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3장 - 슬기로운 아카데미 생활
세실리 레블랑,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이자 마법에 있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인.
가장 많은 예쁨을 받고 자라는 막내여서 그런지 살짝 왈가닥 면도 있고 가끔은 막 나가는 경향도 있으나 클라우스가 기억하는 부분은 역시나 심각하다 할 수 있는 마조 성향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멀쩡했던 마족 측 실력자다.
소설에서도 그냥 율리아와 대립하다가 죽었을 뿐이지 그런 성향이 드러난 적이 없다.
무엇보다 클라우스 본인이 그런 설정을 넣은 적도 없었다.
‘그냥 율리아와 싸우다가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막 광소를 터트리며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 정도로 써넣었는데 그게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지.’
그렇게 생각하며 클라우스는 자기 앞에 무척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는 세실리를 바라보았다.
저번에도 이미 한 번 거하게 박살이 났던 경험이 있음에도 그런 적은 전혀 없다는 듯 기대감으로 부푼 감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세실리를 바라보며 패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마족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세실리 본인도 지금 클라우스에게 가지는 감정이 남부의 악마에게 가지는 호승심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테고 말이다.
‘호승심은 무슨. 은연중에 품고 있는 성적 취향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지.’
클라우스는 그리 생각하며 가볍게 손을 풀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세실리는 분명 ‘마법’ 에는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족 여인이다.
그러나 전투 마법에 있어서는 최하점, 거의 실격에 가까운 여인이기도 했다.
“세실리 생도. 아까 작성하라고 한 종이를 보니 아무것도 적지 않았던데.”
“네, 맞아요.”
“이상하네요, 분명 전투 마법은 마법이 우선시되는 게 아니라 전투를 우선시 한다고 말을 했을 텐데요? 마법만 운용할 생각이라면 기초 마법 강의나 운용 마법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닐까 생각되는데.”
“제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또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전투 마법 강의를 신청했습니다.”
세실리의 말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마법은 뛰어난데 그 마법이 보조를 할 다른 무예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무예를 바로 이곳에서 채우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다른 교수들이라면 얼른 검술 강의나 다른 무예 강의로 가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그녀가 다 생각이 있어서 이 전투 마법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다.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로서 남부의 악마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그 남자가 하는 강의라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전부 채울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세실리는 그런 부분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런 와중에 심각하다 할 정도의 마조 성향에 눈을 뜬다는 것.
“검도, 창도 다룰 줄 모르겠고 요정들처럼 활도 잘 못 쏘겠군요. 무술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니 결국 마법으로만 나를 상대하겠다, 이겁니까? 자신감이 너무 과합니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아요. 다만 배우고 싶습니다. 클라우스 사령관님! 당신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많이 들었어요. 비록 적이나 마족들 어느 누구라도 동경할 수밖에 없는 그 전공들을 듣다보니 꼭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었습니다!”
“….”
“그런 와중에 사령관님이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맡게 되셨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긁적-.
클라우스는 뒷목을 긁으며 침음을 내뱉었다.
1차 대륙 전쟁은 7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어졌다.
서부 연합과 동부 마족들 모두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원래라면 동부 마족들이 승기를 거머쥘 수 있었으나 클라우스의 활약 덕분에 결국 얻은 것 하나 없이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들이 패배를 받아들인 부분은 서부 연합이 강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서부 연합은 더는 싸울 여력이 없었던 반면 동부 마족은 대공세를 한 번 정도는 더 퍼부어줄 여력까지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패배를 선언한 것은 클라우스가 굳건하고, 그렇게 된 이상 전쟁이 지지부진해질 것을 알았기에 자존심을 접고 원활한 정전 협정을 위해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물론 그 속에는 율리아 숙부 놈의 계략이 들어가 있었지만. 마왕이 겁을 먹고 패배를 선언했다고 은연중에 소문을 흘려서 민심을 돌려두는 데에 성공하고 말았지.’
여러모로 참 난 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였다.
제 형수를 취하기 위해 갖은 더러운 수를 쓰고, 그러다가 결국 그 여자가 죽어버리니 그 딸이라도 범하기 위해 제 형까지 몰래 독살한 이후 율리아의 손발을 꽁꽁 묶어둔 후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게 한 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서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다.
