되고 싶어요.”
“…아, 네.”
이런 세실리를 처음 마주했을 때에는 참 황당했다.
마족 역사상 최악의 적을 앞에 두고 두 눈을 반짝이며 호감을 보이는 마족이라니.
심지어 그녀가 속한 레블랑 가문은 클라우스의 손에 의해 많은 전사자를 낸 곳이기도 하다.
헌데 그 가문의 막내딸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당연히 이상하고 또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겁니다. 한 달 후 세실리 생도의 상대는 다름 아닌 나니까요.”
“네?”
“아까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붙었던 상대가 다음 번 상대가 될 것이라고. 그 상대를 꺾는 이가 추가 점수를 받게 된다고요.”
“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네요. 그런데 그리 된다면….”
“세실리 생도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겠죠. 그래서 세실리 생도는 특별히 제가 인정을 해줄 정도로 성장하면 이긴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네? 저는 그런 거 필요 없는데. 그냥 교수님이랑 싸워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인걸요.”
줄 때 받아, 이 여자야.
남들은 어떻게든 점수 더 좋게 받아서 ‘내가 대륙의 쟁쟁한 자들과 겨루어서 이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받아왔다!’ 라고 자랑하려는 판국에 말이다.
“그보다 그 말씀은… 그 전에도 제 연습 상대가 되어주신다는 거죠?”
“그리 되겠지요.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이번에는 목검으로만 때려줄 생각이 없는데요. 아마 온몸이 다 아플 정도로 몰아붙일 겁니다. 배를 후려치고 엉덩이를 때려줄 생각인데.”
“배, 배? 엉덩이?”
클라우스의 말에 바로 반응을 하는 세실리.
맨 처음 그와 상대할 때 정통으로 맞았던 배에 이어서 오늘 목검으로 또 찰지게 얻어맞았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갑자기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
이 여자가 벌써부터 미치려고 하네.
그 말도 안 되는 성향 드러내는 것까지는 좋은데 시작부터 하드하게 가지는 말자.
아직 아카데미를 뜬 것도 아니고 레블랑 가문과 접점이 생긴 것도 아니라 생도 괴롭힌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세실리 생도!”
“아, 네, 넵!”
“집중하세요. 아까 전 대련 때도 그렇고 자꾸 집중이 깨지는군요. 그러다가 정말 아주 많이 맞아서 무척 아플 수도 있습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세실리.
그러나 그 맞는다는 말이나 아프다는 말에 거북한 반응을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게 기대된다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말하지 않으면 저 여자가 먼저 말하게 된다. 어떻게 할까? 딱히 상관은 없다만 이걸로 또 나중에 분기점이 나뉘는데. 어찌 할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세실리에게 조금 더 결정권을 주기로 하고는 가만히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마족 여인이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연다.
“저기, 클라우스 교수님.”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더 겨뤄보고 싶다는 말이겠죠.”
“에, 으엥? 어, 어떻게 아셨어요?”
“하도 마족들이랑 싸워서 그런지 무슨 말을 할 지 다 눈에 보이거든요.”
“네? 진짜요? 진짜로 그래요? 우와?! 사령관님, 아니 교수님 진짜로?!?!”
당연히 거짓말이다, 당연히 개소리다.
하지만 세실리에게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리 남부의 악마님이, 대륙 전쟁의 영웅님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보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까? 미안한데 난 적당히 봐준다, 라는 말이 진짜 적당히 봐준다 정도가 아닌 놈입니다. 당장 교수 하나 병신 된 거 보지 않았습니까.”
“그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어요. 감히 인간 버러지 주제에 어디 교수님께 그런 무례를.”
“…나도 인간인데요.”
“아, 그러네요. 하, 하지만! 그런 멍청한 인간 귀족과는 다른 분이잖아요! 맞아, 솔직히 그런 말도 있어요. 교수님이 마족으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말! 그랬다면 전쟁의 승패를 떠나서 전설적인 영웅을 마족이 가지게 되는 거였는데!”
그 전설적인 영웅이 이미 마왕 곁에 남기로 했어.
나중에는 그 뒤에서 당신네들 군주를 열심히 다뤄볼 생각이고.
“아무튼! 전 괜찮아요. 막 저번처럼 배를 때리셔도 되고 오늘처럼 엉덩이를 막 때려주셔도 되거든요! 열심히 할 수 있어요! 더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교수님도 그냥 걱정마시고 열심히 저를 혼내주시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도 당하고 싶은 겁니까?”
“아, 아니거든요?! 그냥 위대한 영웅과 더 많이 싸워보고 싶을 뿐이에요!”
세실리의 외침에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정작 자신이 구한 서부 연합, 특히 인간 놈들은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제국이고 왕국이고 귀족이란 타이틀 붙인 놈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깎아내리고 어떻게든 남부의 승리가 그냥 남부군이 잘나서 거둔 승리라고 폄하하려고 애쓰는데.