그리고 율리아를 붙잡아서 가끔 밤이 심심해지면 찾아가서 괴롭혀주는 노리개로 만든다.
이게 그놈이 꿈꾸는 자신만의 핑크빛 미래라고 할 수 있었다.
‘왜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냈을까. 참 희대의 미스터리지.’
한숨을 내뱉으며 클라우스는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고쳐쥐었다.
“좋습니다, 세실리 생도. 허면 이렇게 하죠. 당신은 마법을 씁니다. 그리고 나는 마법을 쓰지 않습니다.”
“네? 아, 아니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당신은 마법에 자신이 있다고 했고, 역으로 무예를 배우고자 왔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보여주겠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마법을 쓴다고 해도 결국 신체 능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된다는 걸 말이죠.”
클라우스는 제 마력을 일으켜서 딱 목검에만 씌우고는 그 끝으로 세실리를 겨누었다.
저번처럼 마력 응어리를 만들어내서 그녀의 공격을 완전히 무위로 돌린다거나 틈을 노려서 사지가 마비된 교수처럼 만들어주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저를 얕보는 거냐고 화를 냈을 거예요.”
“화내도 됩니다. 실제로 나는 당신을 얕보고 있는 게 맞습니다.”
“네. 저를 얕보고 계시죠. 하지만 인정할게요. 사령관님은. 아니, 교수님은 그만한 자격이 있으세요. 아버지께도, 어머니께도, 가문의 여러 분들께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클라우스 교수님. 당신의 그 눈부신 이야기들을. 믿을 수 없는데 진짜 있던 일이어서 믿을 수밖에 없는 그 일들 말이에요.”
우우웅!-
여인의 말이 끝나자 그 주변에 환하게 빛나는 마력 화살들이 네 개나 생겨났다.
이전에 딱 두 발을 썼던 세실리를 생각해본다면 그녀가 초장부터 최대한의 힘을 짜내서 대련을 하려 한다는 점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최대한 노력할게요. 교수님께서 레블랑 가문의 힘을 보여드리기 위해.”
클라우스는 어서 시작하라는 듯 검 끝을 까딱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두 발의 마력 화살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무섭게 쳐들어왔다.
저번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상대방의 급소를 노리는 일격들.
제대로만 맞는다면 어지간한 실력자도 내부가 진탕이 되어서는 피를 토할 정도였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그런 어지간한 이가 절대 아니었다.
콰직!-
‘하아?!’
세실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함을 토해냈다.
뭔가 화려한 동작은 없었다, 또한 저번처럼 마력을 써서 분쇄한 것도 아니다.
지금 저 남자는 목검에 약간의 마력을 씌운 수준임에도 아주 간단하게 제 마력 화살을 베어 그 자리에서 없애버린 것이었다.
허나 세실리는 당황하지 않고 다음 화살을 쏘아보내며 얼른 다음 마력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직선으로 클라우스를 노리는 게 아니라 약간의 움직임을 넣어 최대한 혼선을 주고 빈틈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쉬이익! 쉭!-
마력 화살이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날아다니며 클라우스의 주변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반투명한 푸른 꼬리까지 가지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헛갈린다 수준이 아니라 아예 시야에 제대로 맞추는 것조차 못 하게 만드는 움직임.
“흠.”
콰지직!-
하지만 클라우스는 사선으로 가볍게 목검을 그어 올리며 그 화살마저 격살해버렸다.
‘여, 역시 클라우스 사령관님! 남부의 악마!!’
지휘 능력만 뛰어났다면 자신들 마족이 그렇게도 동경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군을 지휘하여 적의 함정은 모조리 빠져나가고 역으로 들어오던 적들을 거의 모든 함정에 빠트리는 것과 동시에 그 어떤 강자가 와도 기어코 거꾸러트리던 이가 바로 그였다.
창과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다가 어느 순간 빈틈을 보이면 그 으스스한 마력 응어리가 가차 없이 몸을 두들기는데 그와의 격전에서 살아남은 마족 측 실력자들은 하나같이 괴물 그 자체라고 평하기도 했다.