정작 그 상대였던 마족들은 그런 클라우스를 인정하며 동경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참 여러 번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모습이긴 해.’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바로 다 벗기고 저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마구 때려주고 싶다.
때리는 손맛은 세실 리가 최고였고, 보이는 반응 역시 그녀를 이길 여인이 없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야 정상인데 오히려 기분 좋다고 앙앙대며 더 때려달라고 외치는 검은 머리의 미녀를 보고 있자면 없던 가학성도 활활 불탈 정도였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참으로 아쉽게도 오늘은 선객이 있다.
“뭐, 그렇게 말한다니 나도 각오가 새로워지는군요.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상대해주겠습니다. 하지만 봐주는 것도 없고, 아프게 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난 당신을 거세게 몰아붙일 것이고 끝에는 아주 처참하게 짓밟아줄 겁니다.”
“네! 상관없어요. 교수님 마음대로 하셔도 저는 아무렇지 않아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기쁘다는 듯 헤헤 웃는 세실리.
만약 레블랑 가주가 제 막내딸의 저런 모습을 본다면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
이왕 싸우게 된 거 그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없이 겨루겠다는 모습에 역시나 마족답다고 찬사를 보낼까, 아니면 우리 딸이 왜 저러냐고 비명이라도 지를까.
‘뭐, 상관없지. 어차피 그 남자는 율리아 손에 죽거나 세실리 손에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참으로 웃기게도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곳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제아무리 이 세상을 만든 작가인 자신이라고 해도, 수십 번의 회귀를 거치며 모든 걸 경험한 클라우스라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몇몇이 분명 존재했다.
그 중 가장 확실한 것은 결국 2차 대륙 전쟁이 발발하고 마족이 승리한다는 부분.
그 외에 여러 잡다한 것들 중에는 세실리가 속한 레블랑 가문의 가주는 죽어도 율리아의 숙부 편에 서서 율리아와 대립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분기점이 나뉘게 된다.
세실리를 포기하면 그녀와 그녀의 아비는 율리아 손에 죽게 된다.
그리고 레블랑 가문은 마왕의 손에 의해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반대로 세실리를 취하면 그녀는 제 손으로 제 아비를 죽이게 된다.
레블랑 가문은 그 세실리의 공로로 면책권을 받아 가문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솔직히 레블랑 가문이 망하든 말든 상관없어. 나한테는 세실리, 이 여자만 중요하지.’
괴롭히는 맛이 확실히 있는 여자다, 아무리 괴롭혀도 좋다며 앙앙대는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람 마음을 미치게 만드는지 어떤 때에는 자신이 사디스트 성향이 있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세실 리가 대단한 것, 다른 말로 미친 여인 그 자체였다.
그 어떤 이성이라고 해도 자신을 괴롭힐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요물이라고 할까.
저리도 해맑은 미소에 활발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침대에만 데리고 가면 얼른 제 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달라고 매달리는 장면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클라우스 사령관… 아니, 교수님!”
“…가보세요, 세실리 생도.”
도대체 저런 또 어디서 보고 배운 건지, 군례까지 올리는 세실리였다.
몇 번을 봐도 이해하기 힘든, 그래서 그냥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괴롭히는 맛으로 마주하고 있는 세실리를 교수실에서 내보낸 후 클라우스는 방을 나서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아직 강의가 많이 남은 시간인지라 보는 눈이 많아요.”
“….”
“그러니까 여기서 유혹하는 건 나도, 나타샤도 손해라는 겁니다.”
그러자 복도 옆의 기둥에서 슬그머니 요정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걸 보니 전투 마법 강의가 끝난 후 이 근처를 배회하면서 클라우스가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 마족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죠?”
“설마 질투라도 하나요?”
“약속이 다르잖아요. 이렇게 하면….”
“걱정 마요. 세실리 생도는 그냥 내 열렬한 추종자일 뿐이니까.”
“추종자요?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부 연합에 속한 이도 아닌 마족 여인이?”
“그 고귀하신 요정님이 인간 남자 하나 유혹하겠다고 바로 앞에서 자위도 했는데, 마족이 나를 추종하는 게 그리도 이상합니까?”
클라우스의 말에 나타샤의 얼굴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든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저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을 수도 있고.
“오늘 저녁에.”
“저녁에?”
“…제 방으로 와주세요.”
“당신 방으로요? 왜요?”
“모, 모르는 척 하지 마요. 파렴치한.”
말하는 것 자체로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얼굴을 돌리는 나타샤.
하지만 거짓말을 잘 하지 못 하는 그녀답게, 두 볼에는 홍조가 피어올라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