지금도 딱 그러했다.
그 어떤 마법 공격이나 방어도 하지 않고, 오직 목검만 휘두른다.
그런데도 세실리는 그에게 유효타를 주기는커녕 그가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것조차 전혀 해내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본다면 그의 검술 실력이 엄청나다고 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클라우스가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건, 몸에 익은 수많은 경험이 농축되고 또 농축되어 있어서였다.
‘…이제 여기서 오른쪽으로 갔다가 위로 치솟았다가 아래로 꺾는… 지금.’
콰지직!-
세실리가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는지 이미 다 숙지하고 있다.
그녀의 작은 습관 하나, 하나까지 파악하고 있으며 그걸 이용할 준비도 끝났다.
이번 회차에서만큼은 정말 제대로 즐겨보겠다는 결심을 가진 클라우스다.
그런 남자를, 이 세상의 ‘창조주’ 를 막을 수 있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부우웅!-
세실리는 자신의 바로 앞까지 와 닿은 목검을 간신히 피해냈다.
비록 다룰 줄 아는 병기도 없고 할 줄 아는 무술도 없으나 몸이 굼뜬 건 결코 아니었다.
그저 직접 부딪치면서 싸우는 것에 여태까지 매력을 느끼지 못 해서 적이 접근하기 전에 마법으로 완벽하게 제압하는 걸 선호했던 것뿐이다.
퍼억!-
“꺄악!”
다급하게 마력 화살을 클라우스의 등판에 꽂아 넣으려고 했던 세실리.
그러나 그걸 기다렸다는 듯 남부의 악마는 가볍게 몸을 틀어서 그 공격을 피해냈다.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아쉽다!’ 라는 말이 나왔을 지도 모를 공격이었으나 상황을 볼 줄 아는 자라면 클라우스가 일부러 그렇게 조그마한 틈을 주는 수준으로도 아주 여유롭게 공격을 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직후 가볍게 목검을 휘둘러 세실리를 후려친 클라우스였으니까 말이다.
“콜록! 콜록!”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세실리는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다음 공격에 대비하려는 듯 다급히 마력 보호막을 쳤으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클라우스가 목검을 늘어트린 채 멀찍이서 세실리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다.
“숨은 다 골랐습니까?”
“학, 하악….”
“다 골랐다면, 다시 가겠습니다. 세실리 생도. 혹 패배를 선언할 생각이라면 지금 하세요. 다음 공격부터는 더 거세게 몰아붙일 겁니다.”
“…와주세요. 더 세게 와주세요!”
반드시 상대에게 인정을 받겠다는 결연한 의지라도 품은 것처럼.
세실리는 주먹을 쥐면서 그렇게 소리쳤다.
‘…못 말리겠군. 저렇게 자꾸 기쁨 느껴 가면 안 되는데.’
여전히 세실리 본인은 전혀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대륙 전쟁의 위대한 영웅, 남부의 악마, 마족들조차 동경한 인간 남자와 조금이라도 더 싸워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으로 이리 싸우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나 몸은 거짓말을 못 한다.
쾌감으로 인해 조금씩 가빠지는 숨결이나 은연중에 피어나는 여인의 향기.
무엇보다 클라우스에게 한 번씩 맞을 때마다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을 보짓물까지.
‘그래. 원래 그런 여자니까. 어차피 버릴 생각도 없었으니 야금야금 조련해두면 좋지.’
목검으 고쳐쥔 채 클라우스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조만간 저 여인을 찾아가 진정한 즐거움을 알려줘야 할 듯 싶었다.
* * * * * * * * * *
“….”
“….”
율리아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딱히 아무런 감정도 없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타샤 벨라루스.”
마왕의 입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오자 나타샤는 두 눈을 깜빡였다.
평소의 그 딱딱한 어조가 아니라 상당한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부른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모양.
“당신이 이번 내 대련 상대군요.”
감히 자신이 눈 여겨 보고 있던 남자에게 꼬리를 치던 요정 여인.
저 여자에게 공포의 쓴맛을 좀 알려줘야 할 듯 싶었다.